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멕시코는 8성급 던전 브레이크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도 이미 헌터들이 국가 권력을 장악하던 국가였다.
하지만 멕시코 헌터들은 단순히 정치권력에만 손을 뻗치는 것이 아니었다.
종교.
무려 종교에까지 손을 뻗치고 있었다.
‘이 시대에 신정 정치가 펼쳐지는 나라라니.’
멕시코 헌터들은 다른 나라의 헌터들과 궤를 달리하였다.
특정 성좌를 추앙하는 종교를 만들어 전 국민을 강제로 개종시키고 있었다.
“멕시코의 상황은 어떤가요?”
“…곳곳에서 헌터들에 의한 학살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하루 평균 사망자만 수백 명에 달합니다.”
내전이 일어나는 나라들보다도 사망자가 많았다.
그만큼 멕시코의 상황은 막장이었다.
“절정 고수들을 동원할 수 있다고 말해도 안 먹히나요?”
쿠데타에 성공하여 한창 자신감 넘치던 필리핀 헌터들도 국제 헌터 협회에서 ‘절정 고수’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꼬리를 내렸다.
헌터들에게는 아마 핵이나 전투 함대가 움직이는 것보다 절정 고수를 동원한다는 말이 더 두렵게 느껴지지 않을까 싶다.
“오히려 역효과를 냈습니다. 아주 분개하는 반응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절정 고수를 동원한다는 협박이 멕시코에는 통하지 않았다.
멕시코는 원래도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헌터 강국 중 한 곳이었다.
그런데 멕시코 헌터들이 유일신으로 모시는 성좌가 자신을 찬양하는 멕시코가 예뻐 보였는지, 헌터들의 수준이 더욱더 올라가고 있었다.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제니퍼는 입술을 깨물었다.
8성급 던전 브레이크 사태 이후로 혼란을 거듭하던 나라들은 이제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멕시코만은 예외였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혼란이 더 커지는 상황.
무엇보다 혼란의 주체가 ‘헌터’라는 게 그녀를 답답하게 하였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말을 자신의 신념처럼 여기는 것이 그녀였다.
그런 그녀에게 멕시코 헌터들이 보여주는 행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국제 헌터 협회만으로는 그들을 제어할 수가 없어.’
국제 헌터 협회가 실질적으로 보유한 전력은 그리 강하다고 보기 어려웠다.
한 나라에 천 단위의 헌터를 동원하면 많이 동원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멕시코에 보낼 수 있는 헌터 전력도 한계는 명백하였다.
아무리 명분이 좋아도 이해득실을 철저하게 따지는 세계 각국의 헌터들을 설득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얻는 건 적고 목숨을 잃을 위험은 큰 헌터와의 전쟁에 누가 동참하겠는가.
‘역시 미스터 박의 도움을 받는 수밖에 없나.’
또 그의 도움을 받으려 하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자신이 전 세계의 헌터를 대표하는 국제 헌터 협회의 수장이라는 게 그저 부끄럽게만 느껴졌다.
박한새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멕시코에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될 텐데.
“모스크바행 비행기를 예약해주세요.”
“그를 만나러 가시려는 겁니까?”
“방법이 없네요.”
모스크바의 한 빌딩에서 수백 명의 헌터들이 가부좌 자세로 무공 수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러시아 헌터들은 어때 보입니까?”
“굉장히 열정적입니다. 자질도 상당히 뛰어난 편이고 말입니다.”
러시아어를 잘한다는 이유로 러시아 헌터 아카데미의 무공 학과장이 된 권혁진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재능들이 나쁘지 않았지.’
아직 무공 학과가 개설되기 전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기에 러시아 헌터들에게 기초적인 무공을 가르치고 있었다.
물론 모든 러시아 헌터를 가르칠 수는 없었기에 일부만 뽑아서 가르쳤다.
15만의 헌터 중에서 가리고 가려서 뽑은 인재들이라 그런 것일까?
헌터들의 재능이 상당하였다.
“다만 조금 강해졌다 싶으면 바로 싸움질을 벌여서 그게 문제입니다.”
러시아 헌터들은 다혈질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원래도 사고를 자주 일으키던 러시아 헌터들이었다.
그런데 무공을 통해 실시간으로 힘이 강해지는 것을 체감하자, 가끔 자신의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이들이 생겼다.
‘가리고 가려서 뽑은 자들인데 이 정도라니.’
범죄 이력은 당연히 있으면 안 됐고, 평소 인성 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이들만 받았었다.
하지만 인성이 좋다는 평가가 같은 러시아인들이 내린 평가라는 걸 잊었던 게 문제였다.
내 기준에서는 그야말로 사고뭉치들이 대부분이었다.
“아예 군대식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습니다.”
“군대식 말씀입니까?”
“교사의 명령에 철저하게 복종하게 만드십시오. 진짜 스승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만약 명령을 어긴 이가 나오면 가혹하다 싶을 정도의 엄벌을 내리십시오. 그럼 사고를 치는 이가 줄어들 겁니다.”
사람 말을 안 듣는 짐승에겐 몽둥이가 답이었다.
물론 러시아 헌터들이 짐승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바스타크 던전에 말씀하신 영약들을 심어놨습니다.”
러시아에 남아있는 동안 헌터들에게 무공을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집중한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러시아 정부로부터 인수한 시베리아 던전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과연 영약들이 잘 자랄지 모르겠습니다.”
“잘 자랄 겁니다. 바스타크 던전은 덴드로이드의 서식지라고 불리는 곳이지 않습니까.”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덴드로이드의 서식지인 게 무슨 상관이냐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덴드로이드가 나무 계열의 몬스터란 것을 생각하면 지극히 간단한 이치였다.
‘나무가 잘 자라면 영약도 잘 자라는 법이지.’
아마 지금 심어놓으면 내년쯤부터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3년 뒤쯤에 사용하게 될 영약들은 일류 이상의 무인이 복용해도 효과가 상당할 것이리라.
“총장님, IHA 협회장이 찾아왔습니다.”
“제니퍼 협회장 말입니까?”
“예, 접견을 요청하였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모스크바에 있는 동안 온갖 손님이 나를 찾았다.
러시아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유럽의 헌터들과 기업인, 정치인들이 쉴 새 없이 찾아온 것.
하지만 그 어떤 손님도 그녀만큼 반갑지는 않았다.
“시간은 당장이라도 내드릴 것이니, 올 수 있을 때 바로 오라고 하십시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제니퍼는 언제나처럼 밝은 얼굴로 내게 인사하였다.
“잘 지내셨죠? 미스터 박?”
“물론입니다. 제니퍼 회장도 잘 지내셨습니까?”
“덕분에 잘 지냈어요. 미스터 박이 아니었으면 편히 지내지는 못했을 거예요.”
그녀에게 감사 인사를 들을 일은 아니었다.
내가 러시아를 도운 것은 어디까지나 인류를 위해서였으니.
“러시아에 무공 학과를 개설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예, 앞으로 러시아에서도 무공을 가르칠 계획입니다.”
“혹시 다른 나라의 헌터 아카데미에서도 무공 학과를 개설할 의향이 있으신가요?”
“안 그래도 유럽 국가들에서 제안이 오기는 했습니다. 독일은 심지어 그 유명한 카이저가 직접 저를 찾아왔었습니다.”
카이저라고 진짜 독일의 황제를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독일은 어디까지나 민주주의 국가.
내가 말한 카이저라는 건 어디까지나 S랭크 헌터의 별명이었다.
특이하게도 버퍼 계열의 헌터였다.
제국의 군단에게 엄청난 효과의 버프를 주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아마 몇몇 국가에서는 무공 학과가 개설되기는 할 거 같습니다.”
“인류를 위해서 정말 좋은 일이네요. 미스터 박이라면 무공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인성 교육도 함께 할 것이니 말이에요.”
당연한 일이었다.
무공만 가르친다고 끝이 아니었다.
내가 사람들에게 무공을 가르치는 것은 사람들이 무공이란 힘을 옳은 곳에 사용하길 바라서였다.
그러니 인성 교육은 필수였다.
‘뭐 이런 제약들 때문에 의외로 각국 헌터 아카데미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지만.’
무공을 배울 또 하나의 기회를 얻은 러시아를 부러워하는 나라는 적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헌터 아카데미의 반응은 싱거웠다.
아무래도 이런저런 제약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무공 학과 학과장의 권력이 지나치게 강하다는 점도 신경 쓰일 거고.
한마디로 밥그릇 싸움 때문에 무공 학과 개설을 미루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 말씀을 하려고 저를 찾아온 거 같지는 않으신데….”
내가 인제 그만 본론을 꺼내라고 넌지시 말하자, 그녀가 미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실 미스터 박에게 부탁드릴 것이 있어요.”
“부탁이라면?”
“멕시코를 구해주세요.”
“멕시코 말입니까?”
난데없이 멕시코를 구해달라니.
황당하다면 황당한 부탁이었다.
하지만 나 역시 멕시코의 상황을 모르지는 않았다.
모르기는커녕 멕시코의 내부 상황을 그녀보다 더 정확하게 알고 있을 것이다.
이유야 간단하였다.
여명회가 개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리한 부탁인 것은 알고 있어요. 하지만 국제 헌터 협회의 회장으로서 멕시코 사태를 가만히 지켜볼 수는 없어요.”
그녀의 성격을 생각하면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만큼 멕시코의 상황은 심각하게 느껴졌다.
“일단 지금 당장 결정을 내리기는 어려울 거 같습니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고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 역시 멕시코의 일을 가만히 지켜볼 생각은 없었다.
제니퍼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움직일 때였다.
“제가 IHA 즉, 국제 헌터 협회의 회장과 만난 것은 다들 아실 겁니다.”
“당연히 알죠. 경쟁자가 등장했는데!”
“그 여자가 뭐라고 하던가요? 또 무리한 부탁을 하지는 않던가요?”
유지은과 김민경이 내 말에 가장 빠르게 반응하였다.
나는 그녀들의 반응을 보며 작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제니퍼 회장이 전하기를, 곧 IHA에서 멕시코의 헌터 집단을 빌런으로 발표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내 말에 교수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멕시코 헌터 전체를요?”
“정확히는 사교를 믿는 헌터들이 대상일 겁니다.”
사교를 믿는 헌터들이 대상이라고 했지만, 사실상 멕시코 헌터 전체라고 표현해도 과장은 아니었다.
이미 멕시코 헌터 집단의 핵심부는 파롤을 찬양하는 사교 세력에게 넘어간 거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근데 그 말만 전해주려고 IHA 회장이 직접 온 것은 아닐 텐데, 설마 멕시코의 빌런들을 공격하는 것에 도움을 달라고 하던가요?”
“너무 무리한 부탁을 하네요. 우리는 IHA 산하 단체가 아닌데 말이죠.”
그러자 다른 교수들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돕는다는 표현이 맞는지 의문입니다. 멕시코 정부가 도움을 요청한 적은 없지 않습니까?”
“멕시코로 가는 건 득보다 실이 클 거 같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행한 게 정의를 위해서라도,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맞습니다. 만약 저희가 멕시코의 헌터 정권을 무너뜨린다면 각국은 저희의 힘을 경계하게 될 겁니다.”
나는 그들의 반응에 오히려 기꺼운 반응을 보였다.
큰 힘을 가지면 어떤 식으로든 사용하고 싶은 게 사람의 심리였다.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는 상대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멕시코가 아무리 헌터 강국을 자부한다지만, 무공을 익힌 교수들에겐 두려울 게 없는 대상이었다.
그런데도 교수들은 힘을 사용할 생각보다는 명분과 실리를 따지는 이성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회귀 전에, 자신의 힘을 과신하여 온갖 사고를 일으키는 절정 고수들의 모습을 봐왔던 나로선 그런 그들의 모습이 긍정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제가 이걸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멕시코 헌터들이 유일신으로 모시는 성좌가 파롤이란 사실을.”
내가 ‘파롤’을 언급하자 부정적이었던 교수들의 분위기가 반전하였다.
“그 빌어먹을 악신, 파롤 말입니까?”
“더러운 악마가 멕시코에까지 손을 뻗었군요!”
“흠,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얼마 전까지 파롤의 존재조차 몰랐던 교수들이 파롤을 악신이라 부르며 엄청난 증오심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