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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대신 회귀함-182화 (182/275)

#182화

고문실을 연상케 하는 어두운 지하실에 갑자기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과 함께 한 사내가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서 나타났다.

데미안 디아스는 사내를 보고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저 여상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넬 뿐이었다.

“형제여, 왔습니까.”

사내는 다름 아닌, 여명회의 1사도 매디슨이었다.

“제물은 잘 모으고 있나 보군.”

“형제께서 진행하신 펜테리움 사업이 성공한 덕분입니다.”

여명회는 단순히 돈을 벌고자 펜테리움을 유통한 것이 아니었다.

펜테리움은 여명회의 비전으로 만들어진 약물이었다.

이 약물을 오래 복용하면 복용할수록 이지를 상실하게 되는데, 그렇게 이지를 상실한 헌터는 파롤에게 ‘제물’로 바칠 수도 있었고 신도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아마 펜테리움 사업은 오래 못 갈 거다.”

“협회에서 막으려고 할 거니까.”

“허어, 그거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실 멕시코를 장악할 게 아니라, 협회를 우리 것으로 만드는 것에 집중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게 아쉽군.”

매디슨이 오래전부터 노리던 것이 IHA였다.

전 세계의 헌터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단체.

IHA만 얻는다면 인류를 분열하기도 훨씬 더 쉬웠을 터였다.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일이었습니다.”

데미안 디아스의 그 같은 말에 매디슨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는 사실 지금 시점에 여명회의 전력을 공개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인류 전체와 맞서기에는 아직 힘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성좌, 파롤은 인내심이 적었다.

어떤 미래 비전을 이야기해도 그저 제물을 달라고 강요할 뿐이었다.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겠나?”

“질 수 없는 전쟁입니다. 제가 살아있는 한, 멕시코가 패배를 선언할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니 말입니다.”

영토를 빼앗기고 국민 수백만 명이 죽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멕시코인은 최후의 1인이 남을 때까지 결사적으로 항전할 것이었다.

그들이 애국심이 넘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렇게 세뇌를 당해서였다.

“그 말을 반대로 하면 데미안. 네가 죽으면 전쟁에서 패배할 것이란 뜻이겠지?”

세뇌는 데미안 디아스의 능력이었다.

그가 괜히 사이비 교주 행세를 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능력에는 치명적 단점이 있으니, 그가 죽을 때는 세뇌가 풀린다는 점이었다.

“나이트들이 경호하고 있는데 제가 죽을 거 같습니까?”

“만약 박한새가 너를 노린다면?”

“그 이단자가 저를 왜 노립니까?”

“박한새가 참전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데미안 디아스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미국을 상대로도 호언장담하던 그였지만, 박한새를 상대로는 자신이 없는 모습이었다.

“만약 죽을 거 같으면 최대한의 피해를 안겨주도록.”

매디슨은 예의상 돕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냉정한 말투로 적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안기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동료라면 서운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지만, 데미안 디아스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버지께서 만족하실 만큼 충분한 양의 제물을 바칠 것이니.”

“그러면 나는 박한새를 최대한 막아보도록 하지.”

원하는 답변을 들었기 때문일까.

매디슨은 더 지체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박한새라. 그자를 만약 사도로 영입한다면 어떨까.’

데미안 디아스 앞에서는 절대 하지 못할 생각이었다.

2사도에게 있어 박한새는 한낱 이단자일 뿐이었으니.

하지만 매디슨은 박한새를 영입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보았다.

‘그를 영입하기만 한다면 우리의 대계는 10년은 빨라질 거다. 어쩌면 1년 안에 대계를 이룰 수 있을지도.’

“정말 한새 씨의 말대로 돌아가는 거 같네요.”

유지은이 감탄하는 목소리로 말하자 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 대꾸하였다.

“예정된 결과였습니다.”

“미국이 너무 방심했던 거죠?”

“예. 멕시코의 전력을 너무 과소평가했습니다.”

정확히는 여명회의 힘을 과소평가한 결과였다.

그저 멕시코군만 무력화하면 전쟁에서 이길 것으로 착각했다.

하지만 멕시코의 주 전력은 군대가 아니었다.

2사도에게 세뇌된 수천 명의 멕시코 헌터들이었다.

“미국이 이기려면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성사신교의 교주를 죽이는 것입니다.”

성사신교.

미국에서는 산타 무에르테라고 부르는 종교였다.

여명회의 중국 지부가 적비단이란 폭력 단체를 통해 중국을 넘어 아시아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여명회의 멕시코 지부는 바로 이 종교를 통해 멕시코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성사신교의 지도자가 여명회의 2사도였다.

“만약 성사신교의 교주를 죽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끊임없이 병력을 생산할 겁니다. 미국 헌터들을 세뇌시켜서 말입니다.”

“무서운 능력이네요. 세뇌라니….”

“모든 이들에게 세뇌가 통하는 건 아닙니다. 펜테리움이라는 마약을 장기간 복용한 이들에게만 세뇌가 먹힙니다.”

“한새 씨가 펜테리움이 유통되는 걸 막은 이유가 있었군요.”

“꼭 그게 아니더라도 육체를 나약하게 만들고 사람의 정신을 갉아먹는 마약이 유통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볼 수는 없었습니다.”

내가 그리 말했는데도 그녀는 존경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 한새 씨. 제가 깜빡하고 얘기를 못 했었네요. 전에 한새 씨가 찾아달라고 말씀했던 사람 있죠?”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제가 찾아달라고 했던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닌데….”

“한때 역대급 유망주로 불렸던 이성은이란 사람이요.”

“아! 그자를 찾은 겁니까?”

내가 살짝 흥분한 목소리로 물어보자 그녀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한새 씨. 남자 좋아하는 거 아니라고 하셨죠?”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농이에요. 농. 호호.”

“그래서 이성은이란 자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겁니까?”

“멕시코에 있어요.”

“멕시코?”

“네. 같은 길드의 동료들과 함께 전쟁에 참전했더라고요.”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소식이 안 들려오기에 어느 정도 예상을 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정말 전장으로 갔을 줄이야.

“그들도 공격을 받았습니까?”

“공격받기는 했는데 격전 끝에 승리했다고 하네요.”

“근데 한새 씨. 그 사람이 누구기에 그렇게까지 신경을 쓰는 건가요?”

“어쩌면 차기 총장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네? 차기 총장이요?”

나는 더 설명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앞에서는 입을 조심해야 했다.

자칫하면 회귀자란 사실을 들킬 수도 있으니까.

“총장님, 주한 미국 대사가 찾아왔습니다.”

강충구가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그와 같은 소식을 전해주었다.

“미국 대사가 어쩐 일로 찾아왔을까요?”

“도움을 요청하려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하긴, 지금 상황이라면 그럴 가능성이 높겠네요.”

뭐 자세한 것은 직접 들어보면 될 일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대사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미스터 박, 저는 리처드 워커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저는 커피 타 올게요.”

유지은이 마치 비서처럼 커피를 타왔다.

그러고선 커피를 내려놓는 척하며 은근슬쩍 리처드 워커의 손을 스치고 지나갔다.

“맛있게 드세요.”

윙크하며 물러난 그녀는 전음으로 내게 한 가지 정보를 전해주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미국의 피해가 큰가 봐요. 조금 더 강하게 나가도 될 거 같아요.

좋은 정보였다.

물론 그녀의 정보가 아니더라도 강하게 나갈 생각이었지만.

“멕시코의 상황은 들었습니다.”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그에 대해서 감사 인사를 하고 싶습니다.”

“감사 인사를 말입니까?”

“미스터 박이 저희에게 정보를 넘겨주셨지 않습니까. 그 정보가 정확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으니 미국인으로서 감사 인사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쉽습니다. 피해를 보기 전에 제 조언을 따랐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해리스 대통령도 미스터 박에게 진심으로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내 말을 애써 못 들은 척 다시금 감사 인사를 전하는 주한 미국 대사였다.

“그래서 저를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빙빙 돌려서 말하는 것은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물었다.

“미스터 박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멕시코 헌터들은 그야말로 광신도들입니다. 심지어 몬스터까지 다루는 광신도들이지요. 그런 광신도들의 습격에 미국 헌터들이 큰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저도 들었습니다.”

“리암 골드버그라고 아실 겁니다. 무공 아카데미 소속의 헌터인데, 그가 이끄는 헌터 중대만이 이번 습격에서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그 역시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제 제자 일인데 제가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리암 골드버그 헌터의 활약을 본 장성들은 미스터 박의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예. 미스터 박! 부디 미국을 위해, 세계를 위해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팔짱을 꼈다.

방어적인 자세였다.

그러자 주한 미국 대사가 살짝 다급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스터 박도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산타 무에르테는… 아니, 여명회란 단체는 전 세계를 위협하는 악의 축이라고.”

“제가 분명 그런 경고를 하긴 했었습니다. 물론 미국은 제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그때는 자국민들의 연이은 희생으로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었습니다.”

되지도 않는 변명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에 대해서 더 말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저희 도움을 받는 것보다 시급한 게 있습니다.”

“미군을 멕시코에서 철수시키는 것입니다.”

미국 대사가 눈을 크게 떴다.

“군을 철수시키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까지는 큰 역할을 했을지 모르지만, 앞으로 이어질 미국과 멕시코의 전쟁에서 군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명회는 유격전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노리는 대상은 주로 군인이었다.

아무래도 헌터를 상대하는 것보단 미군을 상대하는 게 훨씬 쉬웠기 때문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전쟁에서 압도적으로 이겼는데 군을 물리라니요!”

“전투에서 몇 번 승리한 거지, 전쟁에서 이긴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군이 멕시코 북부와 중부 일부를 장악한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멕시코에서 일부러 내준 영토입니다. 미군을 깊은 곳까지 끌어들이기 위해서 말입니다.”

여명회는 처음부터 미국을 정면으로 상대할 생각이 없었다.

땅을 내주고 미군을 깊숙한 곳까지 끌어들여 일종의 인질로 만드는 게 그들의 전략이었다.

미군은 시작부터 여명회의 의도에 놀아난 거나 다름이 없었다.

앞으로 멕시코 전역에서 게릴라전이 벌어질 터.

헌터까지 대거 동원된 이 게릴라전에 미군은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물론 멕시코 헌터들도 큰 피해를 입겠지만 크게 의미는 없지. 미국 헌터들로 재충원하면 그만이니.’

미국의 헌터들은 유독 펜테리움 복용자가 많았다.

포로로 붙잡히기만 하면 절반 이상은 적이 되어 돌아오리라.

“미스터 박! 지금 우리의 작전이 실패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결과가 말해주지 않습니까?”

미국 대사는 눈을 부릅떴다.

단호하기 그지없는 내 태도를 보고 기분이 상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무례할 줄이야! 아무리 미스터 박을 중요한 동맹으로 생각했다고 해도 이건 아닙니다!”

“중요한 동맹인데 작전 변경을 요청할 권한도 없는 겁니까?”

“그런 게 있을 리가요!”

“그렇다면 저를 중요한 동맹이 아니라, 유용한 PMC로 취급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제가 참전하는 최소한의 조건은 미군을 철수시키는 것입니다. 이 조건을 들어주면 그때 다시 미국의 제안을 듣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미국 대사는 나를 지긋이 바라보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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