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한국 헌터가 팔백 명이나 새로 합류하였다고?”
“전부 무공 아카데미 소속의 헌터들이라고 합니다.”
유라이치 바실예프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왜 그렇게 자신감이 넘치나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들의 실력은 어느 수준이지?”
“박한새가 러시아에 처음 데려온 헌터들의 수준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전부 B랭크 이상이라는 건가.”
8성급 던전 브레이크 사태로 인해 무공을 배운 헌터가 얼마나 강한지 전 세계가 알게 되었다.
설령 E랭크, F랭크 수준의 하위 헌터라고 할지라도 무공만 익히면 웬만한 B랭크 헌터보다 강하였다.
박한새가 동원한 헌터 부대는 사실상 고랭크 헌터로 이루어졌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뜻이었다.
‘심지어 교수진은 전부 S랭크급이라지?’
말이 S랭크지, 아마 S랭크 헌터들도 무공 아카데미 교수를 상대할 수 있는 강자는 몇 명 없을 것이다.
그만큼 무공 아카데미의 교수들이 보여준 활약은 놀랍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네놈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곳이 러시아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홈경기가 유리한 것은 비단 스포츠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몬스터를 토벌하는 것.
이 역시 홈 팀이 월등하게 유리하였다.
“우리는 러시아의 자존심이다!”
다시금 토벌대의 수장이 된 이고르 바실예프.
그는 러시아 헌터들을 향해 외쳤다.
우리가 곧 러시아의 자존심이라고.
동양인에게 밀리는 것은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몬스터라는 인류의 적을 눈앞에 두고 같은 편을 견제하는 셈이었다.
“우아아아아!”
“그럼! 러시아인이 비각성자 따위에게 질 수 없지!”
“개미 몬스터를 단숨에 박살 내보자고!”
“러시아는 우리 러시아인이 지킨다!”
하지만 이런 이고르 바실예프의 연설은 잘 먹혀들었다.
러시아 헌터들은 사기가 고조된 채로 당당하게 개미 여왕의 군세가 있는 곳으로 진군하였다.
‘저번에는 운이 안 좋아서 패배하였지만, 이번은 다르다!’
몬스터가 파 놓은 함정에 당해 패배를 경험해놓고 그는 단순히 운이 나빠서 패배한 것으로 치부하였다.
형이라는 뒷배 덕에 토벌대장이 될 수 있었던 그다.
패배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형을 뒷배로 이용하지도 않으리라.
주현근, 고정희, 이정.
이렇게 세 명의 교수가 새로 합류하였다.
“다른 곳은 괜찮은데, 아프리카의 상황이 심상치 않아 보입니다.”
가장 먼저 주현근이 아프리카의 상황을 전해주었다.
대만에 이어 중동의 여러 국가를 도우러 갔던 그였다.
중동의 지리적 위치가 위치인 만큼 아프리카의 상황을 다른 두 사람보다 잘 알 수밖에 없었다.
“아프리카라. 8성급 던전 브레이크가 터졌으니, 아프리카의 상황이 시급하긴 하겠군요.”
원래도 북아프리카, 남아프리카를 제외하면 아프리카 대륙 전체가 무정부 상태나 다름이 없었다.
몇몇 지역은 몬스터밖에 살지 않아서 마수의 대륙이라고도 부를 정도.
“예. 벌써 발견된 8성급 던전 보스만 다섯 종류가 넘는다고 합니다.”
“발견된 게 그 정도면 아무리 못해도 열 마리 이상 있다고 봐야겠군요. 북아프리카건, 남아프리카건 상당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겠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북아프리카 국가들은 국제 헌터 협회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미 국가 전체가 여명회에게 넘어간 모양이군.’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여명회의 세력은 지구 곳곳에 뻗어있었지만, 현재 시점 기준으로는 유독 아프리카에 세력이 몰려 있었다.
실질적으로 아프리카 전역을 지배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남미는 나름대로 안정을 찾은 상태다. 남미의 헌터들이 적극적으로 던전 브레이크를 진압하더군.”
주현근에 이어 이정이 보고를 하였는데, 그는 페루에 갔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페루를 비롯한 남미는 아프리카처럼 무정부 상태에 빠지지는 않았다.
이정을 비롯한 무공 아카데미 학생들이 제때 도우러 가주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무정부 대신 헌터 정권이 수립되고 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만 말이다.
“유럽도 크게 위기에 빠진 곳은 없었어요.”
“스페인의 사정이 조금 안 좋다고 들었는데 별일 없었나 보군요.”
“네. 저희가 스페인을 도우러 가려고 했는데, 독일의 카이저라는 자가 먼저 가서 스페인을 구했어요.”
“카이저라.”
고정희의 말에 나는 턱 끝을 쓰다듬었다.
오랜만에 들어본 이름이었다.
‘역시 8성급이 열리고 나니 내가 알던 인물들이 나타나는구나.’
8성급이 열린 것은 단순히 새로운 던전이 열린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사실상 신이나 다를 게 없는 성좌라는 존재들.
그 성좌라는 존재들의 힘이 더 강해진다는 사실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성좌들의 힘이 강해진다면 자연스럽게 그들의 권속의 힘도 강해질 것이다.
카이저처럼 이전까지는 무명인사였던 이가 갑자기 활약하여 나타나게 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이성은도 곧 나타나겠지?’
무명인사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가진 실력에 비하면 인지도가 떨어지는 게 이성은이었다.
그런 이성은도 이제는 제약이 많이 풀렸을 테니, 곧 세상에 이름을 떨치지 않을까 싶었다.
“총장님!”
“러시아 정부에서 러시아 토벌대의 소식을 전하였는데, 지금 그들이 위기에 빠졌다고 합니다.”
“몇 km 간격을 두고 저희를 따라오는 거 아니었습니까? 근데 갑자기 왜 위기에 빠졌다는 겁니까?”
“몬스터 무리를 발견하여 추격하던 도중, 함정에 빠져서 사방으로 포위되었다고 합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또 함정에 걸렸단 말입니까?”
내게 소식을 전해준 국제 헌터 협회의 간부도 내 심정에 동감했는지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국제 헌터 협회 간부에게 러시아 토벌대의 상황을 더욱더 자세하게 물어보았다.
“한마디로 말하면, 개미 여왕의 군세 중, 절반 이상이 그곳으로 갔다는 말이군요.”
“예. 굳이 함정이 아니더라도, 러시아 헌터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겁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국제 헌터 협회의 간부가 조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총장님. 서둘러 지원을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처음 계획했던 대로 움직입니다.”
간부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교수들의 표정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개미 여왕만 노리자는 거죠?”
“의외네요.”
유지은이 신기하다는 눈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는 당연히 한새 씨가 러시아 헌터들을 구출하자고 할 줄 알았어요.”
“전 그렇게 우유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한새 씨가 우유부단하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단지, 인명을 최우선시하는 한새 씨의 인품을 생각해서 한 생각이었어요.”
그녀의 말을 듣고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난 그렇게까지 성인군자가 아닌데 말이야.’
내가 성인군자였으면 적이라는 이유로 단칼에 목을 베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사람을 구하는 일에 ‘손익’을 따지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러시아를 구한 것은 어디까지나 수억의 러시아 인구를 여명회와의 전쟁에서 활용하기 위함이다.’
이른바 효율성의 문제였다.
혼자보단 둘이, 둘보다는 셋이 나은 법.
무공을 독점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러시아 헌터들이 ‘자처’해서 미끼가 될 동안 박한새가 이끄는 천 명의 헌터들은 개미 여왕 군대의 ‘본진’에 해당하는 장소로 빠르게 진격하였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개미 여왕 군대의 본진에는 개미 여왕 본인과 개미 여왕을 조종하는 5사도가 있었다.
“설마 놈이 러시아 헌터들을 버리고 막무가내로 진격할 줄은 몰랐습니다.”
5사도의 책사이자, 여명회에서 인티머트 세크러터리란 계급을 가진 안드레이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그러자 5사도가 동감한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놈 상대로는 뭐 하나 계획대로 되는 게 없는 거 같군.”
안드레이는 박한새가 러시아 헌터들을 돕기 위해 병력을 분산할 것을 가정하고 계획을 세웠었다.
인류를 구하겠다는 목적으로 선진국, 후진국 가릴 것 없이 위급한 곳이면 전부 도움을 주고 있는 박한새였다.
그 정도로 인류애로 가득 찬 인물이라면 당연히 동료도 버리지 않을 터.
그렇기에 5사도는 러시아 헌터들을 함정으로 잡는다면 덤으로 박한새까지 잡을 수 있으리라 판단하였다.
하지만 박한새는 이번에도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러시아 헌터들을 과감하게 버리고 그를 잡기 위해 맹목적으로 달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박한새가 이렇게 움직이자 오히려 병력만 분산된 결과가 되었다.
물론 헌터 진영도 두 개로 나뉘었지만, 어차피 헌터 진영의 주 전력은 박한새가 이끄는 헌터 부대였다.
5사도로선 가장 경계하던 박한새를 분산된 병력으로 맞이해야 했으니, 극심한 손해가 아닐 수 없었다.
“손해는 크지만, 이로써 확실해졌다. 위대한 파롤 신을 위해서라도, 놈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사실이.”
박한새와의 정면 승부.
이왕이면 피하고 싶은 승부였다.
하지만 거듭 변수를 만드는 박한새의 모습을 보니 그가 숙명의 적임을 확신하였다.
박한새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의 앞길을 가로막을 터.
차라리 지금이 박한새를 처단할 기회로 봐야 했다.
쿵. 쿵. 쿵.
박한새가 발걸음을 멈추자 그의 뒤를 따르던 헌터들도 발걸음을 멈추었다.
하지만 그들이 발걸음을 멈추었는데도 땅은 계속해서 울렸다.
C랭크 헌터이자, 무공 아카데미의 학생인 윤태성은 정면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존나게 많은데?’
헌터로 각성한 지도 벌써 5년 차였다.
그런데도 이렇게 많은 수의 몬스터는 처음 봤다.
오천에 가까운 엄청난 수의 몬스터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던 것이다.
심지어 5성급 이하의 몬스터는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저 엄청난 규모의 몬스터가 대부분 6성급 이상의 몬스터라는 뜻이었다.
‘이길 수 있을까?’
지금껏 두 번의 8성급 던전 브레이크를 경험했지만, 이런 기분을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개미 여왕의 군세가 가져다주는 위압감은 엄청났다.
‘아니, 이기는 것은 문제없겠지.’
S랭크 헌터들보다 든든한 교수들이 수십 명이었다.
조교의 수도 백 명이나 됐고.
물론 구백 명의 일반 학생들도 든든하기 그지없었다.
하나같이 무공을 익힌 실력자들이었으니까.
이 정도 전력이라면 8성급이 아니라, 그보다 더 높은 등급의 던전 브레이크도 막아낼 수 있을 거 같았다.
다만, 그의 걱정은 한 가지였다.
과연 자신은 아무런 부상 없이 전투를 끝마칠 수 있을 것인가.
전투에서 이긴다고 해도 그가 죽거나 다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허공답보다!”
“도대체 내공이 얼마나 많으면 저런 게 가능한 거야?”
갑자기 한쪽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윤태성이 고개를 돌리자, 한 사내가 뒷짐을 진 채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사내는 윤태성에게 무척이나 익숙한 인물이었다.
아마 윤태성뿐만이 아니라, 이곳의 모든 이에게 익숙한 인물일 것이리라.
‘저런 모습을 보게 될 때면, 총장님이 비각성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린단 말이지.’
하늘로 날아오른 사람의 이름은 박한새.
바로 그들을 지휘하는 총지휘관이자, 무공을 배운 모든 이들의 ‘스승’이었다.
‘왠지, 다치지 않고 이길 수 있을 거 같은데?’
그저 하늘로 날아오른 것밖에 한 행동이 없었다.
그런데도 윤태성은 이상하게 사기가 오르는 것을 느꼈다.
박한새와 함께 싸운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절대적인 자신감이 생겨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