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축하드립니다!”
“도움을 드릴까 했는데, 의미가 없을 거 같아서 지켜만 봤어요. 근데 역시 한새 씨 혼자서도 충분했네요.”
개미 여왕을 쓰러뜨리자 교수들이 내게 다가와 축하 인사를 건넸다.
주변을 둘러보니 전투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몬스터는 아직 많이 남아있었지만, 학생들 선에서 정리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교수들 역시 위험도가 낮아서인지 학생들의 전투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일종의 실전 훈련처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 정도 숫자의 몬스터를 앞에 두고 이런 여유라니. 내 제자들도 참 많이 발전했군.’
아마 다른 나라의 헌터들이 이 광경을 보면 까무러치게 놀라지 않을까 싶었다.
웬만한 나라들은 8성급 던전 브레이크가 터지면 나라 전체가 패닉 상태에 빠지는데 정작 우리는 8성급 던전 브레이크를 직접 진압하면서도 여유를 부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내가 척결 대상 1순위로 삼은 게 5사도였다.
그리고 2순위가 개미 여왕이었는데, 아직 3순위가 살아있었다.
참고로 3순위는 ‘나이트’란 계급을 가진 여명회의 간부들이었다.
“여러분, 저기 도망치는 사람들이 보입니까?”
“사람들이요? 아, 개미 여왕에게 조종받는 사람들이 있다더니, 저들이 바로 그들인가 봅니다.”
“그 반대입니다.”
“개미 여왕이 사람들을 조종했던 게 아닙니다. 반대로 사람이 개미 여왕을 조종했던 거지.”
“그리고 저기 도망치는 자들이 바로 개미 여왕을 비롯한 몬스터를 조종하는 빌런들입니다.”
교수들에게도 처음으로 밝힌 이야기였다.
몬스터를 조종하는 빌런들의 단체.
즉, 여명회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이제 밝힐 때가 되었지.’
5사도는 시작에 불과하였다.
여명회는 8성급 던전이 열린 시점에서 공개적인 행보를 펼치기 시작할 터.
나 역시 그들을 공개적으로 ‘인류의 적’으로 천명하며 철저하게 견제할 것이다.
그러니 교수들에게도 여명회의 존재를 알려야만 했다.
“몬스터를 조종하는 빌런이라. 골치 아픈 유형의 빌런이겠군요.”
“그러니 지금 바로 추격해야 합니다.”
“근데, 몬스터들이 서로 공격하며 자중지란을 일으키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추격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5사도가 죽으면서 일부 몬스터들의 통제가 풀렸다.
통제에서 풀려난 몬스터들은 서로를 공격하였는데 그 결과 몬스터 군대는 자멸의 길을 걷고 있었다.
“한 명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인류의 적, 몬스터보다 더 위협적인 존재들입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강하게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고 말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정조차 더는 의문을 표출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추격전에 나설 뿐이었다.
“우리와 언제 원한 관계를 맺었다고 저리 쫓아오는 거야!”
나이트 중 한 명이 비명을 질렀다.
그의 뒤에서는 무언가가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무공 아카데미의 교수라는 여인이었다.
“이대로는 위험합니다!”
“누가 위험한 거 모르오?”
“알면서 왜 속도를 높이지 않는 겁니까! 오우거들을 버리고 가면 속도가 더 올라갈 텐데!”
“내 군단을 내가 어찌 버린단 말인가!”
“이런 멍청한!”
나이트들에게 있어 몬스터들은 자신이 보유한 돈보다 더 소중한 자원이었다.
널리고 널린 게 몬스터라지만, 그 몬스터를 훈련시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도망치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몬스터를 지키려는 이들이 있었다.
그때 5사도의 책사였던 안드레이가 방법을 제시하였다.
“이렇게 도망만 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정면 대결을 하는 것도 의미가 없겠지요. 단, 각개격파를 시도한다면 가능성이 없지는 않습니다.”
강자에게는 숫자로 대항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상대의 숫자도 만만치 않은 게 문제였는데, 이럴 때는 상대를 강제로 분산시켜야 했다.
‘마침 러시아 헌터 놈들을 상대하던 부대가 돌아오고 있다. 그들과 힘을 합쳐 교수란 자들을 하나하나 포위해서 섬멸하면 이길 수 있다.’
5사도가 이끄는 군세는 두 개의 부대로 나누어져 있었다.
편의상 1군과 2군이라 불렀는데, 1군은 현재 박한새와의 전투에서 궤멸적인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남은 병력도 무공 아카데미 학생들의 훈련 상대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다행히 2군의 상태는 멀쩡하였다.
러시아 헌터들이 제대로 저항도 못 한 채 패퇴하였기 때문이었다.
‘저자들은 아직 2군의 상황을 모를 터. 지금이 각개격파할 절호의 기회다.’
살아남은 1군 병력들은 사방으로 쪼개졌다.
그러자 무공 아카데미 교수들 역시 사방으로 나누어진 채로 추격에 나섰다.
“공격!”
2군의 병력이 어느 정도 다가오자, 안드레이는 자신의 군대에 공격 명령을 내렸다.
지금까지 계속 도주하다가 갑자기 반격 명령을 내린 것이다.
“흥! 너희들도 내가 여자라고 우습게 보나 보지?”
안드레이를 추격하던 사람은 김민경이었다.
그녀는 열심히 도망치던 몬스터 무리와 빌런들이 도망치는 것을 포기하고 싸움을 걸어오자 불쾌한 감정을 느꼈다.
더 도망치지 않는 것이, 자신을 무시하는 행동으로 보였다.
‘다 죽여주마!’
하지만 그녀는 이내 낭패 어린 표정을 지었다.
‘저 몬스터들은 또 어디서 온 몬스터들이야?’
갑자기 몬스터들이 불어났다.
그냥 한두 마리 정도가 늘어난 게 아니었다.
수백, 아니 천 마리 정도 되는 몬스터가 그녀를 향해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교수 하나를 상대하는 것도 이렇게 힘에 부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게 말이오. 앞으로 교수 한 명을 잡을 때면 최소 수백 마리의 피해는 가정하고 싸워야 할 거 같소.”
나이트들은 이미 다 잡은 물고기를 바라보듯, 김민경이 싸우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김민경이 잘 싸우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S랭크 헌터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범위용 스킬을 사용하지 않는 한, 대규모 몬스터 무리를 상대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미 격전을 치르고 온 상태라면 더 말할 것도 없으리라.
‘다만 체력도 무시 못 할 수준이라는 게 문제로군.’
안드레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찌 된 게 김민경은 지치는 모습을 보이질 않았다.
교수들 중에서 크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인데도 이 정도라니.
무공 아카데미가 괜히 더 두렵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잡기만 하면 이득이다.’
안드레이가 그런 생각을 할 때, 나이트 중 한 명이 이렇게 말했다.
“죽이지 않고 살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살리자고? 왜 그런 제안을 하는 것이오?”
“무공이란 것을 잘 분석하면 우리도 배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년에게서 무공을 배우자는 말이오? 호오.”
“확실히, 비각성자도 배울 수 있는 게 무공이니 우리라고 배우지 못할 이유는 없겠습니다.”
나이트들 역시 안드레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몬스터에만 올인했던 5사도와 달리, 무공이란 것에 흥미를 보이는 것이었다.
갑자기 폭음이 들리더니 수십 마리의 몬스터가 한 번에 죽었다.
“뭐, 뭐야? 저놈이 왜 여기에 있어!”
모두가 당황하였다.
이곳에 있으면 안 될 사람이 그들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명회 간부들의 놀란 표정을 보며 피식 웃었다.
‘내가 교수들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겠지?’
물론 모든 교수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직 교수.
교수들의 상황만 실시간으로 보는 게 가능하였다.
그 덕에 통신망이 끊긴 상태에서도 나는 교수들의 상황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뭐 내가 없어도 김민경 교수라면 능히 위기를 헤쳐 나왔을 테지만.’
적들은 너무나 안일하였다.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 우리의 실력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듯싶었다.
그러니 김민경을 상대로 겨우 천 마리의 몬스터밖에 안 데려온 것이겠지.
심지어 7성급 이하의 몬스터들로 말이다.
“사부님! 제가 몬스터를 맡을 테니, 사부님이 빌런들을 처리해주세요!”
김민경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나는 여명회 간부들부터 노릴 생각이었다.
“비, 빌어먹을!”
“싸워야 합니다! 더 물러설 곳도 없습니다!”
“시발! 내가 몸빵 할 테니까, 최대한 빨리 놈을 죽이시오!”
역시 쉽게 죽어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나이트들은 하나둘 변신하기 시작하였다.
누구는 가고일의 몸을 빌렸는지 석상처럼 되었고 누구는 늑대인간이라도 되는 듯, 늑대와 인간이 하나 된 것처럼 변신하였다.
물론 다리는 라미아, 팔은 오우거 등등.
여러 몬스터의 힘을 빌린 경우도 적지 않았다.
‘만약 저들이 7성급이 아닌, 8성급 몬스터의 힘을 빌렸다면 위험했겠지.’
7성급 몬스터의 몸을 빌렸다고 전투력까지 7성급 수준에서 그치는 게 아니었다.
시너지 효과라는 것은 실로 무시무시하였고 만약 7성급 몬스터의 몸을 빌렸다면 실질적인 전투력은 8성급 몬스터와 호각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저들이 8성급 몬스터의 몸을 빌렸을 경우, 9성급 몬스터 수준의 전투력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의미하였다.
8성급과 9성급의 차이는 겨우 한 등급 차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천양지차였다.
저들이 8성급 몬스터의 몸을 빌렸다면 나 역시 방심할 수 없었으리라.
하지만 뭐가 됐건 지금 저들의 무력은 8성급 몬스터 수준이었다.
이미 개미 여왕의 군세를 상대하며 수백 마리의 앤트 자이언트를 쓰러뜨린 나에게 십수 명의 나이트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나이트들을 모조리 죽였으니, 제2의 5사도가 나올 일은 없겠어.’
전투가 끝나자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마침내 5사도가 이끌던 여명회의 러시아 지부를 궤멸시킨 순간이었다.
크렘린궁은 환호로 가득하였다.
“개미 여왕을 죽이고 개미 여왕의 군세까지 완전히 몰살시켰다고 합니다!”
“우와아아! 러시아 만세!”
“우라! 우라!”
수도까지 포기할 준비를 하던 그들이었다.
그만큼 개미 여왕의 군세는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결국 러시아는 이겨냈다.
모스크바로 거침없이 진격하던 개미 여왕의 진군을 멈추었을뿐더러,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아예 개미 여왕의 목숨 줄을 끊어낸 것이다.
“다 좋은데 하필 개미 여왕을 쓰러뜨린 게 러시아인이 아닌, 한국인이라는 게 문제군요.”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크렘린궁 관계자들은 개미 여왕을 죽인 게 박한새라는 사실에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박한새가 러시아의 구원자라지만, 그는 러시아인이 아니었다.
러시아의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박한새 총장은 이제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러시아의 영웅이 되겠구나.’
박한새가 러시아의 영웅이 되는 것.
예전이었으면 오히려 좋아할 일이었다.
박한새를 불러온 것은 그였고 그가 활약할수록 블라디미르 대통령의 인기도 올라갔으니까.
하지만 박한새의 명성이 어느덧 블라디미르의 명성을 넘어섰다는 게 문제였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박한새 총장이 대선에 나간다면 내가 질 수도 있겠어.’
지는 정도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압도적인 패배를 경험할 것이다.
박한새가 러시아로 귀화하기만 한다면 러시아 대통령직이 아니라, 종신 황제까지 시킬 정도로 박한새는 현재 러시아인들로부터 열광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대통령님. 시베리아 던전을 그에게 넘기실 겁니까?”
그러던 중, 연방 안보 서기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미 약조한 일이오.”
“국민들이 용납하겠습니까? 외국인에게 던전의 소유권을 넘기는 것을?”
“그를 단순한 외국인으로 보십니까?”
잠시 침묵하던 연방 안보 서기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차라리 협회와 협상하여 그들이 관리하도록 하시지요. 협회가 어떤 조건이든 정부의 말이면 무조건 따르겠다고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