#148화
갑자기 터진 8성급 던전 브레이크.
원래였으면 전 국토가 초토화되어도 이상할 게 없는 재해급 던전 브레이크였다.
하지만 박한새의 신속한 대응으로 아직 단 한 명의 민간인 피해도 발생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지시를 받은 무공 아카데미 멤버들이 전국 곳곳으로 파견되어 몬스터를 빠르게 진압한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중 가장 독보적인 활약을 펼치는 무공 아카데미 멤버는 바로 이정이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다른 교수들과 달리 단독으로 행동하는 그는 그야말로 신출귀몰 그 자체였다.
10명으로 늘어난 이정이 몬스터 무리의 후미를 공략하였다.
“아군이다!”
“지원이 왔어! 조금만 더 버텨라!”
“와, 엄청 강해!”
던전을 사수하던 헌터들은 이정을 보며 환호하였다.
그의 분신들은 하나하나가 A랭크 헌터 이상의 무력을 보여주었다.
헌터들로선 A랭크 헌터 10명이 지원 온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정의 활약 덕에 5성급 던전 브레이크가 정리되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다음은 또 어디로 가야 했더라?’
또 한 곳을 정리한 이정은 서둘러 움직였다.
그의 지원을 기다리는 곳은 여전히 수도 없이 많았다.
‘그나저나 경기도 전체를 막으라니. 나에게 너무 많은 일을 시키는군.’
박한새의 지시를 떠올린 이정은 혀를 찼다.
위험한 임무는 아니었다.
지금 그의 실력이라면 7성급 던전조차 위기감을 줄 수 없을 정도니까.
다만, 귀찮았다.
원래의 그였으면 최소한의 할당량만 채웠을 터.
현재 3곳의 던전을 정리한 상태이니, 그가 휴식을 취해도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박한새의 지시로 바쁘게 이곳저곳 쏘다니고 있으니 그로선 불만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지시를 어겼다간, 나를 무공 아카데미에서 배제할 테니까.’
무공 아카데미에서 나가는 것?
그로선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었다.
분기마다 지급되는 영약으로 얼마나 많은 내공이 늘어났던가.
무엇보다 박한새에게 배워야 할 무공이 아직 한참 남아있었다.
쾌검도 아직 다 습득하지 못했고, 최근에는 ‘심안’이란 것도 새로 생겼다.
물론 더 배울 게 없다고 해도 과연 그의 성격상, 박한새의 곁을 떠날지는 의문이었지만 말이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정 헌터님. 우리 고래불 길드는 절대 이정 헌터님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헌터들의 환호를 받았다.
순식간에 와서 목숨을 구해줬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이건 나름대로 나쁘지 않군.’
이정이 아무리 냉정한 성격이라도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환호가 싫을 리는 없었다.
그는 피식 웃으며 다음 장소로 향하였다.
다른 던전은 제자들에게 맡기고 내가 가장 먼저 뛰어간 곳은 8성급으로 승급한 대청봉 던전이었다.
‘벌써 많이도 나왔군.’
코끼리 코에 곰의 몸을 가진 거대한 몬스터.
바쿠라는 이름의 몬스터가 무려 수백 마리나 세상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만약 저 몬스터들이 산 아래로 내려간다면 설악산 인근, 아니 강원도 전체가 초토화되고 말 것이다.
저 거대한 몬스터 한 마리, 한 마리가 6성급 던전 보스와 거의 비등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하지만 산 입구를 지키고 있는 단 한 명의 존재 때문에 몬스터들은 괴성만 지를 뿐, 산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고 있었다.
“쿠오오오오!”
한 마리의 바쿠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산 입구를 막고 있던 사내가 맨손으로 바쿠를 쓰러뜨린 것.
그리고 그 사내는 번개처럼 움직여 또 한 마리의 바쿠를 쓰러뜨렸다.
“제가 늦지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내가 사내에게 다가가 그리 말하자 사내, 노홍만은 바쿠를 향해 주먹으로 철권을 쏘아내며 내게 말했다.
“더 늦었어도 상관없다. 나 혼자서도 충분했으니.”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유지은에게 8성급 던전이 곧 열릴 거라는 이야기를 듣자, 나는 노홍만에게 대청봉 던전을 부탁하였다.
회귀 전의 기억으로 대청봉 던전이 8성급 던전으로 승급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이 같은 조치로 8성급 던전이 열렸음에도 민간의 피해는 거의 없다시피 하였다.
“다른 곳은?”
“충분한 인력을 보냈습니다.”
노홍만은 여유가 있는지, 내게 몇 마디 더 말을 걸었다.
현재 상황이 어떤지를 묻는 것인데, 사실 나도 완벽히 파악하고 있지는 않았다.
단숨에 대청봉으로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괜찮을 거다. 회귀 전과 비교하면 압도적인 전력이니.’
비록 이성은이라는 가장 막강한 전력은 없었으나, 크게 상관은 없었다.
교수진의 무공 경지는 회귀 전의 고수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수준.
이들이 있는 한, 한국에서의 던전 브레이크는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물론 여명회의 한국 지부가 남아있었다면 변수가 생길 여지가 있었을 거다.
여명회의 한국 지부를 책임지던 오태호란 남자는 몬스터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타이밍 맞게 그들을 제거한 상태.
그러니 걱정 따위는 할 필요조차 없으리라.
뭐 그렇다고 여유를 부릴 생각은 없었다.
대청봉 던전을 막는다고 모든 게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국내의 상황이 모두 종료되면 외국을 지원하는 일까지 내가 직접 통솔해야 할 터.
그리고 그것 말고도 꼭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 시급히 대청봉 던전의 상황을 종료시킬 필요가 있었다.
“역시 빠르군. 너의 검기는 S랭크 헌터의 스킬이라고 해도 믿을 수준이야.”
“실력이 늘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노홍만 교수님도 벽을 한 단계만 넘으면 됩니다.”
“흠. 왠지 그 벽이 S랭크와 A랭크 사이의 벽보다 훨씬 높을 거 같군.”
늘 무덤덤하던 노홍만이 감탄할 정도로 내 사냥 속도는 엄청났다.
검기가 마치 채찍처럼 휘어지며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수 마리의 바쿠를 죽이고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지진이 나듯, 땅이 크게 흔들렸다.
처음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할 때 던전 근처에 있으면 나는 소리와 유사하였다.
“보스다.”
이 묵직한 진동.
회귀 전에 자주 느꼈던 진동이었다.
그리고 던전에서 나온 8성급 던전 보스도 내게는 무척이나 익숙한 몬스터였다.
여덟 개의 다리, 도마뱀의 얼굴을 가진 초대형 몬스터.
그 몬스터의 이름은 다름 아닌, 바질리스크였다.
‘역시 엄청난 위압감이군.’
바쿠 따위에게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위압감이었다.
8성급 던전 보스쯤 되니 확실히 만만치 않게 느껴졌다.
‘그나마 내가 잘 아는 몬스터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어떻게 보면 겨우 8성급이다.
고작 8성급에서 위기감이란 것을 느끼다니.
물론 질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수없이 상대해본 몬스터였기 때문이다.
“보스는 제가 맡겠습니다.”
“나는 잔챙이를 맡으라는 거냐?”
“부탁드리겠습니다.”
“뭐 좋다. 근데, 혼자서 괜찮겠나?”
노홍만도 바질리스크로부터 상당한 위압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답지 않게 걱정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하긴, 무공을 배우기 전의 그였으면 상대하는 것은 엄두도 못 낼 몬스터가 바질리스크였으니 그가 걱정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거리고는 바질리스크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여느 몬스터가 그렇듯, 던전에서 막 나온 바질리스크는 괴성을 지르며 자신의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의 괴성을 들은 바쿠들도 가슴을 두드리며 존재감을 마구 발산하였다.
아마 지금쯤 바질리스크의 괴성을 들은 설악산 근처의 몬스터들 전부가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을 거다.
헌터들도 심상치 않은 징조를 느끼고 있겠지.
나는 그런 바질리스크를 향해 검기를 발산하였다.
바질리스크의 외피에 작지 않은 자상이 생겼다.
자상에는 초록색 피가 흘렀는데 연기를 내뿜는 모습이 한눈에 봐도 심상치 않아 보였다.
실제로 바질리스크의 피는 극독이었다.
살짝만 닿아도 즉사를 피하기 어려울 수준의 극독.
하지만 정작 피를 흘린 바질리스크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내려 나를 쳐다봤다.
그 순간, 나는 보법을 펼쳐 자리를 이동하였다.
바질리스크의 눈동자가 나를 빠르게 쫓았다.
우연히 그 눈동자가 바쿠를 향하자, 바쿠의 몸이 돌로 바뀌었다.
마치 메두사가 그러하듯, 바질리스크는 석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노려보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돌로 만드는 게 가능하였다.
물론 바질리스크의 눈빛에 닿지만 않으면 됐다.
보법을 극한으로 펼치며 바질리스크의 눈빛을 피하고는 바질리스크의 약점을 노렸다.
피부는 강철만큼이나 단단하였고 함부로 공격하면 독에 의해 역으로 당할 수도 있는 무적 같은 존재가 바질리스크였다.
심지어 주기적으로 독을 내뿜어 주변에 있는 것을 모조리 재로 만들었다.
그야말로 존재 자체가 재해나 다를 게 없었다.
아마 바질리스크가 인간을 공격하지 않는다고 해도 바질리스크는 반드시 멸해야 할 것이다.
가만히 두면 몇 달 안에 한국 전역을 사막으로 만들어버릴 몬스터였으니.
하지만 그런 바질리스크도 약점이 있었다.
바질리스크의 이마에는 수탉의 볏과 유사하게 생긴 살 조각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바질리스크의 약점이었다.
나는 그 약점을 집요하게 노렸다.
직감적으로 느꼈다.
바질리스크가 나를 시야에서 완전히 놓쳐버렸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지금이 기회였다.
나는 검기를 길게 내뿜고는 10m 이상의 거리에 있는 바질리스크의 볏을 향해 날렸다.
길게 내뿜어진 내 검기는 채찍처럼 날아가더니 정확하게 바질리스크의 볏을 베어냈다.
“쿠오오오오오!”
괴성을 지른 바질리스크는 사방으로 ‘블레스’를 쏘았다.
극독의 블레스는 반경 수십 m 안에 있는 바쿠들을 순식간에 몰살시켰다.
실로 무시무시한 위력이 아닐 수 없었다.
노홍만도 처음 경험한 블레스 공격에 당혹감을 느꼈는지 멀리 물러날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당황하지 않고 이번엔 도마뱀의 목을 노렸다.
한 번, 두 번.
볏이 베인 데다 목까지 수없이 검기에 베이니 제아무리 바질리스크라고 해도 버틸 재간이 없었다.
결국, 바질리스크는 거대한 몸을 축 늘어뜨리며 죽음을 맞이하였다.
“엄청나군. 8성급 던전 보스의 수준은 이 정도라는 건가.”
내가 바질리스크를 상대하는 동안 바쿠를 모두 처치하였는지 노홍만이 내게 다가와서는 감탄한 기색으로 말하였다.
“그나마 약점이 분명한 몬스터라서 쉽게 상대한 거 같습니다.”
“다른 8성급 던전 보스는 이보다 어렵다고?”
“그거야 저도 모르는 일입니다. 저 역시 8성급 던전 보스를 경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니 말입니다.”
“흠, 너는 뭔가 다 아는 거 같은데, 기분 탓인가?”
그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였다.
아무리 그라도 내가 미래에서 회귀했다는 사실을 알려줄 수는 없었다.
“그런데 바질리스크에게선 무슨 아이템이 나왔지?”
헌터에게는 상태창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게임적인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바로 아이템이라는 게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난 바질리스크 사체 주변에 생긴 아이템을 훑어보았다.
역시 최초의 레이드였기 때문일까?
바질리스크에서 나올 수 있는 아이템 중 가장 좋은 아이템들이 나왔다.
아이템은 모두 여덟 개로 종류는 장신구, 무기, 방어구 그리고 포션처럼 생긴 유리병 한 병이었다.
‘카르마 상점이 있어서 웬만해서는 아이템이 나와도 별로 기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나에겐 카르마 상점이 있었다.
카르마 상점은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물품이 존재할 것처럼 느껴지는 만물상점이었다.
하지만 정말 ‘유니크’라는 등급이 존재하는 것인지, 카르마 가격과 무관하게 상점에 존재하지 않는 물품도 있었다.
‘사람의 몸을 금강불괴로 만들어주는 약이라. 꽤 쓸만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