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대신 회귀함-168화 (168/275)

#168화

시종일관 정부의 일을 방해하던 협회였다.

그런 협회가 저자세를 취하며 정부의 조건을 무조건 따른다고 하니 블라디미르 대통령도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시베리아의 던전 소유권을 박한새 총장에게 주려는 이유가 협회를 견제하기 위함인데, 협회가 전향적으로 나온다면 그럴 필요가 있을까?’

8성급 던전 브레이크 사태가 시작되면서 헌터의 권력이 더 강해진 다른 나라와 달리, 러시아는 헌터의 권력이 오히려 축소되었다.

던전 브레이크 진압에서 러시아 헌터들은 아무런 활약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블라디미르 대통령은 협회의 존재가 이전만큼 거슬리게 느껴지지 않았다.

“안보 서기의 말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박한새 총장에게 시베리아의 던전들을 넘길 필요가 있습니까? 이미 위기도 거의 다 해결이 되었는데?”

평소 안보 서기와 갈등을 빚던 비서실장까지 안보 서기의 의견에 동조하였다.

“무엇보다 자존심 강한 우리 국민들은 외국인에게 던전의 소유권을 넘기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박한새 총장은 우리 국민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다.”

“인기는 잠시뿐입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그를 국민들이 계속 좋아해 주겠습니까?”

러시아인들 사이에서는 반쯤 농담으로 박한새가 대선에 나오면 바로 당선될 거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그만큼 박한새의 인기가 상당하다는 뜻인데, 비서실장은 단호하게 말하였다.

박한새의 인기는 얼마 가지 못할 거라고.

만약 그의 존재로 인해 러시아가 피해를 보게 된다면 러시아인들은 러시아의 구원자인 박한새를 외면하게 될 거라고 말이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야.’

사람의 마음은 항상 변하는 법이었다.

지금이야 러시아인들이 박한새를 좋아해도 그 마음이 언제까지 갈지는 아무도 몰랐다.

“제가 생각하기에, 박한새 총장은 국제 여론을 굉장히 신경 쓰는 사람입니다. 던전의 소유권을 갖는 게 국제 여론을 악화하게 만든다면 그도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국제 여론을?”

“예. 타국의 위기를 기회로 삼아 그 나라의 이권을 강탈한다는 식으로 여론을 형성한다면 박한새 총장도 방법이 없지 않겠습니까?”

실로 교활한 술책이었다.

하지만 비서실장은 자신이 제시한 의견이 교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정치인이라면 국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려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이 시대, 던전은 자원의 보고로 인정받고 있었다.

결코 외국인에게 넘겨서는 안 될 이권이라는 뜻이었다.

“마침 박한새 총장은 우랄산맥 근처에 있지 않습니까? 지금 여론을 움직인다면 그는 저항할 수 없을 겁니다.”

“흠. 구국 영웅과의 약속을 어기는 게 과연 옳은 행동일지 의문이군.”

“보상은 금전적으로 충분할 만큼 해주면 됩니다. 그리고 박한새 총장은 이미 상당한 양의 전리품도 얻었지 않습니까?”

블라디미르 대통령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였다.

실로 매력적인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그로선 그야말로 단 하나만 잃고 모든 것을 얻게 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물론 잃게 되는 그 하나가 박한새와의 관계라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금전적인 보상을 충분히 해준다면 박한새 총장과의 관계도 나빠질 일은 없지 않을까?’

돈을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제아무리 박한새가 거부라고 해도 수십억 달러를 준다면 그도 기뻐할 수밖에 없으리라.

“일단 협회장과 만나서 대화라도 나눠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바실예프 협회장이 안보 서기의 말처럼 전향적으로 나올지를 직접 확인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블라디미르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협회장과는 한번 만나보는 게 좋을 거 같았다.

유라이치 바실예프 협회장과의 대화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러시아 헌터들은 타국 헌터들에 비교하면 상당한 특혜를 받고 있었다.

세금도 적게 냈고 던전 브레이크 사태 때도 의무적으로 출동하는 것이 아닌, 헌터 개개인이 자율적으로 움직였다.

심지어 강력범죄를 일으키면 가중 처벌을 받는 한국의 경우와 달리, 러시아의 경우 헌터라는 이유로 사법 특권을 받았다.

설령 살인을 저질러도 2년 이상의 처벌을 받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런데 협회장은 블라디미르 대통령과의 협상에서 이런 헌터들의 특권 상당수를 양보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시베리아의 던전 소유권을 잃고 난 이후의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면 더 고민할 필요가 없겠어.’

블라디미르 대통령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시베리아 던전 소유권을 넘겨주겠다는 박한새와의 약조를 파기하기로 말이다.

‘애초에 그 많은 던전을 넘겨주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지. 욕심이 과해도 너무 과해.’

그는 되려 박한새를 욕하였다.

박한새의 도움이 없었으면 러시아가 지도상에서 사라졌을 거라는 사실은 완전히 잊은 듯한 태도였다.

물론 그렇다고 박한새가 구국 영웅이란 사실을 아예 잊어먹은 것은 아니었다.

‘모스크바를 구해준 은혜는 금전적인 보상으로 갚으면 되겠지.’

돈이면 안 될 게 뭐가 있겠는가.

그리고 박한새가 세운 공이라면 아무리 큰돈을 줘도 국민들에게 비판을 받을 일도 없을 것이다.

“저와의 약속을 어기실 생각을 하시다니. 저를 너무 우습게 보신 듯합니다.”

뒤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중저음의 목소리를 듣고 블라디미르 대통령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설마 그자가 이곳에 있을 리가.’라며 애써 부정하며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사람을 보고 비명을 지르는 것은 실례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블라디미르 대통령은 이 순간, 자신이 실례를 저질렀다는 사실도 자각하지 못하였다.

그도 그럴 게, 그의 눈앞에 있으면 안 될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 분명 총장은 스베르들롭스크주에 있다고 들었는데?”

“저에게 해야 할 말은 그게 아닐 텐데요.”

“무,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박한새가 갑자기 검을 뽑자, 블라디미르 대통령은 기겁하며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강대국의 수장으로서 늘 자신감 넘치던 모습을 보인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가 어떤 나라의 대통령이건, 지금은 그저 일개 비각성자일 뿐이었다.

물론 상대도 그와 같은 비각성자였지만 말이다.

‘왜 아무도 안 오는 거야!’

대통령인 그에게 경호원이 없을 리는 없었다.

그는 러시아의 수장답게 고랭크 헌터를 경호원으로 두고 있었는데, 평소엔 그리도 으스대던 경호원들이 막상 상황이 터지자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말로 합시다. 말로.”

“저에게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무,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 천천히 말씀해보세요.”

박한새가 이런 식으로 무례하게 행동하는 이유야 뻔하였다.

그가 약조를 파기하려는 것을 눈치챘기에 저러는 것일 터.

하지만 블라디미르 대통령은 박한새의 심리를 눈치챘으면서도 애써 모른 척하였다.

자신이 ‘몰래’ 하려던 행동을 박한새가 알아차렸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협회장과 만나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까지 제 입으로 이야기해야 합니까?”

블라디미르 대통령은 입을 꽉 다물었다.

러시아인도 아닌 박한새가 어찌 이런 정보를 알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애초에 스베르들롭스크주에서 모스크바는 언제 또 온 거야!’

분명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가 여전히 스베르들롭스크주에 있다는 보고를 받았었다.

비행기를 타고 와도 도착하기까지 아직 한참 남아있을 거리였다.

그런데 박한새는 아무도 모르게 그의 앞에 나타났다.

‘지금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박한새의 눈빛이 점점 차가워졌다.

이상하게 피부가 따끔거리는 기분이었다.

“그, 제가 약속을 어기려고 했던 건 아닙니다.”

“변명은 듣지 않겠습니다. 저는 약속을 지켰으니, 대통령께서도 약속을 지키십시오. 내일 바로 공식 성명을 발표하길 바랍니다.”

“당장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정부의 것으로 되어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민간에서 소유한 것도 있고 하니….”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시베리아 던전의 절반은 민간 소유였다.

나머지 절반 역시도 겉으로는 정부 소속이어도 실질적으로 민간 길드들이 사용하는 던전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박한새가 엄청난 공을 세웠다고 해도 민간 소유의 것은 넘겨줄 수 없었다.

“저는 말했습니다. 내일 바로 공식 성명을 발표하라고.”

단호하기 그지없는 박한새의 모습에 블라디미르 대통령은 침을 꿀꺽 삼켰다.

실로 두렵기 그지없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애써 용기를 냈다.

대통령이 일개 개인의 협박에 굴복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국민들을 이해시킬 시간이 필요합니다. 박한새 총장도 우리 국민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는데, 괜히 일을 서둘러서 국민들에게 미움을 받고 싶지는 않을 거 아닙니까?”

사실 그가 용기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였다.

박한새가 선을 넘지 않을 거라는 확신.

무려 ‘러시아의 구원자’라 불리는 그가 자신에게 검을 휘두르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그에겐 있었던 것이다.

“저에 대해 무언가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거 같습니다.”

“전 명예나 인기 같은 거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아닙니다.”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괜한 수작 부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인기 따위는 안중에도 없으니, 약조를 지키십시오.”

“제가 약속을 안 지키는 당신을 가만히 내버려 둘 것으로 생각합니까?”

‘대통령’이 아닌, ‘당신’이라고 호칭하는 박한새를 보며 블라디미르 대통령은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분명히 말하지만, 저는 적으로 판명된 자에게 관용을 보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저를 죽이면 당신은 세계의 영웅에서 재앙급 빌런으로 격하될 겁니다.”

“겨우 당신 하나 잡았다고 세계가 저를 적대할 거 같습니까? 당신은 일개 정치인일 뿐인데?”

블라디미르 대통령은 순간 욱하는 기분을 느꼈다.

그 누가 러시아 대통령을 일개 정치인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하지만 블라디미르 대통령은 자신의 분노를 감히 표출할 수 없었다.

박한새의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그는 세계 제일의 무력을 가진 인물이라 평가받고 있었다.

그를 스승으로 모시는 무공 아카데미의 교수들 역시도 하나같이 세계 정상급 강자로 인정받았고 말이다.

이런 박한새의 가치는 러시아의 대통령이 아니라, 미국의 대통령과 비교해도 절대 꿀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당신을 죽인 범인이 저라는 사실을 누가 알겠습니까?”

그 말에 블라디미르 대통령은 온몸에서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두려운 인물이 아닐 수 없었다.

세계에서 다섯 순위 안에 드는 강대국의 대통령을 아무런 증거도 남기지 않고서 암살할 수 있다니.

심지어 그의 정보력은 또 어떤가.

러시아에서 극히 일부만 알고 있는 정보를 박한새가 알아차린 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어쩌면 그는 지금껏 모두에게 진실을 숨겨온 사람일지도 모른다.’

인류애가 넘치는 사람이란 사실도 거짓일 것이다.

비각성자라는 사실도 거짓일지 몰랐다.

아니, 분명 거짓일 것이다.

애초에 헌터가 아니고서는 이 시간에 그가 이곳에 있을 수는 없었을 테니까.

“초, 총장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블라디미르 대통령은 결국 박한새의 협박에 굴복하였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하니 당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가 굴복을 선택하자, 따끔거리던 피부가 멀쩡해졌다.

살기라는 것이 실존한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된 블라디미르 대통령이었다.

“근데 나는 약속을 지키려고 할 테지만, 협회의 반발은 나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건 제가 알아서 대처할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겠습니다.”

블라디미르 대통령과의 대화를 마친 나는 새까만 밤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모스크바로 올 때는 와그너의 신발로 한 번에 왔지만, 돌아갈 때는 직접 날아서 가야 했다.

‘다행히 별일은 없었나 보군.’

나이트를 처단한 것에 대한 ‘퀘스트 보상’도 계속 들어오고 있었고 주기적으로 권속들의 상태를 확인했었으니까.

원래 있어야 할 장소에 도착한 나는 유지은을 불렀다.

“대통령과의 이야기는 잘 됐나요?”

“이틀 안에 공식 성명이 나올 겁니다.”

블라디미르 대통령이 또다시 약속을 어길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가 얼마나 자신의 목숨을 챙기는 사람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감사합니다. 유지은 교수.”

“뭘요.”

“교수의 정보가 아니었으면 대응이 늦을 뻔했습니다.”

“만약 대응이 늦었다면 한새 씨보다는 러시아에 큰일이었겠어요.”

역시 유지은은 나에 대해 너무 잘 아는 거 같았다.

“그런데 한새 씨. 이제 곧 사태가 종결될 텐데, 이번 사태가 완전히 종결되면 무엇을 하실 생각이세요?”

“달라질 게 있겠습니까?”

“러시아의 대통령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국제 헌터 협회의 수장이 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요?”

러시아에 와서 너무 거창한 행보를 했기 때문일까?

날 무슨 세계적인 권력자가 될 사람으로 생각하는 거 같았다.

“전 그런 것보다는 무공 아카데미 총장으로 제자를 키우는 게 더 좋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