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그런데 IHA 회장은 못 죽였어.”
“예? 비행기를 추락시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여자, 생각보다 강하던데. 우리 애들이 전부 죽어버렸어.”
IHA의 전용기를 습격한 와이번의 수가 족히 열 마리가 넘는데 그들이 제니퍼를 죽이는 것에 실패했다고?
데미안 디아스는 예상치 못한 소식에 이를 악물었다.
‘제니퍼, 그 이단자 년도 무공이라는 것을 배웠다고 하더니….’
역시 박한새가 문제였다.
박한새가 아니었으면 제니퍼를 죽이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터.
“내가 도와줄까?”
거미와 인간이 합쳐진 반인반수, 10사도, 크루엘라의 말에 데미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라크네, 당신의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
“왜? 내가 IHA 회장이라는 년 죽여줄게. 나 못 믿어?”
“저희 신도들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지금 바깥 상황이 어떤지 몰라? 전 세계에서 쳐들어올 기세던데, 너 혼자 가능하다고?”
“그래봤자, 이단자들입니다.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
“무공 익힌 놈들은 어쩌게? 광신도 따위가 무공을 익힌 헌터들을 이길 거 같아?”
크루엘라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도발이나 다를 게 없는 말이었으나, 데미안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강하다는 사실은 그 역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군사력이 밀린다고 해서 전쟁에 반드시 패배하란 법은 없습니다.”
“군사력이 절대적이지, 그건 뭔 또 개소리야?”
“정신력이란 게 있습니다.”
“키킥, 정신력? 그럼 나랑 싸워볼래? 그놈의 정신력이 너를 지켜줄 수 있을지 궁금해서 그래.”
“뭐, 내 도움을 거절한다면 더 말하지 않을게. 어차피 나는 네놈이 죽든 말든 신경 안 쓰거든. 대신 이건 확실하게 지켜.”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박한새, 그놈이 멕시코로 온다면 네가 말려도 난 갈 거야. 놈은 내가 예전부터 눈독 들이던 놈이었으니까.”
실제로 그녀는 오래전부터 박한새에게 관심을 두고 있었다.
다만 박한새가 ‘다른 대륙’인 한국에서 활동하기에 그녀가 찾아가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자는 제가 직접 아버지의 곁으로 보낼 생각이었습니다만.”
“그래서? 지금 내 말을 거역하겠다는 거야?”
“…당신도 아버지의 딸이니, 제가 너그럽게 넘어가겠습니다.”
“킥킥. 좋아, 그래야지.”
크루엘라는 쾌활하게 웃었다.
오래전부터 관심을 두고 있었던 박한새를 마주한다는 생각에 벌써 설렌 것이다.
‘어서 와라. 와서 나의 영양이 되어라.’
“괜찮겠지?”
“무사할 겁니다. 그분도 초일류 경지의 무인이지 않습니까.”
주현근이 내게 위로하듯 말을 꺼냈다.
“이번 일이 잘 해결되면 제니퍼 회장을 어떻게든 절정 고수로 만들든가 해야겠어. 명색이 국제 헌터 협회의 수장이 초일류 경지인 것은 문제가 있으니 말이야.”
“그분까지 가르칠 시간은 있으십니까?”
“…어떻게든 시간을 내야지.”
하루가 너무 짧았다.
내 제자들도 이제는 많이 늘어서 나의 역할을 분담하고 있는데도 일거리가 끊이지 않았다.
무공 아카데미의 총장으로 있는 한, 앞으로도 계속 이럴 것이다.
‘아니, 설령 총장의 직위가 없더라도 바쁠 테지. 나는 성좌이기도 하니.’
성좌로서의 활동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8성급 던전 브레이크를 진압하면서 천문학적인 양의 카르마가 쌓인 상태.
이 카르마를 어떻게 사용할지도 고민해봐야 했다.
“한새 씨, IHA 소식이에요.”
“제니퍼 회장은 어떻게 됐습니까? 무사하답니까?”
“무사해요. 다친 곳도 없다고 하네요.”
유지은의 말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많이 걱정하셨나 보네요. 한새 씨가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 봐요.”
“…다른 분들은 어떻습니까?”
“꽤 사망자가 있다고 하네요. IHA 소속 헌터 17명이 사망했다고 해요.”
“피해가 크군요.”
“그래머라고 IHA의 주요 간부도 병원에서 끝내 사망하였어요.”
안타까운 일이었다.
IHA의 인재들이 이렇게 허망한 죽음을 맞이하다니.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리자 휴대폰을 꺼냈다.
[제니퍼 협회장]
발신자의 이름을 확인한 나는 바로 통화하기 버튼을 눌렀다.
“제니퍼!”
-미스터 박. 가장 먼저 당신이 생각나서 전화했어요.
“걱정했습니다.”
-고마워요. 미스터 박. 이번에도 미스터 박 덕분에 살았어요.
“제가 무엇을 했다고 그러십니까.”
-미스터 박에게 배운 무공이 없었으면 죽었을 거예요.
감사 인사를 전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그리 밝지 않았다.
희생자가 너무 많이 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제니퍼는 씁쓸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와이번 무리에게 당하는 헌터들을 보면서 정말 후회하였어요. ‘내가 무공을 조금 더 열심히 수련했으면 모두를 지킬 수 있었을 텐데….’ 이런 생각이 계속 들었거든요.
“제니퍼가 농땡이를 피운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이런 일을 겪으니 후회가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거 같아요. 후우. 그래머 이사까지 그렇게 될 줄은….
“뭐라고 위로를 해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니에요. 지금은 위로를 받을 때가 아니죠. 복수심을 불태운다면 또 모를까.
그녀도 이번 와이번 무리의 습격을 단순히 천재지변으로 생각하지는 않는 거 같았다.
하긴, 내가 입이 닳도록 여명회의 위험성을 경고하였는데 와이번에게 습격당한 것을 우연으로 생각할 리는 없었다.
-미스터 박. 미국에 도착하면 다시 연락드릴게요.
“예,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그런데 미스터 박. 혹시 미스터 박도 미국에 오실 계획이 있으신가요?
“미국 말씀입니까? 지금은 따로 계획한 것이 없는데….”
-사실 안 좋은 소문을 들었어요. 미국이 멕시코와 단독으로 전쟁을 치를 거라는 소문을.
미국이 단독으로 멕시코를 친다니?
제니퍼는 단순히 소문이라고 하였지만, 그녀가 아예 가능성 없는 뜬소문을 나에게 전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 UN에 결의안을 제출하지도 않았지 않습니까?”
몬스터와의 전쟁이라면 명분이 필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멕시코와의 전쟁은 몬스터가 아닌, 인간과의 전쟁이었다.
IHA에서 아무리 멕시코의 주요 인사들을 빌런이라 선언했다지만, 그것만으로 멕시코와 전쟁을 선포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세상 사람들은 아직 여명회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멕시코 일도 사이비 단체 하나가 멕시코를 장악한 것으로 단순하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준비한 것이 UN 총회의 결의안이었다.
안전보장 회의에서의 결의안 즉, 안보리 결의안은 통과될 가능성이 없을 거다.
중국에서 계속 반대할 것이니.
그래서 안보리 결의안 대신, 총회의 결의안을 준비하고 있었다.
비록 총회의 결의안은 안보리 결의안과 달리 구속력이 거의 없다지만, 그것도 찬성표가 많아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UN에 소속된 국가 중에서 절반 이상이 찬성표를 던진다면 그것만으로도 아주 강력한 명분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미국 행정부는 멕시코의 상황을 영토 확장의 기회로 여기는 거 같아요.
멍청하기 그지없는 판단이었다.
2사도가 지배하는 곳을 점령하겠다고 하다니.
‘미국이라면 여명회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을 텐데도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군.’
멕시코와의 전쟁은 영토를 차지하는 면의 전쟁이 아닌, 철저히 점과 점의 전쟁이 될 것이었다.
현재 종교 지도자로 알려진 2사도, 데미안 디아스를 처리하지 않는 한, 멕시코인들은 광신도처럼 저항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1억이 넘는 멕시코인 전체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면 절대 멕시코를 점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저는 미스터 박이 미국에 와줬으면 좋겠어요.
“미국 행정부를 설득해달라는 거군요.”
-네. 미스터 박만큼 여명회란 조직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CIA가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철저하게 힘을 감춰왔던 여명회에 대한 정보는 별로 구하지 못했을 거다.
아마 미국이 파악한 여명회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리라.
반대로 CIA 내부는 여명회의 첩자들로 가득할 것이고.
“알겠습니다. 일정을 맞춰서 미국으로 가 미국 정부에 여명회에 관한 정보를 전하겠습니다.”
초강대국인 미국이 괜히 자멸하는 결과는 나 역시 원하지 않았다.
어차피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미국 헌터들도 동원해야 하니, 겸사겸사 미국으로 가는 게 좋을 거 같았다.
-늘 미스터 박에게 신세만 지네요.
“아닙니다. 제니퍼의 요청이 아니더라도 저는 미국에 갔을 겁니다.”
-…고마워요.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더 위로하지 않고 통화를 마무리하였다.
‘동료들의 죽음을 겪고 많이 울적해졌나 보군.’
그 강인한 여전사가 눈물을 흘리다니.
“제니퍼 회장과 통화는 잘 하셨어요?”
잠시 자리를 비켜주었던 유지은이 통화가 끝나자 내 곁으로 다가와서는 물었다.
“예, 유지은 교수의 말처럼 제니퍼는 크게 다친 곳이 없는 거 같았습니다.”
“기쁘시겠어요. 많이 걱정하셨잖아요. 제니퍼 회장을.”
유지은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내일이나 모레쯤 미국에 갈 생각입니다.”
“미국이요? 갑자기 왜요?”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여명회에 관한 정보를 미국에 넘겨줘야 할 거 같습니다.”
“슬슬 그럴 때가 되긴 했죠. 미국도 경각심을 가질 만큼 유의미한 정보가 모이기도 했으니.”
“괜찮냐니요? 아, 미국에 정보를 넘겨주는 거요?”
“예. 유지은 교수가 직접 구해 온 정보도 많지 않습니까.”
그녀의 스킬 중에는 사이코메트리란 스킬도 있었다.
정보를 입수하는 것에 최적화된 스킬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 스킬로 지금껏 여명회를 조사하였다.
7사도와 적비단의 관계, 5사도와 여명회의 연관성 등등.
내가 그저 회귀라는 경험 덕에 얄팍하게 알고 있던 여러 정보를 그녀는 직접 발로 뛰어서 구체화해준 것이었다.
“물론이죠. 한새 씨가 쓰라고 넘겨준 정보인데요.”
“하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유지은 교수께선 왜 저를 이렇게까지 따라주는 겁니까?”
“갑자기 그런 질문을 왜 하세요. 부끄럽게.”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다른 분들과 달리 무력을 키우는 것에만 몰두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사람의 욕망을 무시하지 않았다.
내 제자들이 나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이유?
단순하게 보면 나의 은혜를 받아서 내게 충성심을 보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금 더 노골적으로 들여다보면 나에게 ‘가치’란 것이 있기 때문에 충성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바로 새로운 무공을 배울 수 있다는 오직 나만이 가진 가치 말이다.
즉, 제자들이 내게 충성하는 이유는 더 강해지고 싶다는 인간 본연의 욕구 때문이었다.
그런데 유지은은 다른 제자들과 달랐다.
재능이 워낙 출중하여 다른 교수들과 비교해도 실력 면에서 손색은 없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무력을 키우고자 크게 노력하지 않았다.
자발적으로 온갖 정보를 취합하며 나를 보조할 뿐이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게 좋겠죠? 한새 씨는 무언가 숨기는 거 싫어하잖아요.”
“예. 솔직하게 말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제국의 황후가 되고 싶어요.”
“…제국의 황후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황후가 안 되면 후궁이라도 저는 좋아요. 한새 씨의 옆자리에서 제국을 경영할 수만 있다면.”
나는 그녀의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진지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표정을 고쳤다.
“저는 제국을 건설할 생각이 없습니다.”
“제국은 어디까지나 비유예요. 한새 씨, 당신도 아시잖아요.”
“뭘 말씀입니까?”
“여명회와의 전쟁이 끝나면 한새 씨는 세계의 구원자가 되겠죠. 그리고 한새 씨는 한새 씨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계에서 제일가는 권력자가 될 거예요.”
“용의 꼬리보다 뱀의 머리가 낫다고 하는데, 저는 반대예요. 한새 씨의 곁에서 저는 용의 꼬리로 남아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