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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대신 회귀함-171화 (171/275)

#171화

대통령이 공식 성명으로 정부 소유의 시베리아 던전을 박한새에게 넘긴다는 발표를 하자 러시아 헌터들은 분개를 터뜨렸다.

“공이 큰 것은 인정해. 하지만 수백 개의 던전을 넘길 정도는 아니잖아!”

“비각성자 주제에 욕심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그냥 돈이나 먹고 떨어질 것이지!”

“정부에서 저러는 게 우리를 불신해서 그런다는군!”

“뭐? 정부가 뭐라고 우리를 불신해? 우리가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는데!”

러시아인들은 자존심이 강하였다.

헌터라면 더더욱 자존심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블라디미르 대통령은 그런 러시아 헌터들의 자존심을 자극하였다.

시베리아의 던전을 외국인, 심지어 비각성자인 박한새에게 넘겨준 것이다.

이건 러시아 헌터들보다 외국인이자 비각성자인 박한새를 더 신뢰한다는 뜻이었으니 러시아 헌터들로선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어야 해? 우리의 것을 강탈당하는데, 가만히 있어야 하냐고!”

“협회가 뭐든 하겠지.”

“협회? 그놈들이 제대로 뭔가를 한 적이 있던가?”

“그러면 어쩌자고?”

“우리가 나서야지! 놈을 공격해서라도 우리의 의지를 보여줘야 해!”

“멍청한 소리 하지 마! 그놈의 실력을 몰라서 하는 소리야?”

“그래봤자 비각성자잖아!”

다혈질적인 헌터 몇몇은 아예 박한새를 린치하여 러시아의 의지를 드러내야 한다고 선동하기도 하였다.

이미 박한새의 실력이 세계 최정상급이라고 알려졌음에도, 흥분하여 아무 소리나 지껄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그거 들었어? 헌터 아카데미에서 무공 학과를 개설한다던데?”

“무공 학과? 그게 뭐야?”

“왜, 한국에서 온 비각성자. 그 사람이 강해진 이유가 무공 때문이잖아? 그걸 가르치는 학과라는데?”

8성급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기 전에는 러시아에서 무공 아카데미에 관심을 가지는 이는 많지 않았다.

러시아 헌터들이 원래 다른 나라의 사정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헌터들, 이른바 ‘KH’군이 러시아로 들어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KH 한 명, 한 명이 웬만한 길드의 수장보다 강하였다.

심지어 랭크가 훨씬 낮은데도 그랬다.

당연히 러시아 헌터들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그들은 곧 무공이란 것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무공을 배우면 지금보다 훨씬 강해질 수 있다는 사실도 말이다.

다른 나라의 헌터들이 그렇듯, 러시아 헌터들도 강해지고 싶은 욕구가 상당한 편이었다.

그런 러시아 헌터들이 무공을 알게 되었으니, 너 나 할 것 없이 무공을 배우고 싶어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도 그럼 무공을 배울 수 있는 거야?”

“헌터 아카데미로 다시 돌아가면 배울 수 있겠지.”

“미친! 설마 그 고려인이 우리에게 이런 기회를 줄 줄이야!”

러시아에 알려지기를, 무공을 배우는 방법은 오직 하나였다.

무공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것.

그래서 러시아 헌터들은 무공을 배우는 것을 반쯤 포기하였었다.

수백, 수천 대 1의 경쟁을 뚫고 무공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러시아의 헌터 아카데미에서 무공 학과를 개설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전 세계와 경쟁하는 것이 아닌, 자국의 헌터들과 경쟁하는 것이었으니.

“심지어 그런 이야기도 있어. 박한새가 가져가는 던전들, 무공 학과에 다니는 헌터들이 주로 사용하게 될 거라는 이야기.”

“어, 그러면 사실상 우리가 계속 사용하는 거잖아?”

“그렇다고 봐야겠지?”

“구국 영웅이라더니, 진짜잖아!”

시베리아의 던전도 러시아 헌터들이 사용하게 될 거라는 소문이 퍼지자 여론은 순식간에 반전하였다.

러시아를 구해주었고 무공을 배울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심지어 자신이 정당하게 받은 던전들조차 공유해 준다고 하니 러시아 헌터들도 당연히 박한새를 긍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박한새를 욕하는 사람 있으면 내가 죽일 거다!”

“네가 고려인이라고 욕하지 않았었냐?”

“그건 내가 박한새의 제자가 되기 전의 이야기고!”

“누가 보면 벌써 무공을 배운 줄 알겠네.”

“아무튼! 이제부터 박한새는 우리 러시아의 은인이야! 누구라도 그를 욕하는 것은 용납 못 해!”

아직 무공 학과가 개설되기도 전이었건만, 벌써 박한새의 제자가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그만큼 러시아 헌터들의 무공을 배우겠다는 열망은 상당하였다.

러시아 헌터의 협회장, 유라이치 바실예프는 들려오는 소식에 화를 참지 못하고 책상을 내리쳤다.

우지끈!

책상이 반으로 쪼개지더니 이내 가루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쓰레기로 변한 책상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는 콧김을 뿜어내며 버럭 성을 냈다.

“자랑스러운 러시아의 헌터들이! 무공인지 뭔지 하는 잡기술 하나 때문에 자존심을 버리다니!”

여론이 이렇게 바뀔 줄은 그로선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온갖 수단으로 여론을 움직여 러시아 헌터들의 자존심을 자극하였건만, 겨우 무공 학과를 개설할 거라는 소문 한 번에 여론이 뒤바뀌다니.

“이놈을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던전을 다시 토해내게 할 수 있는 거야?”

“지금 그자를 견제할 때가 아닌 거 같습니다.”

유라이치 바실예프는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의 아군이 되어야 할 협회 이사가 엉뚱한 소리를 하니 신경질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놈을 견제할 때가 아니라니? 지금 그놈을 견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는 거야!”

“자칫하면 협회장의 자리에서 내려가야 하실 수도 있습니다.”

“뭣이? 그게 무슨 소리야?”

“협회 내부에서 은밀하게 파벨 포포프 아카데미 총장을 차기 협회장으로 밀고 있습니다. 이미 간부들 일부가 넘어간 것으로 추정됩니다.”

유라이치 바실예프는 눈을 부릅떴다.

개미 군단의 토벌대가 참패를 겪었을 때도 그는 자리를 지켰다.

헌터로서의 실력은 형편없어도 정치인으로서의 실력은 특출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협회장 자리를 빼앗길 수도 있다는 소리를 듣게 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그 고지식한 노인네를 누가 따른다고?”

40대 초중반에 지나지 않은 파벨 포포프였다.

하지만 헌터들의 평균 연령이 원체 어리다 보니 40대만 되어도 ‘늙은이’ 취급을 받고는 하였다.

물론 30대 중반인 유라이치 바실예프가 40대인 파벨 포포프를 늙은이 취급을 하는 것은 황당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파벨 포포프 총장이 헌터 아카데미를 책임지고 있지 않습니까?”

“설마 무공 학과 때문에 그 늙은이를 지지한다는 소리야?”

“헌터 협회의 간부들도 결국엔 헌터입니다. 무공을 배워서 더 강해지고 싶은 마음이 없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빌어먹을 고려인 때문에 또…!”

유라이치 바실예프의 입에서 비명 같은 고함이 터져나왔다.

설마 박한새 때문에 이런 낭패를 겪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하였다.

아무리 그래도 협회 내에서의 권력까지 위협하다니…!

‘내가 이대로 물러날 거 같으냐!’

그는 자신의 권력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말이 S랭크 헌터이지, 그의 실질적인 수준은 A랭크 헌터와 비슷하였다.

이런 그가 협회장이란 권력을 빼앗기게 된다면 그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되리라.

하지만 유라이치 바실예프의 발악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 이고르가 무공 학과에 들어가기로 했다고?”

그의 동생이자, 러시아를 대표하는 S랭크 헌터, 이고르 바실예프.

황당하게도 이고르 바실예프가 무공을 배우고자 헌터 아카데미에 입학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이것은 사실상 형인 유라이치 바실예프를 배신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고르 바실예프의 선택은 그리 대수로운 게 아니었다.

이미 대세는 넘어간 상황.

유라이치 바실예프가 타고 있는 배는 머리가 있는 사람이라면 당장이라도 탈출해야 할 배였다.

8성급 던전이 열리면서 세상은 급격하게 바뀌었다.

사회적으로 가장 많이 바뀐 것은 헌터들의 위세였다.

원래도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특권층으로 자리 잡던 것이 헌터란 존재였다.

그런데 더 난이도 높은 던전까지 생겨나자 헌터의 위세는 더욱 높아졌다.

“정치인 놈들은 우리에게 해준 게 뭐 있다고 시키는 건 이리도 많은 거야?”

“이것도 해줘, 저것도 해줘. 우리 헌터들이 언제까지 해줘야 해?”

“근데 웃기지 않아? 우리가 다 하는데, 왜 우리 위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놈들이 있는 거지?”

“왕족이란 것들도 마음에 안 들어. 따지고 보면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건 우린데, 왜 자기들이 선택받은 자라면서 거들먹거리는 거야?”

지금까지는 헌터들이 정치권력까지 넘보는 경우가 드물었다.

헌터 개개인이야 일반 사람에 비교하면 월등히 강했지만, 그래도 총에 맞으면 죽는 것은 똑같았다.

설령 총알을 피하거나 총을 맞아도 죽지 않는 헌터라고 해도 그들은 소수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그 소수의 헌터는 이미 엄청난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가진 것이 많은 그들이 굳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할 이유는 없었다.

헌터들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8성급 던전 브레이크가 터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 헌터는 없어선 안 될 필수 불가결한 존재로 인정받았다.

반면에 기존의 정치 세력들은 8성급 던전 브레이크로 인해 정치력에 큰 타격을 입었다.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들도 기존의 정치인보다는 헌터를 차기 지도자로 선택하려는 경향이 늘었단 뜻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헌터에게로 완전히 권력이 넘어간 나라가 적지 않았다.

고랭크 헌터가 과격한 성격을 가진 나라의 경우 쿠데타를 일으켜서 나라를 뒤엎는 일이 적지 않았다.

필리핀이 바로 그런 나라 중 하나였다.

10개의 길드가 연합을 이루고는 필리핀에 세 명밖에 없는 S랭크 헌터 중 한 명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며 쿠데타를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헌터 쿠데타에 정부군은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수도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필리핀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필리핀 헌터 협회장이 감금하고 있던 정부 인사들을 전부 풀어주었습니다.”

제니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불과 얼마 전에는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갔던 필리핀이었다.

만약에 쿠데타를 일으킨 헌터들이 대통령을 비롯하여 정부 인사들을 처형하였다면 필리핀은 단숨에 내전에 휩싸였을 터.

하지만 다행히 국제 헌터 협회의 중재가 먹힌 것인지, 쿠데타 세력은 선을 넘지 않았다.

“근데 갑자기 왜 그들이 우리 말을 따라준 건가요? 저희가 특별히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 것도 아닌데.”

원래 ‘국제’가 붙으면 다 그렇듯, 국제 헌터 협회 역시도 영향력이 그리 강하다고 보기 어려웠다.

몇몇 나라의 헌터들은 아예 국제 헌터 협회를 무시하기 일쑤였다.

필리핀의 헌터들도 처음 국제 헌터 협회에서 중재하기로 나섰을 때,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E랭크 이하의 하급 헌터들이 국제 헌터 협회 간부들 앞에서 대놓고 ‘자기들이 뭔데 남의 나라 일에 신경 쓰는 거야?’라고 떠들어댈 정도였다.

“코리아 헌터들을 보낸다는 협박이 주효했던 거 같습니다.”

“역시 코리아 덕분이었군요.”

제니퍼는 쓴웃음을 지었다.

뭐 때문에 막 나가던 필리핀 헌터들이 국제 헌터 협회의 말을 들어주나 했더니, 한국 때문이었었다.

‘정확히는 절정 고수들 때문이라고 해야 하나?’

절정 고수.

S랭크를 넘어선 실력자들.

그들은 이미 전 세계로부터 그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필리핀이라고 다르지는 않으리라.

‘필리핀 문제를 이렇게 쉽게 해결하다니. 절정 고수들이 도와준다면 멕시코의 일도 쉽게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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