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그건 무슨 아이템이지?”
“와그너의 신발이라는 아이템입니다. 이 아이템에 저장해놓은 지역이라면 순간이동을 해서 단숨에 갈 수 있습니다.”
내가 타디그레이드를 잡고 얻은 아이템을 들어 올리며 아이템 효과에 관해 설명해주었다.
와그너의 신발.
이 신발의 효과는 단순명료하였다.
공간을 이동하게 해주는 스킬이었던 것이다.
‘이 아이템이 타디그레이드를 잡고 나온 아이템이었을 줄이야.’
회귀 전, 경매장에 나와 조 단위의 경매가를 기록하였던 아이템이었다.
그때는 아이템의 출처를 몰랐었는데, 알고 보니 타디그레이드의 전리품이었다.
‘지금의 내게 딱 필요한 아이템이지. 장산군도를 편하게 왔다 갔다 할 수 있으니 말이야.’
시공간 즉, 시간과 공간을 다루는 스킬이나 아이템은 카르마 상점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정이 무공 아카데미에서 노홍만과 거의 비등한 수준의 무력을 자랑하는 것도 그가 가진 ‘시간 가속’이란 스킬의 영향이 컸다.
어쨌든, 와그너의 신발은 비록 쿨타임이란 것이 존재하여 하루에 한 번밖에 사용할 수 없다는 제한이 존재하였지만, 아무리 먼 거리도 단숨에 이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엄청난 메리트를 가졌다.
“8성급에도 이 정도의 아이템이 나오는데 9성급까지 열리면 어떤 아이템이 나올지 궁금하군.”
“글쎄요. 저는 이왕이면 9성급이 열리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9성급 던전이 열리면 많은 사람이 죽게 되지 않겠습니까?”
8성급이 열린 뒤로 이미 많은 사람이 죽었다.
아마 앞으로 더 많은 사람이 죽게 될 것이다.
8성급이 열렸다는 것은 단지 던전의 난이도가 높아졌다는 사실만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헌터의 권력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질 터.
실제로 러시아에서도 헌터 협회의 입김이 이전보다 훨씬 강해지고 있었다.
강대국이라 불리는 러시아가 이 정도이니, 아프리카나 남미 같은 곳은 헌터들이 권력자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였다.
회귀 전의 역사에서도 9성급이 열릴 때쯤, 세상은 헌터가 귀족이 되어 권력을 독점하는 나라와 간신히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나라로 나뉘었다.
‘여기서 9성급까지 열리면 그때는 사회가 더 엉망이 되는 거지.’
특히 9성급 던전은 9성급 몬스터들도 위협적이지만, 파롤의 졸개들이 9성급 몬스터들을 이용하여 더 강해진다는 점이 문제였다.
몬스터를 양분으로 삼아 강해지는 세력이 여명회였다.
당연히 더 강한 몬스터가 나올수록 여명회의 힘도 더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9성급이 열리기 전에 더 많은 이에게 무공을 가르치면 되는 거 아닌가? 안 그래도 러시아 헌터들이 무공을 배우고 싶어 하는 거 같던데.”
노홍만의 말처럼 9성급이 열리기 전에 최대한 많은 이에게 무공을 가르쳐야 했다.
러시아 헌터들도 당연히 그 대상에 포함되어있었다.
‘하지만 그 전에 5사도부터 처리해야 한다.’
회귀 전에 5사도에게 몰살당하여 무공을 배울 기회가 아예 없었던 러시아 헌터들.
그들이 무공을 배운다면 9성급 던전 브레이크를 막기가 수월해질 거다.
물론 여명회와의 전쟁에서도 큰 도움이 될 것이고.
하지만 그들에게 무공을 가르치고자 한다면, 더더욱 5사도를 처리해야만 했다.
더 시간을 끌었다간 5사도가 러시아 전체를 집어삼킬 테니까.
-미스터 박, 몬스터 부대가 모스크바 방향으로 진격하고 있어요.
마침 제니퍼가 우랄산맥 쪽에서 몬스터 부대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당연히 그 몬스터 부대는 5사도가 이끄는 몬스터들일 터였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군.’
중국에서 양지와 음지를 가리지 않고 세력을 키우는 7사도와 달리 모습을 완전히 감춘 채 뒤에서 조용히 힘을 기르던 5사도였다.
그런 그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으니, 지금이 그를 처단해야 할 순간이었다.
유라이치 바실예프 협회장은 이를 갈았다.
“웬 애먼 놈이 나타나서 일을 망쳤어!”
타디그레이드를 잡고 영웅이 되어야 할 사람들은 러시아의 S랭크 헌터들이었다.
그런데 외국의, 심지어 헌터도 아닌 비각성자가 타디그레이드를 잡고 러시아의 영웅이 되었다.
‘빌어먹을. 대통령을 굴복시킬 수 있는 기회였는데!’
8성급 던전 브레이크는 그에게 있어 영향력을 늘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동안 끊임없이 이어진 러시아 정부와의 신경전.
이번 던전 브레이크로 그는 이 신경전을 종결할 생각이었다.
물론 신경전의 승리는 당연히 협회의 것이어야 했다.
비각성자로 이루어진 정부 인사들은 8성급 던전 브레이크를 막기 위해서라도 헌터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박한새라는 제삼자의 등장에 그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이대로 있으면 여론이 완전히 대통령 쪽으로 넘어가게 될 거야.’
그가 던전 브레이크가 벌어진 상황에서도 모스크바 근방만 지키고 나머지 지역은 버리다시피 한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국민의 피해가 커지면 커질수록 정부를 향한 비난 또한 커지기 때문이었다.
협회 역시도 비난을 피하기 어려웠으나, ‘그놈이 그놈이다.’라는 식의 여론만 만들어져도 이긴 거라는 생각으로 던전 브레이크 사태를 방관하였다.
그런데 대통령이 외국에서 불러온 박한새가 엄청난 활약을 통하여 시베리아를 구원하다시피 하고 있으니 여론이 반전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국민의 적은 협회 하나만 남게 된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비각성자들의 여론 따위 무시해버리고 싶지만, 아직은 이르지.’
협회가 이 나라의 주인으로 군림하려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였다.
헌터들의 정신 무장이 아직 완벽하게 갖춰지지 않기도 했고 말이다.
‘어쨌든 이대로 상황을 지켜볼 수만은 없다. 우리 협회에서도 이제는 무언가를 보여줘야 해.’
정부에게 다시 권력이 넘어가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
유라이치 바실예프 협회장은 위기감을 느끼며 여론을 반전시킬 새로운 전략을 구상하였다.
그런 그에게 하나의 소식이 당도하였다.
“우랄산맥에서 몬스터 부대가 넘어오고 있다고?”
“몇 성급 던전 브레이크지?”
“새로운 유형의 몬스터들이 대거 포함되어있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8성급 던전 브레이크가 아닐까 싶습니다.”
“8성급 던전 브레이크라!”
간부의 말을 듣고 유라이치 바실예프 협회장은 눈에 이채를 띠었다.
새로운 8성급 던전의 등장이라니.
마치 신이 그에게 기회를 준 것처럼 절묘한 타이밍이 아닌가.
“류베리스카야 길드 마스터를 불러오도록.”
류베리스카야 길드는 유라이치 바실예프 협회장의 동생이 길드 마스터로 있는 곳이었다.
이고르 바실예프.
무려 S랭크 헌터인 그라면 8성급 던전 브레이크를 막는 것도 불가능하지만은 않으리라.
‘안 그래도 이고르가 8성급 던전의 전리품을 욕심내고 있던데, 아주 잘되었군!’
동생인 이고르 바실예프에게 8성급 던전 브레이크를 맡긴다면 전리품도 얻고 명성도 얻고 그야말로 일석이조였다.
덤으로 대통령을 엿 먹이는 것도 가능할 것이고 말이다.
“개미 여왕의 군세가 이델 우랄을 지나고 있다고 합니다.”
“벌써? 군과 헌터들은 왜 그들을 막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8성급 몬스터에게는 군의 화력이 통하지 않습니다. 헌터들의 경우, S랭크 헌터인 발랄라이카, 이반 등이 나섰으나 전투에서 패배하고 물러났다고 합니다.”
블라디미르 대통령은 러시아 연방 안보회의 서기의 말을 듣고 얼굴을 감싸 쥐었다.
시베리아의 위기가 해결되나 싶더니 이번에는 수도를 위협하는 새로운 위기가 발생하였다.
‘외국에서 온 헌터들은 아무런 피해 없이 잘도 레이드에 성공하는데 우리 러시아 헌터들은 도대체….’
가장 크게 활약한 박한새라는 인물은 헌터도 아니었다.
비각성자가 러시아의 S랭크 헌터 여럿보다 더 뛰어난 활약을 펼쳐낸 것이다.
“심지어 이런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개미 여왕은 사람과 소통이 가능하고 그래서 항복하는 자들을 받아주고 있다는 소문 말입니다.”
“말도 안 되는! 몬스터가 사람과 소통이 가능하다니? 그게 가능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어디까지나 소문입니다. 하지만 8성급 던전은 이전까지 존재했던 던전들과 궤를 달리하는 경우가 많으니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을 거 같습니다.”
뭐가 됐건 모스크바를 비롯하여 러시아 전체가 중대한 위기에 빠졌다는 이야기였다.
대통령은 답답한 한숨을 토해내더니, 회의에 참석한 이들에게 대책을 물었다.
“아무래도 한국에 도움을 요청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또 한국이요? 아니지. 한국이 아니라, 일개 비각성자라고 해야 하나?”
“…가장 확실한 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일개 비각성자라고 하기에는, 이미 세계 제일의 강자라는 소문까지 있는 인물이니 말입니다.”
“좋습니다. 저도 그가 지금 상황에서 가장 확실한 대안인 건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가 과연 우리를 도우려 하겠습니까?”
“시베리아 건도 확실하게 도와줬는데, 모스크바도 당연히 도와주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다른 참석자들 역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된 대가를 지급하지도 않았는데 러시아에 지원을 와준 박한새였다.
아니, 러시아뿐만이 아니다.
아시아 전역을 비롯하여 유럽과 중동 일부, 미국과 남미 등에도 그의 손길이 닿은 상태였다.
세계 언론은 이미 그를 ‘인류의 구원자’라 부를 정도였다.
회의 참석자들은 박한새의 조력을 당연하게 생각하였다.
“저는 러시아 헌터들에게도 기회를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조국 헌터들에게는 충분한 기회를 줬을 텐데요?”
“아직 협회가 나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협회의 지도부가 어떤 자들인지 알면서도 그들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 말하는 겁니까?”
“대통령님! 협회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국민들은 8성급 던전의 전리품이 한국으로 넘어가는 것을 원치 않을 겁니다. 아이템 하나하나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 아시지 않습니까!”
대통령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러시아 안보를 책임지는 연방 안보회의 서기까지 협회를 두둔하는 지금의 상황이 그로선 한숨만 나왔다.
협회의 권력과 영향력이 그만큼 막강해졌다는 의미이리라.
“알겠습니다. 개미 여왕이라는 보스 몬스터는 협회에게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현명하신 결정입니다.”
우랄산맥에서 터졌다는 던전 브레이크를 막기 위해 800명의 러시아 헌터가 출동하였다.
이 800명은 C랭크 이상의 고랭크 헌터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하나같이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 이야기 들었나? 타디그레이드라고, 시베리아에 나타났다는 8성급 던전 보스를 한국 헌터가 잡았다더군.”
“헌터라고? 내가 듣기로 비각성자라던데?”
“나도 그 소문 듣긴 했어. 근데 비각성자가 8성급 던전 보스를 잡는다는 게 말이 되는 이야기야?”
“본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라잖아.”
“뭐가 됐든, 8성급 던전이라고 두려워할 이유는 없어. 비각성자도 해낸 일이니 말이야.”
선발대로 구성된 100명의 헌터들도 경계심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아직 몬스터 부대가 관측되었다는 곳까지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기도 했고, 고랭크로 이루어진 동료들이 그만큼 든든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러시아 헌터들이 수다를 떨며 도로를 걷던 중이었다.
갑자기 쿵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지반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어? 뭐야?”
“싱크홀이다!”
헌터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랭크가 낮다면 몰라도, 고랭크 헌터인 그들이 겨우 싱크홀에서 떨어진 것으로 다칠 일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착각한 것이 있었다.
득~ 득~
땅속으로 처박힌 헌터들은 의문의 소리를 들었다.
나무로 된 빨래판을 긁는 거 같은 소리였다.
처음에는 작게 들렸던 그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사방에서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그러다 이내 헌터 중 한 명이 자신의 스킬을 사용하여 시야를 밝히자 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발! 몬스터잖아!”
“앤트 자이언트야!”
“전투 준비! 지금 바로 전투를…, 커억!”
자신감 넘치던 러시아 헌터들은 정작 적과 마주하자마자 아비규환이 되었다.
개미를 수백 배로 확대한 외형을 가진 몬스터, 앤트 자이언트.
땅속에 있는 거대한 광장에 앤트 자이언트가 수백 마리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 너무 많아!”
헌터들은 다급히 본대에 지원을 요청하려 하였으나, 이미 너무 늦었다.
그들은 이미 범의 아가리 안으로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