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러시아 헌터들과의 신경전은 싱겁게 막을 내렸다.
내가 단전의 내공을 끌어올려 압박하니 S랭크 헌터들조차 감히 자존심을 부리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전리품 문제로 노홍만과 신경전을 벌였다던 나우모프 바실리라는 A랭크 헌터도 마찬가지였다.
“막상 덤비지도 못할 거면서 왜 저렇게 시비를 거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비각성자니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내 말을 들은 김민경이 답답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더 바보 같아요. 사부님의 명성을 듣지 못한 것도 아닐 텐데, 그저 비각성자라는 이유로 무시한 거잖아요?”
“저는 이해합니다. 원래 자기가 직접 본 것만 믿는 사람도 있는 법이니.”
“그러면 이번에 확실하게 보여줬으니 다음에는 귀찮게 굴지 않겠죠?”
나는 말끝을 흐렸다.
과연 러시아 헌터들이 내게 적극적으로 협조해줄까?
솔직히 나는 그럴 리 없을 거라고 장담하였다.
헌터 특유의 선민사상은 쉽게 고쳐지는 것이 아니었다.
한국에서도 내 무력을 인정받기까지 수개월의 시간이 걸렸었다.
한국이 그러했는데 한국의 헌터보다 더 선민사상이 강한 러시아 헌터들은 어떻겠는가.
‘뭐 계속 보여주는 수밖에 없겠지. 내 압도적인 실력을.’
5사도로 인해 사실상 전멸을 면치 못했던 러시아 헌터들이었다.
아마 러시아 헌터 중에서도 무공의 재능을 가진 이가 적지 않을 터.
그들이 헌터 특유의 선민사상 때문에 무공을 배우는 걸 거부하는 상황은 나로선 원치 않았다.
그러니 나는 계속 확인시켜주기로 마음먹었다.
비각성자가 헌터보다 더 강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박한새, 노홍만, 김민경, 유지은.
한국 헌터들은 이 네 사람을 중심으로 네 곳의 던전을 동시에 공략하기로 하였다.
러시아 헌터들도 네 개의 무리로 쪼개졌는데, 그중 박한새가 이끄는 헌터 부대에 합류한 러시아 헌터들은 고의로 느릿하게 행군하고 있었다.
“지금쯤 싸움이 시작됐겠지?”
“에이, 그렇게 빠르다고? 그놈들도 휴식을 취하고 움직였을 테니, 아직은 안 마주치지 않았을까?”
“그 비각성자가 S랭크급 무력을 가졌다잖아. 그러면 혹시 모르지, 서둘렀을지도.”
“흠. 우리도 조금 더 서두르는 게 좋으려나?”
“나는 조금 서두르는 게 낫다고 봐. 괜히 우리가 늦어서 그놈들이 전멸이라도 당하면 우리만 귀찮아지잖아?”
“크. S랭크급 강자도 있는데 7성급 던전 브레이크로 전멸한다면 웃기긴 하겠어.”
7성급 던전을 레이드 하려면 S랭크 헌터가 반드시 있어야 했다.
던전 브레이크의 경우, S랭크 헌터가 더 많이 필요하였는데 던전 안에서 마주칠 때와 달리, 몬스터가 대규모로 밀집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러시아 헌터들은 한국의 헌터들과 경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한국의 헌터들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즉, 한국의 헌터들을 먼저 보내 몬스터의 숫자를 최대한 줄인 뒤, 막타를 치려는 계획이었다.
그들이 느릿하게 행군한 것도 전장에 늦게 도착하기 위함이었다.
“뭐야, 왜 저렇게 강해?”
“오우거가 한 방에 죽었어!”
“미친, 죄다 S랭크 헌터들이라도 되는 거야?”
하지만 정작 전장에 도착하자 러시아 헌터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오우거.
던전 보스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게 느껴질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몬스터였다.
그런 오우거가 한국 헌터들의 손에 무기력하게 쓰러지고 있었다.
러시아 헌터들이 모든 스킬을 때려 박아 다 같이 한 마리, 한 마리씩 잡는 식의 레이드를 한다면, 한국 헌터들은 각자 한 마리씩 맡아서 오우거를 상대하였다.
근거리와 원거리, 딜러와 탱커의 구분도 없었다.
대형 따위는 짤 필요도 없다는 듯, 검 한 자루씩 들고 싸우는데 오우거가 줄어드는 속도가 실로 엄청났다.
타타타탕!
특히 권혁진이란 헌터의 활약이 놀라웠다.
일개 학생 신분이라는데, 마치 기관총을 쏘듯 마탄이란 것을 마구 쏘아댔다.
그리고 그 마탄의 위력은 엄청났다.
A랭크 헌터의 공격도 막아내는 오우거가 그의 공격은 몇 번 버텨내지 못하고 죽었던 것이다.
“지, 지금이라도 나서야 하지 않을까?”
“이미 끝났는데 지금 나서봤자 욕이나 더 먹어?”
“그건 그렇긴 하네….”
“젠장, 뭐 저리 강한 거냐고.”
전리품을 주장하려면 그들도 기여도를 높여야 했다.
최소한 오우거 몇 마리는 잡아야 전리품을 주장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염치없는 그들도 이미 다 끝난 상황에서 끼어들기는 눈치 보였다.
한국 헌터들의 실력을 보지 못했다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지 않은가.
괜히 한국 헌터들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무슨 꼴을 당할지 몰랐다.
“근데 그 S랭크급 강자라는 비각성자는 어디에 있어?”
“그러게. 안 보이는데?”
“아, 저기 있다! 저기 뒤에서 팔짱 끼고 구경하는 사람이 너희들이 말한 그 비각성자 아니야?”
“맞네. 뭐야, 저놈 왜 저러고 있대?”
“우리처럼 실력이 없어서 못 끼고 있는 거 아니야?”
“그러게? 역시 S랭크급 무력을 가졌다는 건 거짓말이었나?”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일이었어. 비각성자가 S랭크급 무력이라니!”
러시아 헌터들이 박한새를 두고 악담을 하고 있을 때, 던전 보스인 트윈 헤드 오우거가 박한새의 뒤에 나타났다.
“어? 저거 위험한 거 아니야?”
“잘하면 시체 하나 보겠는데?”
“우리가 구해줄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상대는 트윈 헤드 오우거라고.”
그들은 걱정 반, 흥미 반으로 박한새의 상황을 바라봤다.
‘끝났군!’
트윈 헤드 오우거가 커다란 몽둥이로 박한새를 내리찍는 순간, 러시아 헌터들은 직감하였다.
박한새가 저 공격을 맞고 즉사하게 될 거라고 말이다.
“멍청한 놈! 저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저항이라도 해봐!”
“쯧! 두려움에 패닉이라도 왔나 본데?”
러시아 헌터들이 박한새의 죽음을 직감한 그 순간.
그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반전이 일어났다.
두려움에 빠진 듯, 제자리에서 꼼짝도 못 하고 있던 박한새가 살짝 자세를 낮추는가 싶더니 트윈 헤드 오우거의 목이 동시에 날아간 것이다.
“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러시아 헌터들은 하나같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트윈 헤드 오우거는 7성급 던전 보스.
8성급 던전 브레이크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 현존하는 몬스터 중에서 가장 강한 몬스터 중 하나였다.
그런 몬스터가 단 한 방에 정리되다니.
실로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저, 저딴 게 비각성자?’
트윈 헤드 오우거를 단독으로 잡아낸 이후, 나는 러시아 헌터들의 눈이 확 달라졌음을 느꼈다.
적어도 이곳에 있는 러시아 헌터들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거다.
내가 측정 불가의 무력을 가진 강자라는 사실을.
“총장님, 이번에는 전리품을 어떻게 분배하실 겁니까?”
권혁진이 다가와 묻자, 나는 러시아 헌터들에게 향한 시선을 거두고 그에게 답했다.
“기여도가 높은 학생부터 우선순위로 지급하겠습니다.”
“학생들만요? 트윈 헤드 오우거를 잡은 건 총장님인데, 왜 전리품을 받지 않으십니까?”
“제가 받아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전리품은 어떻게 분배해도 말이 나왔다.
n분의 1을 해도 말이 나왔고 기여도가 높은 순서대로 분배해도 말이 나왔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내가 있는 이곳에서는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
가장 기여도가 높은 내가 아예 전리품을 주장하지 않으니까.
‘어차피 카르마 상점에서도 살 수 있는 것들인데, 굳이 욕심낼 필요는 없지.’
뭐 설령 내가 전리품을 독식해도 문제 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을 거다.
무공 아카데미에서 내 권위는 절대적이었으니.
그러나 학생들의 의욕을 고취하고 실질적인 실력을 상승시키려면 괜한 욕심은 부리지 않는 게 좋았다.
“그래도 8성급을 잡을 때는 기여도가 높은 순대로 받을 겁니다.”
8성급 아이템은 아무리 나라도 욕심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뱃사공의 목걸이만 봐도 카르마 상점에서 가장 비싼 물품보다 훨씬 값진 가치를 지녔지 않은가.
물론 뱃사공의 목걸이가 8성급 아이템 중에서 유독 효과가 좋은 거긴 했지만 말이다.
‘웬만한 9성급 아이템보다 더 좋으니 말 다 했지. 물론 제대로 된 효과를 보려면 엄청난 시간을 들여야겠지만 말이야.’
다른 전장의 상황을 보고 들었다.
역시 기대했던 대로 상황은 순조로웠다.
연해주의 던전 브레이크 사태는 아마 곧 종결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럼 바로 시베리아에 갈 준비를 해야겠군.’
내 목적지도 사실 시베리아에 있었다.
5사도, 아니트리 코프헤브가 처음 세력을 만들었던 곳이 바로 러시아의 시베리아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유지은 교수님, 상황이 종료되면 그다음에는 바로 하바롭스크 지방으로 이동할 준비를 해주십시오.”
-하바롭스크 지방이라면, 8성급 던전을 정리하려는 거죠?
시베리아에 생겨난 두 개의 8성급 던전 중 한 개가 하바롭스크라는 지역에 있었다.
어차피 목적지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있었으니, 러시아인의 피해도 줄일 겸 서둘러 정리할 생각이었다.
나는 유지은, 김민경, 노홍만에게 각각 전화로 지시를 내리고는 내가 통솔하는 병력에게도 직접 명령을 내렸다.
원래라면 러시아 헌터들이 휴식을 최소로 한 강행군에 불만을 드러냈어야 정상인데 군말 없이 나를 따랐다.
실력을 보여준 게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정작 나의 발걸음을 붙잡는 것은 러시아 헌터들이 아닌, 러시아군이었다.
“죄송하지만 하바롭스크 지역으로는 이동하실 수 없습니다.”
“하바롭스크에 8성급 던전이 터졌다고 들었습니다만.”
“그 8성급 던전을 막기 위해 군에서 계획한 작전이 있습니다. 그러니 하바롭스크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는 중령 계급을 가진 러시아군 장교의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우리의 도움을 받지 않고 타디그레이드를 잡으려는 모양이군.’
하바롭스크 지역에 나타난 8성급 던전 보스의 이름은 타디그레이드.
걷는 모습이 곰과 비슷하여 물곰이라고도 불리는 몬스터였다.
‘나의 도움 없이 타디그레이드를 잡겠다니. 멍청한 판단이야. 타디그레이드는 절대 만만한 몬스터가 아닌데 말이야.’
왜 러시아군이 우리의 움직임을 막는지 나 역시 정확한 이유는 몰랐다.
우리의 실력을 못 믿어서일 수도 있고, 타디그레이드의 전리품이 욕심나서 그러는 것일 수도 있다.
현재 세계 각국에서 8성급 던전 보스 레이드에 성공하고 있는 상황.
헌터 강국인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나의 도움을 받지 않고 레이드에 성공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성공 사례들 덕에 8성급 던전의 전리품에 관한 소문도 나돌고 있었는데 소문만 들었을 때 8성급 던전은 그야말로 보물상자였다.
억 단위를 넘어 조 단위의 가치를 지닌 아이템들이 나왔으니 말이다.
아마 러시아 정부로서는 이 전리품이 우리에게 넘어가는 것이 탐탁지 않았을 터.
그러니 우리가 연해주를 막고 있는 동안 타디그레이드를 잡을 생각이었을 거다.
물론 우리가 이렇게 빨리 연해주의 상황을 정리할 줄은 예상 못 했을 것이고.
‘러시아군의 시도가 성공할 리는 없으니, 그저 피해가 적었으면 하는 바람이군.’
내 예상은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전차와 미사일, 폭격기.
러시아는 군의 화력을 총동원하여 타디그레이드를 공격하였다.
이미 다른 나라에서 시도했다 실패했던 일을 똑같이 되풀이하는 셈이었다.
그것도 8성급 던전 보스 중, 아니 9성급 던전 보스까지 포함해도 가장 생존력이 강하다는 타디그레이드를 상대로 말이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타디그레이드는 어떤 타격도 받지 않았다.
수백 명의 무의미한 희생자만 나왔을 뿐이었다.
이마저도 타디그레이드가 움직임이 굼뜨다는 약점이 있어서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결국, 러시아 정부에서 핵까지 사용하네요. 우리에게 맡기면 될 일인데….”
김민경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핵을 쏘면 타디그레이드를 잡을 수 있겠죠?”
10분 뒤.
러시아의 핵이 타디그레이드를 정확하게 타격하였다.
그리고 타디그레이드는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은 듯, 멀쩡하게 서쪽 방향으로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