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동양인으로 이루어진 헌터들의 지원 덕에 러시아 헌터들은 라미아의 공격으로부터 간신히 살아났다.
“휴! 겨우 살았다. 이번엔 진짜 뒤지는 줄.”
“그런데 저 사람들은 누구지?”
“몰라. 누구든 구해줬으면 은인이지.”
“동양인이니 일본인이든 한국인이든 둘 중 하나 아니야?”
“중국인일 수도 있잖아?”
“중국인이겠냐?”
“아….”
하지만 러시아 헌터들 모두가 이 상황을 기뻐하는 것은 아니었다.
A랭크 헌터인 나우모프 바실리가 전리품을 수습하는 한국 헌터들을 향해 버럭 외쳤다.
“너희가 뭔데 우리 아이템들을 가져가는 거야! 꺼져! 이건 다 우리 거라고!”
러시아 헌터들이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 한국 헌터들은 전리품을 수습하고 있었다.
기여도로 따지면 한국 헌터들이 절대적이었으니.
하지만 나우모프 바실리만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지, 혼자 화를 냈다.
그러자 동료인 A랭크 헌터가 말렸다.
나우모프 바실리를 제외하면 이곳에서 유일한 A랭크 헌터였다.
“바실리, 지금 뭐 하는 거야! 저들이 아니었으면 우린 죽을 뻔했다고!”
“죽기는 뭘 죽어! 내가 겨우 라미아 몇 마리 때문에 죽을 거 같아? 그리고 애초에 누가 도와달라고 한 적 있어? 저놈들이 갑자기 나타나서 우리의 사냥감을 죽인 거라고!”
동료들도 그런 나우모프 바실리의 모습을 황당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들이 위기에 처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
나우모프 바실리도 앓는 소리를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막상 위기가 끝나니, 태세를 전환하여 옹졸하게 구는 그의 모습이 썩 좋게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우모프 바실리는 사실상 팀의 리더였다.
이곳에서 둘밖에 없는 A랭크 헌터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상황을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저 러시아인이 뭐라고 한 거지?”
노홍만이 딱딱한 목소리로 유지은에게 물었다.
“전리품 내놓으라는데요? 검은 머리 짐승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더니. 딱 그 짝이네요.”
“웃기는 놈들이군.”
그가 싸늘하게 웃고는 러시아 헌터들에게 다가갔다.
“우리가 잡아서 우리가 갖겠다는데, 왜 난리를 부리는 거지?”
“여긴 러시아야! 러시아에서 잡은 몬스터의 전리품은 모두 러시아인의 것이다!”
“따질 거면 국제 헌터 협회에 따지도록. 우리는 국제 헌터 협회에게 전리품을 가져도 괜찮다는 약속을 받고 왔으니까.”
“국제 헌터 협회? 그놈들이 왜 우리나라 일에 관여하는 거지?”
“네 나라 대통령이 국제 헌터 협회에 도움을 요청했는데 그것도 모르나?”
“그리고 웃기는군. 헌터가 왜 입으로 말하지? 갖고 싶으면 뺏어 봐.”
노홍만은 구태여 내공을 사용하여 기세를 일으키지 않았다.
오히려 먼저 공격해달라는 듯, 팔짱을 끼며 도발적인 태도를 보였다.
원래 그의 성격 같았으면 주먹부터 날리고 봤겠지만, 그는 박한새에게 무공만 배운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주먹부터 날리는 대신, 우아하게 도발을 선택한 것.
하지만 나우모프 바실리 입장에서는 이미 노홍만의 무력을 확인한 상태였다.
“이익! 두고 보자! 러시아의 무서움을 보여주마!”
도발에 넘어가는 대신, 복수를 선언하고 도망치듯 물러나는 나우모프 바실리였다.
한국에서 지원 온 헌터들은 프리모리예 즉, 연해주 곳곳으로 흩어져 던전 브레이크 사태를 정리해갔다.
이 같은 한국 헌터들의 활약에 러시아 헌터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시베리아만큼은 아니지만, 연해주 역시도 안전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우모프 바실리처럼 전리품을 탐하던 일부 헌터들의 생각은 달랐다.
“갑자기 한국 놈들이 왜 와서는 우리 것을 빼앗아가는 거야?”
“대통령이 국제 헌터 협회를 끌어들였다잖아.”
“무능한 대통령 같으니! 지들 권력 싸움 때문에 괜한 짓을 벌이는군!”
“괜한 짓은 아니지. 시베리아가 위험한 것은 사실이니까.”
“시베리아가 위험한 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
“그러게. 난 솔직히 한국 헌터의 지원이 없어도 우리끼리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르툠에서 죽을 뻔한 기억은 벌써 잊은 거냐?”
“그건 갑자기 보스가 튀어나와서 그랬던 거고!”
한국 헌터들의 개입에 불만을 가진 러시아 헌터들은 한 장소에 모여 그와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참고로 그들은 B랭크 이상의 고랭크 헌터들이었다.
“근데 너희들, 그 이야기 들었어? 한국의 헌터들을 지휘하는 이가 비각성자라더군.”
“그건 뭔 개소리야? 비각성자가 헌터를 지휘한다고? 대통령이 직접 오기라도 했대?”
“쯧, 아직도 모르나 보지? 무공이란 걸 만든 비각성자에 관한 이야기를 말이야.”
세상의 모든 헌터가 무공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든 바깥소식에 어두운 헌터는 꼭 있었다.
그리고 그런 헌터들이 러시아에 유독 많았다.
러시아 헌터 협회에서 영향력을 잃을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언론 통제를 한 결과였다.
“내가 듣기로 한국의 헌터들만 지휘하는 게 아니라는데?”
“국제 헌터 협회 소속의 헌터들도 그 비각성자의 지휘를 받게 될 거야.”
로프샨이라는 길드인지, 마피아인지 정체성이 모호한 세력을 이끄는 루파트 나시보프의 말에 모두가 큰 충격을 받았다.
“뭐라고요? 그러면 우리 러시아 헌터들도 그 비각성자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는 겁니까?”
“국제 헌터 협회와 작전을 같이 한다면 그렇게 해야겠지. 그리고 7성급 이상을 노리려면 무조건 국제 헌터 협회와 공조를 해야 할 것이고 말이야.”
“미친! 같은 러시아인도 아니고 한국인, 심지어 비각성자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니!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나에게 따져봐야 뭐 어쩌라는 거야. 이미 정부에서 내린 결정인 것을.”
그들도 러시아가 엄청난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원래도 헌터 수가 턱없이 부족했던 시베리아에 8성급 던전이 무려 두 개나 생긴 상태.
이미 던전 주변은 초토화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것이다.
어쩌면 시베리아 전역이 아프리카의 일부 지역들이 그러하듯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이 되어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거야 시베리아의 문제였다.
그들이 사는 연해주 지역은 어느 정도 안전이 확보된 상태.
연해주가 안전하다면 시베리아야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니었다.
원래 헌터의 의무는 자기 지역을 방어하는 것이기도 했고.
“우리 협회는요? 협회에서 따로 이야기 내려온 거 없습니까?”
“알아서 하라더군.”
“빌어먹을! 협회 놈들, 꼭 중요한 순간에만 도움이 안 돼!”
“극동의 일에는 관심이 없다는 거겠지.”
그때, A랭크 헌터 나우모프 바실리가 분기에 찬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여러분, 여러분은 동양인 비각성자의 지휘에 따를 겁니까?”
“전리품에 관심이 있다면 그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지 않나?”
“이 나라의 몬스터를 사냥하고 얻은 전리품은 우리 러시아인의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동양인, 그것도 헌터가 아닌 자에게 전리품을 분배해야 합니까?”
“마음에 안 들긴 합니다. 비각성자 따위에게 전리품이라니.”
“그래서 어쩌자는 거지? 국제 헌터 협회의 도움을 받지 않고 우리끼리 힘을 모아 몬스터를 잡자는 말인가?”
러시아 헌터들끼리 힘을 모아 레이드 한다면 박한새의 지휘를 받지 않아도 된다.
전리품도 당연히 러시아 헌터들 사이에서 분배될 것이고.
하지만 문제는 ‘속도’였다.
“놈들이 몬스터 잡는 속도 봤어? 순식간이야. 우리가 놈들과 경쟁해봤자, 승산이 없다고!”
“그들이 사냥하지 못하게 막으면 그만이지 않습니까.”
“정부도, 협회도 우리의 편이 아닌데?”
“상관없습니다. 여기는 우리 러시아의 땅이지 않습니까.”
나우모프 바실리의 말에 모두가 고민에 잠겼다.
그들이라고 한국 헌터들과 전리품을 나누고 싶겠는가.
“좋아. 그럼 내가 그 비각성자라는 자에게 우리의 입장을 전해보겠다.”
“오, 나시보프 길드장님이 나서주신다면 놈들도 저희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겁니다.”
루파트 나시보프는 연해주 지역에서 몇 없는 S랭크 헌터였다.
한국의 헌터들이나 국제 헌터 협회 소속의 헌터들이나 압박감을 느낄 수밖에 없으리라.
“대신 그들과 적대관계가 될 수 있다는 위험 부담을 감수하는 만큼 전리품 분배에서 기여도를 더 인정해주길 바라네.”
“물론입니다. 다른 분들 역시 동의할 겁니다.”
“저 역시 나시보프 길드장님이 나서주신다면 전리품을 조금 더 갖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동의합니다.”
그렇게 연해주 지역의 고랭크 헌터들은 7, 8성급 던전 전리품이라는 막대한 보물을 두고 합심하기로 결정하였다.
“다행히 민간인의 피해는 크지 않았습니다.”
“삼천 명 정도라고 했죠?”
“예. 사망자는 천 명이 채 안 되고, 부상자만 이천 명입니다.”
조금만 늦었어도 피해가 상당했을 터.
늦지 않게 지원을 와줘서인지 연해주의 피해는 크지 않았다.
“러시아 헌터들의 피해는 어떻습니까?”
“D랭크 이하는 대략 백 명, 고랭크 헌터는 다섯 명이 전사하였습니다.”
헌터의 피해도 그리 심하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바로 출동해도 문제없겠지요?”
“러시아 헌터들의 사기도 나쁘지 않으니 언제든 출동하셔도 될 거 같습니다.”
국제 헌터 협회 직원의 말에 나는 교수들을 불렀다.
“시베리아로 출동인가?”
“나는 준비됐다.”
“저도 몸 풀기밖에 안 됐어요.”
“학생들이 어서 빨리 출동하고 싶다 하네요.”
각자 최소 한 번 이상 전투를 치렀지만 전혀 지친 기색이 아니었다.
하기야, 겨우 5성급이나 6성급 던전 브레이크에서 S랭크 헌터급 무력을 가진 그들이 지칠 리는 없었다.
“총장님! 러시아의 길드 마스터들이 찾아왔습니다.”
“마침 잘 왔군.”
안 그래도 러시아 헌터들을 부를 생각이었는데, 때마침 길드 마스터들이 와주었다.
나는 유지은에게 통역을 부탁하고는 러시아 길드 마스터들에게 말하였다.
“지금 바로 출정하여, 프리모리예 지방의 던전들을 모조리 정리할 겁니다. 그리고 기세를 몰아 시베리아의 던전 브레이크까지 정리할 계획입니다.”
유지은이 내 말을 러시아로 통역해주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몇몇은 앞으로의 전투가 기대되는지 분위기가 좋아 보였고 몇몇은 무언가가 불만스러웠는지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전리품은 어떻게 분배할 계획이오?”
그중 S랭크 헌터라고 밝힌 루파트 나시보프가, 전리품 분배 계획을 물었다.
‘자국민이 몬스터에게 죽어 나가는 상황에서 전리품 이야기를 가장 먼저 꺼내다니.’
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헌터들의 성향이 어떤지는 알고 있었지만, 자신들을 도우러 온 외국인 앞에서까지 이런 모습을 보일 줄이야.
“전리품은 국제관례대로 기여도에 따라 분배할 겁니다.”
“국제 헌터 협회는 러시아를 도우러 왔으면서 전리품을 탐한다는 말이오?”
루파트 나시보프의 말에 내 뒤에서 헛웃음 소리가 들렸다.
아마 그의 말에 황당함을 느낀 것이리라.
“저희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저희와 함께하지 않으면 될 일입니다.”
“글쎄. 그 이야기는 반대로 적용해야 맞을 거 같소만.”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와 함께하여 우리의 룰에 따르시오. 우리의 룰에 따르지 않을 거면 본국으로 돌아가시고.”
그가 그리 말하자, 러시아 헌터들 사이에서 큰 웃음소리가 들렸다.
“푸하하하.”
“로프샨 길드 마스터가 말 잘했네. 러시아에 왔으면 러시아의 법을 따라야지!”
“애초에 비각성자가 헌터인 우리를 지휘한다고? 크크.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들이 뭐라고 비웃는지는 유지은의 통역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나는 단전의 내공을 끌어올려 러시아 헌터들을 향해 기세를 발산하였다.
이 자리에 S랭크 헌터라고 해봐야 겨우 세 명뿐.
사실, 이 세 명이 진짜 S랭크 헌터 수준의 실력을 가졌는지도 의문이었다.
러시아 협회의 랭크 측정의 신뢰도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말들이 많았으니까.
애초에 러시아 수준의 국가에 S랭크 헌터가 서른이나 있다는 사실도 선뜻 믿기 어려웠고 말이다.
‘설령 이들이 진짜 S랭크 헌터의 실력을 가졌다고 해도 상관없다.’
절정 고수의 내공으로 눌러주면 그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