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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대신 회귀함-175화 (175/275)

#175화

“러시아 대통령이 오늘은 또 무슨 일로 불렀을까요?”

“무공 학과 때문일 거 같은데.”

주현근의 물음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였다.

러시아는 무공 학과가 처음으로 개설되는 나라였다.

최초란 불완전함을 내포하고 있었기에 러시아 정치인들은 우려를 표하였다.

‘하지만 대통령이 반대한다고 해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지.’

무공을 향한 헌터들의 염원을 생각하면 무공 학과 개설은 막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사실 무공을 염원하는 것은 헌터들뿐만이 아니었다.

한국의 비각성자들이 그렇듯, 러시아의 비각성자들도 헌터만큼 강해지는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으니까.

“도착했습니다.”

어느덧 내가 탄 차가 크렘린궁에 도착하였다.

나는 곧바로 블라디미르 대통령이 접견실로 사용하는 게오르기옙스키 홀로 향하였다.

“멈추십시오. 신원 확인을 하겠습니다.”

“박한새 본인 맞습니까?”

게오르기옙스키 홀의 입구를 지키는 근위대 소속 헌터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목소리만 차가운 것이 아니라, 표정도 왠지 모르게 나를 불쾌하게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여권을 보여주십시오.”

그는 분명히 내가 누구인지 알아본 눈치였다.

그런데도 여권을 요구한다?

나를 골탕 먹이려는 속셈인 게 분명하였다.

‘러시아에서는 툭하면 이런 일을 겪는군.’

세계 최정상급 실력자란 평가를 받으면 뭐 하나.

아집으로 가득 찬 헌터들에게는 그저 비각성자일 뿐인데 말이다.

“여권이라. 그것보다 저를 확실하게 증명할 수단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무공.”

근위대원을 향해 무형의 기를 발산하였다.

나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근위대원이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하였다.

“저인 게 증명되었으니,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주춤거리며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미간을 좁혔다.

“밖에 웬 소란입니까?”

“비서실장님!”

게오르기옙스키 홀 안에 있던 페트로프 비서실장이 밖으로 나왔다.

“이자가 스킬을 사용하였습니다!”

근위대원이 나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감히 크렘린궁에서 스킬을 사용하였다고요?”

“박한새 씨.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지금 저희 총장님을 추궁하는 겁니까?”

주현근이 앞으로 나서서 강한 어조로 말하였다.

하지만 페트로프 비서실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대통령님이 바로 안에 계십니다. 그런데도 스킬을 사용했다니요. 반드시 해명하셔야 합니다.”

“저는 비각성자입니다. 그런 제가 어떻게 스킬을 사용합니까?”

페트로프 비서실장이 미간을 좁혔다.

“밖에 무슨 일 있나?”

안에서 대통령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페트로프 비서실장이 뻔뻔하게 대답하였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박한새 총장이 오셔서 인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서 안으로 모셔오게.”

그 말을 듣고 내가 게오르기옙스키 홀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근위대원이 내 앞을 막았다.

“들어가시기 전에, 몸수색 좀 하겠습니다.”

“몸수색? 저희 총장님의 몸을 수색하는 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주현근이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나는 주현근을 말리고 몸수색을 받았다.

몸수색이 끝나고 주현근과 함께 들어가려고 하니 이번에는 주현근의 앞을 막아섰다.

“혼자만 들어가셔야 합니다.”

“이 사람은 내 수행원으로 왔습니다.”

절정 고수를 수행원으로 쓰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냐마는 주현근이 자원하였다.

무공 수련하기도 바쁠 텐데, 내 곁을 호종하겠다고 자원한 것이었다.

그래서 교수들 사이에서는 주현근을 농담 삼아 ‘호법’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수행원인지 아닌지는 관심 없습니다. 대통령께서 부른 건 박한새 총장, 한 분뿐입니다.”

“무언가 착각하시는 거 같은데, 저는 블라디미르 대통령의 아랫사람이 아닙니다. 대통령이 손수 모셔온 손님이죠.”

“손님이라 해도 절차가 있는 법입니다.”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굳이 대통령을 만날 이유도 없습니다.”

내가 몸을 돌리자 근위대원이 당황한 목소리로 내 손목을 붙잡았다.

“놓으십시오.”

목소리에 놀란 것인지, 근위대원이 황급히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페트로프 비서실장을 바라보았다.

“두 분이 함께 들어가게 해드리겠습니다. 들어가시지요.”

“양보해주는 척하실 게 아니라, 저에게 사과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당신의 독단인지, 블라디미르 대통령이 나를 푸대접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대우를 받는다면 저 역시 러시아에 남아있을 생각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무례한 행동을 하지 않겠습니다.”

페트로프 비서실장이 고개를 숙이며 내게 사과하였다.

나와 불편한 관계가 되는 것은 두렵지 않아도 대통령의 총애를 잃는 것은 두려웠던 모양이다.

‘이런 자들만 없었으면 진즉에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인데.’

그저 내가 외지인이란 이유로 경계하는 자들이었다.

내가 나라를 구해줬음에도 어떻게든 나를 견제하고 내 명성에 흠을 내려고 하였다.

‘내가 잠깐 시베리아에 갔을 때도 바로 권혁진 학과장을 포섭하려고 하였었지.’

권혁진이 내 제자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이간질을 시도하였다.

무공 학과를 개설하는 건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으니, 무공 학과의 학과장이라도 포섭하려는 의도였다.

“다음에는 어떨지 두고 봅시다.”

“…예.”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그를 보며 나는 속으로 혀를 차고는 게오르기옙스키 홀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박한새 총장.”

블라디미르 대통령은 내 뒤에 따라오는 페트로프 비서실장의 얼굴을 힐끔 보더니 내게 반갑게 인사하였다.

아마 그도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눈치챘을 것이었다.

굳이 거론하지 않는 이유는 자존심 때문일 터.

내게 사과하는 상황은 그 역시도 원치 않을 것이니 말이다.

“홍차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차이지요.”

“잘 마시겠습니다.”

“한국에선 커피에 얼음을 넣어 먹는다고 들었습니다. 하하, 저도 한번 먹어봤는데 뜨거운 커피보다 더 나은 거 같더군요.”

“그런데 오늘 저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분이 그리 좋지 않은 상태에서 의미 없는 대화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묻자, 블라디미르 대통령이 살짝 표정을 굳혔다.

접견실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블라디미르 대통령은 애써 웃으며 본론을 꺼내 들었다.

“곧 멕시코로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러시아 헌터들도 데려가신다고 하였는데, 맞습니까?”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인원에 한해 데려갈 생각입니다.”

“근데 그 인원이 만 명에 가깝다고 들었습니다.”

다 알고 있으면서 꼬치꼬치 묻는 이유가 뭘까?

정치인의 화법은 여전히 적응하기 어려웠다.

“만 명까지는 아닙니다. D랭크 이상의 헌터들만 신청을 받았는데도 팔천 명의 인원이 신청하였습니다.”

D랭크 이상의 헌터가 팔천 명이면 실로 엄청난 전력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의 D랭크 이상 되는 고랭크 헌터 숫자가 팔천 명 정도였으니 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러시아 대통령으로서 우려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려가 된다는 말씀은?”

“그렇게 많은 D랭크 이상의 헌터들이 멕시코로 간다면 러시아는 누가 지키겠습니까.”

“잠깐 원정하러 가는 것뿐입니다. 길게 있지는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멕시코와의 전쟁은 말이 전쟁이지, 사실 전쟁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여명회에서 12명이나 되는 사도 중, 단 한 명의 사도와 싸우는 것이었으니까.

내가 러시아 헌터들을 데려가려는 것은 어디까지나 러시아를 확실한 동맹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앞으로 여명회와의 전쟁은 계속 이어질 터.

그때도 자연스럽게 러시아 헌터들을 동원할 수 있게끔 멕시코와의 전쟁 때 체계를 만들 것이었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드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블라디미르 대통령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몇 초가 지나서야 말문을 열었다.

“멕시코로부터 무엇을 얻어낼지 확답도 받지 않고 헌터를 보내는 것이 러시아의 대통령인 저로선 마음에 걸리는군요.”

멕시코의 상황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이해득실만 따지는 모습이 좋게 보이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백, 수천 명의 무고한 희생자가 나오고 있는 나라가 멕시코였는데 말이다.

“헌터들은 러시아를 위해 멕시코를 도우러 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정의를 위해 멕시코를 도우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통령께서는 마치 헌터들이 멕시코로부터 무언가를 받아내려는 목적으로 멕시코에 가는 것으로 착각하시는 거 같습니다.”

“박한새 총장!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대통령께 예의를 갖추십시오!”

페트로프 비서실장이 버럭 소리치며 내게 말했다.

블라디미르 대통령은 그런 비서실장을 말리지 않고 불쾌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그 역시 나의 발언이 탐탁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여기는 대통령이 계신 곳입니다!”

“급하다니까요!”

그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유지은이 안으로 들어왔다.

“이게 무슨 무례한 행동입니까!”

“죄송하지만 급하거든요?”

“유지은 교수, 무슨 일입니까?”

나는 유지은을 다그치지 않고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가 아무런 이유 없이 무례한 행동을 하지 않았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IHA의 전용기가 추락하였어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IHA의 전용기가 추락하였다니?”

“미국으로 귀국하던 IHA의 전용기가 와이번 무리의 습격을 받아 상공에서 폭파되었어요!”

전혀 예상치 못한 소식이었다.

IHA의 전용기가 추락하였다니!

‘와이번의 습격이라고? 그러면 6사도가 움직인 것인가!’

와이번 무리가 아무런 명령 없이 정확하게 IHA의 전용기를 노릴 가능성은 없었다.

애초에 던전이 아닌, 지구에 있는 와이번 무리는 죄다 6사도의 통제 아래 있기도 했고 말이다.

“제니퍼 회장과 IHA 헌터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아직 생사가 확인되지 않았어요. 방금 막 습격당했다는 정보를 입수해서 한새 씨에게 온 거예요.”

제니퍼의 생사가 확인되지 않았다는 말을 듣자 나는 화를 참기 어려웠다.

“으, 으음.”

“허억…!”

“총장님. 진정하십시오.”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살기를 내뿜었는지, 블라디미르 대통령과 페트로프 비서실장이 두려움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사과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금은 그들의 기분을 맞춰줄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활용할 수 있는 정보를 총동원하여 IHA 헌터들과 제니퍼 회장의 생사를 확인해주십시오.”

“그럴게요.”

그녀가 물러나자 이번에는 비서실 직원이 게오르기옙스키 홀 안으로 달려왔다.

“대통령님! IHA의 전용기가 추락하였다고 합니다!”

한발 늦은 소식이었다.

블라디미르 대통령은 비서실 직원의 보고에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정부 소속도 아닌 자에게 정보력에서 밀렸다는 게 참담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대통령님. 그들이 세계 주요 인물을 노리기 시작했는데도 헌터를 파견하는 것에 반대하시겠습니까?”

“…설마, 박한새 총장께서는 이번 일에 멕시코 헌터들이 관여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몬스터를 테러에 사용하는 세력은 여명회밖에 없습니다.”

개인이 스킬이나 아이템 등으로 몬스터를 다루는 경우도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극히 일부였고 와이번 무리를 다스리는 헌터는 여명회 소속 말고는 존재하지 않았다.

“으음. 오해하시는 거 같은데, 저는 반대한 적이 없습니다. 그저, 정해야 할 것은 확실하게 정해야 한다고 의견을 냈을 뿐입니다.”

“헌터들을 멕시코로 파견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면 되겠습니까?”

“무, 물론입니다.”

“그러면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제대로 인사도 하지 않은 채, 크렘린궁을 나왔다.

“와이번 무리가 습격한 곳이 어디입니까?”

“아소르스 제도 근처라고 합니다.”

“북대서양이군요.”

안타깝게도 와그너의 신발은 내가 가보지 않은 곳은 갈 수 없었다.

아무리 나라도 지금 당장 그녀를 구출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살았을까? 아니, 분명 살았을 거다. 제니퍼가 와이번 무리에 당할 사람은 아니야.’

1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여상한 말투로 말했다.

“IHA 회장이 타고 있다던 비행기는 우리 애들이 추락시켰어.”

남자아이, 6사도의 말에 2사도, 데미안 디아스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잘하셨습니다. 정말 잘하셨습니다.”

“칭찬 말고 우리 애들 먹이나 잘 챙겨줘.”

“물론입니다. 갓난아기들을 준비해놓겠습니다.”

국제 헌터 협회와의 전쟁에서 큰 역할을 해줬는데 갓난아기 수십 명을 먹이로 주는 것은 전혀 아깝지 않았다.

‘후후, 이단자 놈들. 감히 우리의 거사를 방해하려 들다니. 파롤께서 용서하실 줄 알았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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