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박한새 총장이 러시아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블라디미르 대통령은 내 손을 꼭 잡고 절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나를 구세주로 여기는 듯한 모습이었다.
“러시아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박한새 총장의 자신감에 찬 말을 들으니, 정말 든든합니다.”
그때, 러시아 안보 서기라는 자가 내게 물었다.
“그런데 박한새 총장님. 총장님이 데려온 헌터는 이백 명이 전부입니까?”
“지금 당장은 그렇습니다.”
“…이백으로 개미 여왕의 군세를 상대하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예, 가능합니다.”
물론 나 혼자서 개미 여왕의 군세를 막으라고 하면 나 역시 싸움을 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백 명의 든든한 아군이 있다면?
그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리고 이백 명이 끝이 아니지.’
유럽과 중동.
그곳에도 무공 아카데미 멤버들이 파견 나가 있었다.
두 지역은 이미 상황이 종료되어가고 있으니 곧 그들의 지원도 받을 수 있으리라.
그러니 지금 당장 내 곁에 이백 명밖에 없다고 해도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저는 정체 모를 빌런 집단이 제가 세운 학교를 습격하여 제 가족과도 같은 제자들을 위협하고 있음에도 흔들림 없이 모스크바로 향했습니다. 바로 러시아를 지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나를 믿지 못하는 듯,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을 짓는 그에게 나는 이같이 말하였다.
“러시아는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드리겠습니다. 대신! 저와 했던 약속은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내 말이 끝난 순간, 러시아 정부 관계자들의 안색이 굳어졌다.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정부 관계자인 그들은 블라디미르 대통령이 무슨 약속을 하고 나를 데려왔는지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와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할 겁니다.’
정치인들은 늘 자신이 했던 말을 번복하고는 하였다.
당연히 블라디미르 대통령도 정치인인 만큼,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 나와의 약속을 어기려 들 수 있었다.
아무리 헌터 협회와의 관계가 안 좋다고 해도 시베리아의 던전을 전부 넘기는 것은 정치적으로도 상당한 부담이 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다고 나에게까지 약속을 어기려 든다면 그는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다.
나는 ‘적’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블라디미르 대통령과의 접견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가는데 러시아 헌터 협회의 이사라는 사람이 나를 만나고 싶다고 연락하였다.
‘지금쯤, 러시아 협회는 날 견제할 생각을 하고 있을까, 회유할 생각을 하고 있을까?’
뭐가 됐건 크게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나는 러시아 헌터 협회와의 관계를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저를 만나고 싶으면 제가 묵고 있는 호텔로 오라 하세요.”
통역가에게 내 의사를 전하고는 호텔로 향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본인을 A랭크 헌터이자 협회의 이사라고 밝힌 이가 나를 찾아왔다.
내가 접견실로 가니, 협회 이사라는 자가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말하였다.
“독자적인 지휘권을 인정해줄 테니, 같이 싸우자?”
나는 이사가 꺼낸 본론을 듣고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예, 어떻습니까. 토벌대에 속하면서도 독자적인 지휘권을 갖다니. 이보다 파격적인 조건은 없을 겁니다.”
“반대라면 몰라도 그런 제안이라면 제가 들어줄 이유가 없을 거 같습니다만.”
“반대라. 외국인이면서 우리 러시아 헌터들을 지휘하겠다는 말씀입니까?”
“무언가 착각하시는 거 같은데, 저는 러시아를 구하러 온 겁니다. 그것도 러시아 대통령이 직접 부탁을 해서 말입니다.”
이사는 내 말에 할 말을 잃었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뻔뻔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대통령은 일반인입니다. 상황을 제대로 모르고 과잉반응 했을 뿐입니다. 우리 러시아 헌터들은 박한새 총장의 도움 없이도 개미 여왕의 군세를 막아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 없이 막으십시오. 저는 제 의지대로 알아서 움직일 테니.”
“아니, 박한새 총장. 제가 하려는 말이 그게 아님을 알지 않습니까?”
“확실하게 말씀드리려는 겁니다. 저는 협회가 구성하는 토벌대에 속할 생각이 없습니다. 협회에서 어떤 조건을 제시한다고 해도 말입니다.”
나는 협회에 끌려다니는 상황을 원치 않았다.
당연히 협회가 만든 토벌대에 속하는 것도 나로선 원치 않는 일이었다.
5사도와의 전쟁을 주도하는 것은 오직 나 하나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원래 내부의 적이 더 껄끄러운 법이지.’
러시아 헌터 협회는 도저히 신뢰할 수 없는 단체였다.
이미 내부적으로는 나를 대통령의 사람으로 규정짓고 있을 터.
지금이야 잘해주는 척 굴어도 막상 5사도와의 전쟁이 본격화되면 어떻게든 나를 견제하고 방해하려 들 것이다.
내가 활약하면 활약할수록 그들이 설 자리는 좁아지게 될 테니 말이다.
그러니 내부의 적이 될 게 분명한 러시아 헌터 협회와는 아예 상종도 하지 않는 게 베스트였다.
“그렇게 나오시면 협회의 협조를 얻기 힘들 겁니다.”
“누가 보면 제가 협회의 협조를 구하려고 애원이라도 한 줄 알겠습니다.”
“그러면 협회의 협조를 구하지 않고 개미 여왕을 토벌하려고 하셨습니까? 하, 개미 여왕을 우습게 봐도 너무 우습게 보신 거 같습니다.”
“이사님이야말로 저희의 실력을 무시하는 건 아닌지 의문입니다.”
“무시했다면 이런 제안을 했겠습니까? 하지만 총장님이 데려온 헌터는 겨우 이백 명입니다. 이백 명! 겨우 이백으로 개미 여왕의 군세를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을 거라 믿습니다.”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입니다.”
“하, 말이 안 통하는군요.”
이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정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생각이 바뀐다면 오늘 안에 연락을 주시길 바랍니다.”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국제 헌터 협회라면 모를까, 러시아 협회의 도움을 받을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안을 거절하였다고?”
“아예 대화가 통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도움 없이도 토벌에 성공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이사의 말에 러시아 헌터 협회의 회장, 유라이치 바실예프는 헛웃음을 흘렸다.
“놈이 그렇게 오만한 놈이었나?”
“예, 아주 오만하면서 생각도 짧은 놈이었습니다.”
“노홍만이라는 자는 정말 안 온 게 맞지?”
러시아에서도 그린스킨의 명성은 인정받고 있었다.
노홍만은 그린스킨 안에서도 강자로 불리는 자이니, 유라이치 바실예프가 그를 의식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였다.
“예, 노홍만이라는 자 대신, 여성 교수 두 명이랑 같이 왔습니다.”
“여성 교수 두 명이라. 예전에 사진 보니 둘 다 젊고 예쁘던데, 박한새 그자가 여자를 꽤 밝히는 모양이야.”
“예전에 들은 이야기로는 비각성자 제자 중에서도 그렇고 그런 관계인 여자가 한 명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여자를 밝히는 놈이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러시아까지 온 것인지, 쯧.”
유라이치 바실예프의 입장에서 박한새는 마음에 드는 인물은 아니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그가 비각성자라는 것. 비각성자 주제에 러시아 헌터들 이상으로 활약했다는 것.
그리고 블라디미르 대통령과 한편이라는 것 등.
솔직하게 말하면 마음에 들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용 가치는 있다. 몬스터를 놈보다 잘 잡는 헌터는 러시아에 없으니 말이야.’
소문의 절반만큼만 활약해줘도 그의 쓸모는 충분하다고 볼 수 있으리라.
그렇기에 유라이치 바실예프는 계속해서 회유를 시도해보았다.
‘개미 여왕 토벌전’에서 러시아 협회가 배제된다면 그의 입장에서도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그의 동생이 개미 여왕 토벌에 실패하여 그의 위상 또한 크게 흔들리는 상황이었다.
그로선 더욱더 절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박한새는 단호하게 그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마치 그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태도로 말이다.
“비각성자 놈 주제에 감히….”
유라이치 바실예프는 이를 갈았다.
출정 날이 다가왔는데도 저런 태도라면 더 볼 것도 없었다.
“박한새, 그놈이 토벌전에 참가할 헌터들을 모집하고 있다 했지?”
“예. 이백 명으로는 부족하게 느껴졌는지, 러시아 헌터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헌터들에게 공문을 돌려. 협회에서도 토벌대를 구성할 거라고. 러시아 헌터라면 반드시 이 토벌대에 참가해야 한다고 말이야!”
협회의 허락 없이 러시아 헌터들을 토벌대에 합류시키려고 하다니.
그저 같잖을 뿐이었다.
‘네놈이 혼자 서길 원한다면 강제로라도 혼자 서게 만들어 주마.’
“러시아 헌터들을 합류시키는 것은 어려울 거 같습니다.”
“협회에서 강하게 지시했다고 합니다. 한국의 토벌대에 참가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 말에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속이 옹졸하군.’
자신의 조국을 지키러 온 외인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할망정 방해를 하다니.
그런 자가 협회의 수장으로 있으니 지금의 러시아가 이 모양, 이 꼴인 듯싶었다.
“박한새 총장님.”
“무슨 일입니까, 안보 서기님.”
“지금이라도 협회에 협력하신다면 협회 역시도 박한새 총장님을 우호적으로 대할 것입니다.”
“제 생각은 이전과 변함이 없습니다.”
“정녕 한국 헌터만으로 토벌대를 구성하시려는 겁니까? 이백 명밖에 안 되는 헌터들로?”
내가 어깨를 으쓱하자, 그가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박한새 총장님은 러시아를 구원하러 오신 거 아닙니까?”
“러시아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면, 제가 왜 모스크바까지 왔겠습니까?”
“근데 러시아를 구하러 오셨다면서 왜 협회와 알력 다툼을 하는 겁니까?”
“안보 서기님은 마치 헌터 협회와의 알력 다툼이 저의 잘못이라는 식으로 말씀하시는군요.”
“지휘권 같은 사소한 문제로 알력 다툼을 하시는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지휘권이 사소한 문제라.
나는 픽 웃었다.
그게 사소한 문제라면 헌터 협회는 왜 이렇게까지 내 위에 서려고 안달을 낸단 말인가.
“개미 여왕의 부대는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한국의 헌터들이 정예라지만 이백 명만으로는…….”
“이백 명이 아닙니다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아, 러시아 헌터 백 명 정도가 협회의 지시를 무시했다고 하는데, 그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우리 토벌대에 참가했다고 해서 지시를 무시했다고 표현하다니.
이 사람은 헌터 협회가 헌터들 위에서 군림하는 단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니요. 한국에서 온 헌터가 이백 명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였다.
권혁진이 조심스럽게 내 옆에 나타나 보고하였다.
“유럽과 중동에서 활동하던 교수와 학생들이 방금 막 공항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러시아 헌터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나는 애초에 러시아 헌터들을 모집하기 위해 시간을 지체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기다린 것은 러시아 헌터들이 아닌, 세계 곳곳에서 활약하는 나의 제자들이었다.
그리고 마침 권혁진이 내게 말했다.
무려 팔백 명이나 되는 제자들이 러시아에 도착하였다고 말이다.
‘무공을 익힌 헌터 천 명이라. 지금 시점에 이보다 든든한 아군은 없을 거 같군.’
기존의 이백 명까지 포함하면 내가 가진 전력은 모두 천 명.
이 정도 전력이면 러시아 헌터 전체를 모으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지 않을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