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리암 골드버그는 순간 흠칫하였다.
바로 뒤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어!’
뒤가 잡히는 동안 그는 기척을 감지하지 못하였다.
5반의 실력자인 그를 상대로 이렇게 인기척도 없이 뒤를 잡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어떤 교수지? 김민경 교수인가. 아니면 이정 교수?’
유력한 용의자는 교수들이었다.
교수 정도는 되어야 그의 마력 감지를 뚫고 그의 뒤를 잡을 수 있으리라.
“리암 골드버그 학생.”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 교수가 아니라, 총장님이잖아!?’
리암 골드버그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였다.
미국에 있어야 할 박한새가 왜 그의 뒤에서 나타난단 말인가.
“초, 총장님. 언제 모스크바로 돌아오셨습니까?”
당혹 어린 표정을 짓는 그에게 나는 딱딱한 태도로 말했다.
“리암 골드버그 학생 때문에 잠시 돌아왔습니다.”
“제,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미국 정부에 특별한 제안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내 말에 그는 놀란 듯 눈을 부릅떴다.
그는 이내 놀란 표정을 지우고는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예, 제안이 오기는 했습니다. 미 정부에서 멕시코 해방 전쟁에 참전해달라고 권유하더군요.”
“왜 저나 다른 교수들에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사적인 일을 전부 말해야 합니까? 그런 의무 사항은 없다고 들었는데….”
리암 골드버그는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냐는 듯, 뻔뻔하게 굴었다.
하기야, 그는 무공 아카데미 학생이기 이전에 미국의 헌터였다.
미국 정부와 따로 협상한 것을 죄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애국심이 넘치는 사람이 조국의 전쟁을 돕는다고 한다면 나 역시 말릴 생각은 없었다.
단,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 혼자 전쟁에 참전할 때의 이야기였다.
“당신이 자발적으로 미국의 전쟁에 참전하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왜 동급생들을 협박까지 하며 전쟁에 끌고 가려고 하는 겁니까?”
내 말에 그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자세한 사정을 알고 있으리라고 예상 못 했던 모양이다.
“저는 이번 전쟁에서 크게 활약하여 전미에 무공의 위력을 똑똑히 알릴 겁니다.”
“제가 묻는 것은 그게 아니었을 텐데요.”
“제 말을 끝까지 들어보십시오. 제가 활약하면 활약할수록 미국인들은 러시아의 헌터 아카데미가 무공 학과를 개설한 것처럼, 미국에서도 무공 학과가 개설되기를 바랄 겁니다.”
“뭐가 그래서입니까. 총장님께서 원하신 것이 바로 이거지 않습니까. 모든 나라의 헌터들이 무공을 배우는 것.”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그를 지긋이 바라봤다.
그러자 그가 나의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했는지, 미묘하게 높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를 미국 헌터 아카데미의 학과장으로 임명해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미국 헌터 전체를 무인으로 양성해드리겠습니다.”
“마치 맡겨놓은 것을 달라는 듯한 태도로 보이는데, 제가 제대로 본 게 맞습니까?”
리암 골드버그가 어깨를 으쓱하였다.
“나쁘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차피 총장님도 미국에 학과장을 따로 둘 것이지 않습니까? 미국 헌터 중에는 제가 가장 성취도가 좋으니 학과장으로 저만큼 적법한 사람은 없습니다.”
웃기는 이야기였다.
무공에 대해 안다면 얼마나 안다고 학과장을 운운한단 말인가.
“일개 학생이 학과장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합니까?”
“러시아처럼 한국인 교수를 학과장으로 임명하실 생각이라면, 저는 결사적으로 반대하겠습니다.”
“당신에게 반대할 권리가 있다고 착각하는 모양입니다.”
“지금 저를 따르는 미국 학생이 이백 명입니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총장님은 아실 거라 믿습니다.”
이백 명?
유지은이 넘겨준 정보에 따르면 그의 파벌은 최대 백 명에 지나지 않았다.
아마 나머지 백여 명은 그의 협박에 굴종한 것일 터.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기에 본래 주제로 다시 돌아왔다.
“자퇴라도 하겠다는 말로 들립니다.”
“자퇴할 수도 있고, 무공을 사용해 다른 일을 할 수도 있고. 저의 카드는 많습니다.”
“제 요구는 간단합니다. 추후 미국 아카데미에서 무공 학과를 개설한다면 저를 그곳의 학과장으로 임명해주십시오. 그리고 저에게 무인을 양성할 수 있는 격체전력을 전수해주십시오.”
기세등등한 그를 보자 내 눈빛에서 나도 모르게 살기가 흘러나왔다.
‘아주 나를 우습게 보는 모양이군.’
무공 아카데미의 학생이라면 나의 실력을 뻔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를 우습게 보는 이유는 외부에 알려진 내 ‘성격’ 때문이었다.
미국도 그랬듯, 사람들은 내가 무슨 명예만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착각하였다.
리암 골드버그 역시도 내가, 명예가 훼손될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을 제재하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어서 저리 나오는 것이리라.
“이백 명의 학생이 당신을 따른다고 했습니까?”
“예. 미국 학생은 거의 제 말을 따른다고 보셔도 됩니다. 믿기지 않으시다면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됩니다.”
“그럼 그들이 왜 당신을 따른다고 생각합니까?”
“후후후. 그야 제 특출난 재능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재능이 사라지게 될 때, 당신의 곁에 남아있을 사람은 없겠군요.”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제가 당신에게 준 무공, 다시 뺏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으십니까?”
내 말에 흠칫 놀란 리암 골드버그는 황급히 뒤로 물러나더니 경계 태세를 취하였다.
상당히 빠른 반응을 보였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그의 혈을 짚고는 배에 손을 올렸다.
그러곤 스킬, ‘마력 흡수’를 사용해 그의 단전에 있는 내공을 건드렸다.
어느 순간부터 마력 흡수를 격체전력 대용으로 사용했지만, 마력 흡수란 스킬의 본질은 상대의 마력을 흡수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마력뿐만이 아니라, 단전 속의 내공을 흡수하는 것도 가능하였다.
“그그그, 그만! 그만하십시오!”
점혈을 강제로 풀어낸 그가 다급히 외쳤다.
재능이 있다더니, 점혈을 풀어내는 속도도 상당히 빨랐다.
하지만 점혈을 풀어낸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강제로 기절시키면 그만인데.
나는 주먹을 들어 올리며 살기를 내뿜었다.
그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스승으로서 제자를 ‘훈육’하는 것이었다.
“제,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총장님의 뜻에 거역하지 않겠습니다.”
미국인인 주제에 어디서 본 것은 많은지 그가 바닥에 넙죽 엎드리며 내게 복종의 뜻을 밝혔다.
그만큼 내공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 듯싶었다.
“이미 당신은 저를 농락하며 조롱하였습니다. 제가 당신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시키는 것이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내공만 빼앗지 말아 주십시오!”
스승을 존경하는 마음만 적을 뿐, 그는 무인이었다.
그리고 무인은 자신의 무력이 약해지는 상황을 극도로 싫어하였다.
그가 이토록 저자세를 취하는 것도 내공을 잃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죄를 지었으면 벌은 받아야 하니, 반 갑자는 가져가야겠습니다.”
나는 그의 대답을 듣지 않고 바닥에 엎드린 그의 등에 손을 얹었다.
마력 흡수도 매일같이 사용해서 그런지 마력이 흡수되는 속도가 예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반 갑자를 가져왔는데도 남은 내공이 상당하군. 3갑자 이상 있었던 건가.’
그에게서 흡수한 내공은 내 단전에 저장하였다.
물론 반 갑자를 빼앗았다고 반 갑자 전부가 내 몸에 저장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효율이 좋았다면 마력 흡수를 단순히 격체전력 대안으로 사용하지는 않았을 터.
반 갑자는커녕 1년도 흡수하지 못하였다.
티끌만큼 늘어난 것인데, 보름 정도 수련하면 얻게 되는 양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징계하려고 뺏은 거지,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니.
리암 골드버그에게 반 갑자의 내공을 잃은 것은 상당한 손해일 것이리라.
“멕시코 해방 전쟁에 참전하는 것은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물론 동급생들을 협박하여 강제로 참전시키는 행위는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단, 멕시코와의 전쟁 때 미국 정부의 지시에 따르지 말고 내 지시에 따르세요.”
미국이 기어코 전쟁을 결정한 이상, 나도 어느 정도 개입할 필요가 있었다.
리암 골드버그 정도면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내가 사용할 패로 딱 적당할 것이다.
24시간이 지나 다시 미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그 금발 도련님은 어떻게 하셨나요? 버르장머리를 고쳐줬나요?”
“확실하게 훈계하고 왔습니다.”
내 말에 유지은이 싱긋 웃었다.
“사부님. IHA 협회장이 찾아왔습니다.”
마치 내가 돌아올 것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제니퍼가 타이밍을 잘 맞춰서 나를 찾아왔다.
“저야 다친 곳이 없어서 멀쩡해요.”
“다행입니다.”
“대통령과의 대화는 어땠나요?”
“제 이야기를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가요. 미스터 박이 직접 나서도 안 될 줄이야.”
제니퍼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내 발언권이 미국 백악관에 먹힐 거라고 기대했던 모양이다.
“미스터 박. IHA의 협회장이 되어주지 않으실래요?”
“IHA 협회장이 되어달라니, 그게 갑자기 무슨 말씀입니까?”
“미국과 멕시코의 전쟁이 미스터 박의 말씀대로 미국의 패배로 끝이 난다면 그때는 우리가 나서야 하겠죠. 하지만 저는 전 세계의 헌터들을 통솔할 자신이 없어요.”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다.
아마 와이번 습격 사건이 그녀에게 영향을 준 것이 아닐까 싶었다.
아니면 국제 여론을 무시하고 전쟁을 일으키려는 미국 때문일 수도 있었고 말이다.
“지금까지 IHA 협회장으로 잘해오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잘해왔어도, 수만 명의 헌터를 통솔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에요. 그리고 그 헌터들도 저희 말에 따라줄지 의문이고요.”
“그러면 저라고 다를 게 있겠습니까. 전 애초에 비각성자입니다.”
“누가 미스터 박을 단순한 비각성자로 볼까요? 그리고 멕시코 전쟁에 참전할 대부분의 헌터는 미스터 박을 보고 참전한 거예요.”
1만 명에 가까운 러시아 헌터들이나, 수천 명의 한국 헌터들.
그 외에 대만이나 미국에서 참전할 헌터들도 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럴 거면 아예 무공 아카데미와 IHA를 합치는 게 어떨까요?”
옆에서 유지은이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였다.
“IHA와 무공 아카데미를 말입니까?”
“지금도 서로 상부상조하고 있는데, 아예 두 조직을 합치면 더욱더 시너지 효과가 클 거 같아서요.”
“사실 미스터 박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저도 생각해왔던 거예요. 미스터 박이라면 무공 아카데미와 IHA를 누구보다 잘 이끌 거 같다고 말이죠.”
나는 턱 끝을 쓰다듬었다.
IHA와 합치는 게 과연 득일까, 실일까?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려면 IHA만큼 적합한 단체는 없긴 해.’
현재 IHA의 영향력은 그 어느 때보다 막강하였다.
주요 선진국도 선진국이지만, 중진국이나 후진국에 특히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헌터가 정권을 잡은 나라의 경우, 미국과의 외교보다 IHA와의 외교를 더 중시할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내가 IHA를 신경 쓸 때가 맞는지 모르겠군. 안 그래도 개인 수련 시간이 짧아지고 있는데 말이야.’
내가 그 같은 고민을 할 때였다.
제니퍼의 수행원이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제니퍼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협회장님. 백악관 대변인이 지금 멕시코 해방 전쟁에 대해 발표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와 제니퍼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제니퍼는 한눈에 봐도 당황한 표정이었다.
미국에서 멕시코와 전쟁할 것은 예상했지만 이토록 빨리 전쟁을 일으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유지은이 다급히 TV를 켰다.
TV에서는 제니퍼의 수행원이 한 말처럼 백악관 대변인이 멕시코와 전쟁해야 할 이유들을 한창 설파하고 있었다.
사실상 전쟁을 선포한 것과 다름이 없을 정도로 과격한 언어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