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어떤 약속을 해서라도 미스터 박의 지원을 받아 오라고 했거늘.”
해리스 대통령은 미간을 찌푸렸다.
박한새와의 협상이 파투 나다니.
그야말로 최악의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워커 대사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미스터 박이 지나치게 무리한 요구를 했습니다.”
“맞습니다. 군을 철수하라니. 대놓고 우리와 주도권 경쟁을 하겠다는 말 아닙니까?”
“그런 사람으로 안 봤는데, 아주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백악관 참모들이 리처드 워커 주한 미국 대사를 두둔하는 말들을 하였다.
그들이 보기에도 박한새의 요구는 지나치게 무리하게 느껴졌다.
군을 철수하라는 것은 지금 점령한 영토를 다시 토해내라는 말과 다를 게 없었다.
헌터만으로는 점령지를 유지하는 게 절대 불가능하였으니 말이다.
“미스터 박의 의도가 여러분의 말처럼 정말 그리도 불순하다면 어쩔 수 없긴 하겠군요.”
해리스 대통령은 쓴웃음을 지었다.
믿을 사람 하나 없다더니, 박한새가 딱 그러했다.
위선과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보였었는데 말이다.
“미스터 박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면 지금의 사태를 어떻게 해결하는 게 좋겠습니까?”
멕시코로 진격한 15만이 넘는 미군은 멕시코 전역에서 공격을 받고 있었다.
때로는 헌터 부대가 정면으로 공격을 시도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피난민으로 보이던 멕시코인들이 자폭 테러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하루 평균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할 정도로 상황은 심각하기 그지없었다.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헌터들을 이용해야 합니다.”
“헌터들을 말입니까?”
“예. 헌터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하기만 한다면 전쟁을 금방 끝낼 수 있을 겁니다.”
간단하면서 확실한 해결책이었다.
세계 최강의 헌터 전력을 보유한 국가가 미국이었다.
멕시코의 헌터들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미국 헌터들이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한다면 감당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같은 해결책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어떻게 헌터들을 설득합니까? 이미 헌터들의 불만이 상당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내가 잘못 들은 겁니까?”
헌터들은 군인이 아니었다.
전쟁에 동원할 수는 있어도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강제할 수는 없었다.
그나마 헌터들이 정부의 지시에 따라주는 것은 최소한의 보상이란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멕시코의 던전이라는 보상 말이다.
하지만 그 보상은 그리 대단할 게 없는 수준이었기에 헌터들의 움직임은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전시 상황입니다. 그들도 여론을 의식하는 자들이니, 감히 정부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을 겁니다.”
“…흠.”
해리스 대통령은 오른손으로 턱을 괴며 고민 어린 표정을 지었다.
자유로운 영혼인 헌터를 강제하는 것은 그에게도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아무리 미국에서 헌터의 권력이 다른 나라들보다 덜하다고 해도 그들이 가진 금력과 로비력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후우. 미스터 박의 지원을 받았다면 쉽게 해결됐을 일인데.’
박한새는 8성급 브레이크 사태 때, 무수히 많은 나라를 구해줬었다.
러시아, 대만, 필리핀, 베트남 등등.
이 나라들 말고, 주요 선진국 또한 그의 지원 덕에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박한새와 박한새의 제자들은 그야말로 세계를 구한 것과 다름이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박한새는 이 같은 엄청난 공을 세우고도 특별히 보상을 요구한 적은 없었다.
러시아에서 시베리아 던전 소유권을 받은 일 말고는 다른 나라에선 따로 보상을 챙긴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실 러시아에서 챙긴 보상도 나름대로 명분이란 게 있었다.
러시아가 던전 관리에 실패하니 러시아를 대신해서 맡아준다는 명분이었다.
실제로 박한새가 러시아의 던전들을 맡고 나서 던전 브레이크 같은 사태가 벌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의미 없는 이야기다.’
해리스 대통령은 쓰게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았다.
지금으로선 백악관 참모들이 주장한 해결책 외에는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케라우노스.”
“왜? 셀레나.”
“나는 더 못 버티겠어.”
이성은은 셀레나의 말에 안색을 굳혔다.
“여기까지 와서 도망가겠다는 거야?”
“지금까지 내 손에 죽은 사람이 몇 명인 줄 알아? 오십 명이 넘어.”
“처음에는 보스의 복수를 한다는 생각으로 죄책감을 이겨냈어. 그런데 아까 내가 죽인 헌터들은 솜털도 안 벗은 애송이였더라.”
미성년자 각성자에게 헌터 라이선스를 지급하는 나라는 별로 없었다.
당연히 전쟁에 동원하는 경우는 더더욱 없었고.
노련한 헌터인 셀레나가 연약하게 구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과연 내가 보스의 복수를 하는 게 맞는지도 의문이야. 멕시코 헌터들, 하나같이 제정신이 아니잖아. 광인들밖에 없다고.”
이성은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또한 셀레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이 전쟁은 과연 무엇을 위한 전쟁일까?
‘차라리 8성급 몬스터들과 싸우는 게 낫지. 인간이랑 싸울 바에는.’
페트라 던전을 공략하면서 별의별 몬스터를 다 상대해본 그였다.
그래서 사실 멕시코와의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쉽게 적응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전쟁이 시작되자 그는 전쟁에서 적응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페트라 던전에서 공략한 어떤 몬스터보다 같은 인간을 상대하는 게 더 까다롭게 느껴졌던 것이다.
“제우스 길드 주목!”
한눈에 봐도 강인하게 생긴 여성이 두 사람 앞에 나타났다.
본래 제우스 길드의 제1공대장이었다가 얼마 전 부길드 마스터가 된 엘 크라엘이라는 여성이었다.
“10분 뒤 이동한다. 신속하게 이동 준비하도록!”
“또 이동이라고?”
“아니, 전투가 끝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제우스 길드 소속 헌터들이 불만 어린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제아무리 그들이 헌터라고 해도 강행군을 며칠째 겪었으니 지치지 않을 수 없었다.
“군에서 지원을 요청하였다. 바로 인근에서 멕시코 헌터 부대가 발견되었다고 하니 불만을 품지 말도록!”
그녀의 말에도 여전히 헌터들은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간혹 정부나 대통령을 욕하기도 하였다.
“부길드 마스터.”
“뭐지, 케라우노스?”
“셀레나가 다쳤습니다. 후방으로 이동시켜주십시오.”
이성은이 갑자기 손을 들고 그리 말하자, 엘 크라엘이 차게 식은 눈으로 셀레나의 전신을 훑어봤다.
“다쳤다고? 그러면 내가 치료해주지.”
그녀의 손에서 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은 셀레나에게 이어졌는데, 빛의 영향인지 셀레나의 얼굴색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이제 괜찮나?”
“…괜찮습니다.”
“케라우노스. 너는 아픈 곳 없겠지?”
“예, 없습니다.”
“이번에도 너의 활약을 기대하겠다.”
엘 크라엘이 물러나자 셀레나가 책망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크라엘에게 그런 말을 했어?”
“통할 줄 알았지. 크라엘 공대장이라면.”
“말했잖아. 크라엘도 바뀌었다고.”
“전쟁은 사람의 성격마저 바뀌게 만들어.”
“너도 그래서 바뀐 거야?”
“내가 바뀌었어?”
“웃음이 많았는데, 오늘은 한 번도 안 웃었잖아.”
이성은의 말에 셀레나는 웃음을 짓는 대신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이성은은 뒷머리를 긁적이고는 이동할 준비를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군이 요청한 곳으로 향하는데 도로변 양쪽의 건물에서 무언가 날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스킬이다.’
도심 한복판에서 스킬이 날아올 일이 과연 있겠냐마는, 적어도 멕시코에서는 이게 일상이었다.
“적습이다!”
“방어 준비! 양쪽 건물에 적들이 숨어있다!”
뇌전으로 스킬을 없앤 이성은에게 엘 크라엘이 외쳤다.
“케라우노스! 왼쪽 건물을 공격해!”
엘 크라엘의 지시는 어찌 보면 부당하다고 볼 수 있었다.
지원 병력도 없이 혼자서 수십 명의 적군을 상대하라는 지시였으니까.
하지만 이성은은 ‘Yes sir!’이라고 대답하고는 왼쪽 건물을 향해 도약하였다.
그는 아직 공식적으로는 A랭크 헌터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무력은 웬만한 S랭크 헌터 이상이었다.
페트라 던전의 점유율이 100%를 달성하면서 마치 보상처럼 큰 힘을 얻었던 것이다.
찌지직-!
이성은을 향해 온갖 스킬들이 날아왔다.
근접 딜러와 탱커들은 육체 계열의 스킬들을 믿고 그에게 달려오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심지어 스킬조차도 그의 몸에 닿는 일은 없었다.
그의 몸 주변에서 전류가 흐르는 듯하더니 그를 향해 날아오는 모든 것이 전기에 지져진 것이다.
‘다른 곳의 상황은 어떻지?’
잠깐 여유가 생긴 그는 마력을 넓게 퍼뜨려 반대편 건물의 상황을 확인하였다.
옥상으로 침입한 그와 다르게 건물 입구에서부터 천천히 진압하고 있는 그의 동료들이었다.
미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손꼽히는 제우스 길드답게 헌터 수준은 대단히 높았다.
멕시코 헌터의 수가 훨씬 많았는데도 순조롭게 진압되어 갔다.
‘뭐지? 이 엄청난 마력양은?’
그러던 그때, 이성은은 흠칫 놀랐다.
건물 옥상쯤에 엄청난 존재감을 가진 헌터가 있는 것이 그의 마력에 감지되었기 때문이었다.
‘최소 S랭크급이다!’
이성은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멕시코 헌터의 전력은 절대 얕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런데 S랭크 헌터까지 추가로 개입한다?
이건 제우스 길드의 위기라고 볼 수 있으리라.
“비켜!”
이성은은 다급히 반대편 건물로 날아가려고 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적들이 그걸 가만히 지켜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힘의 차이가 월등한데도 멕시코 헌터들은 악착같이 그를 공격하였다.
죽음도 불사하며 공격하는 적들의 행동에 이성은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빌어먹을! 놈이 움직였다!’
상황은 점점 심각해졌다.
반대편 건물의 S랭크 헌터가 제우스 길드의 헌터들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 명. 두 명.
제우스 길드 소속 헌터들의 존재감이 하나둘 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적의 공격에 당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리라.
‘셀레나!’
셀레나가 위험할 거란 생각에 그는 더 참을 수 없었다.
마력을 폭발시켜 건물 전체를 감전시켰다.
그의 반경 10m 안에 있는 적 헌터들은 그 엄청난 전자력에 몸이 새까맣게 타버렸다.
엄청난 마력을 사용하였기에 S랭크급 실력자인 그도 지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억지로 몸을 움직였다.
친한 동료들의 죽음을 이대로 지켜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
반대편 건물로 날아간 이성은은 순간적으로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셀레나!”
“언제 왔어? 케라우노스.”
“저 사람들은 누구야?”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멕시코 헌터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얼핏 봐도 그 실력이 상당하게 느껴졌다.
이성은이 위협적으로 느꼈던 S랭크 헌터조차 단 한 명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을 정도였다.
“누구긴. 동양에서 무공을 배우고 온 무인들이지.”
무인이란 말에 이성은은 눈을 크게 떴다.
페트라 던전을 완전히 공략한 이후 처음으로 생겨난 퀘스트.
이 퀘스트를 받고 무공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는데 설마 멕시코에서 박한새의 제자들을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하였다.
“당신이 이성은이란 사람인가?”
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따로 있었다.
무인들의 리더로 보이는 젊은 사내가 그에게 말을 건 것이었다.
그것도 한국어로 말이다.
“누굽니까?”
“나? 리암 골드버그.”
이름을 들었지만 여전히 그는 상대가 누군지 몰랐다.
“총장께서 당신을 유심히 지켜보라고 하셨다.”
“총장이라면 박한새 총장을 말하는 겁니까?”
“그래. 그러니 앞으로 나와 함께 움직이자고.”
이성은은 영문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박한새도 나의 존재를 알고 있는 건가?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