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리처드 워커 미국 대사가 다시 찾아와 내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미스터 박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미군은 전멸을 피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제가 말했지 않습니까. 미군을 철수시켜야 한다고.”
“지금 같은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 미군을 철수한다면 국민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여기서 시간을 끈다면 미군의 피해는 더 커질 겁니다.”
“그러니 미스터 박이 도와주십시오. 미스터 박이 돕지 않는다면 미군뿐만이 아니라 무공 아카데미 학생들도 큰 피해를 입게 될 겁니다.”
우리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미국 대사는 정중하게 도움을 요청하면서도 내가 요구한 조건은 전혀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금전적인 보상만 제시할 뿐이었다.
‘그깟 돈이 중요한 게 아님을 이제는 알 텐데….’
내가 괜히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었다.
미군이 철수하지 않고 멕시코 영토에 계속 남아있다면, 미국은 전후에 반드시 멕시코의 영토를 흡수하려 들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인류는 더욱더 분열하게 되리라.
그 외에도 미군은 내게 있어 인질이나 다를 게 없었다.
멕시코에서의 전쟁은 2사도를 잡느냐, 못 잡느냐의 싸움이 될 터.
그런데 미군이 멕시코 영토에 남아있다면 2사도는 내 신경을 분산시키기 위해 미군을 집중적으로 노릴 것이다.
나로서는 사실상 인질이나 마찬가지였다.
“제 조건은 이전과 똑같습니다. 미군을 철수하시면 그때 도와드리겠습니다.”
“…아국으로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입니다.”
“상황이 이보다 최악으로 흘러간다면 그때도 과연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지금보다 최악일 상황이….”
“만약 본토가 침공을 받는다면 어쩌겠습니까.”
“멕시코는 반격을 시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가 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내 발언이 미국을 무시한 것처럼 느껴지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미국이 상대하는 세력은 멕시코가 아니라는 걸 아실 텐데요.”
여명회 상대로는 전쟁 지역과 평화 지역의 구분이 의미가 없었다.
도심 한복판에서도 언제든 대량 학살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이 여명회였으니.
멕시코와의 전쟁도 절대 안심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여명회는 수틀리면 언제든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으니까.
“설령 상대가 미스터 박이 말했던 여명회란 세력이라고 해도 미국 본토가 공격받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미국 혼자서 전쟁을 이어가시면 될 거 같습니다만.”
“미스터 박. 우리는 예의를 갖추었다고 생각했는데, 미스터 박은 왜 예의를 갖추지 않는 겁니까?”
“미국의 지시에 따르는 것을 예의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제 조건을 들어주실 생각이 없으시다면 더 이상의 대화는 의미 없을 겁니다.”
내 축객령에 미국 대사는 결국 불편한 표정을 지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도 상황의 시급함을 모르나 보네요.”
“사부님 말씀처럼 본토가 침공받는다면 그때 달라지겠지요.”
유지은과 강충구가 냉정한 말투로 한마디씩 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이틀 뒤.
“사부님, 지금 바로 TV를 보셔야 할 거 같은데요.”
강충구의 말을 듣고 TV를 틀자, 바로 뉴스가 나왔다.
속보로 나온 뉴스에는 ‘미국, 국회의사당 붕괴!’라는 자극적인 내용이 보도되고 있었다.
“국회의사당이 테러를 당하다니. 이거 일이 커졌는데요?”
“국회의사당뿐만이 아닙니다. 록펠러 센터부터,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샌프란시스코의 트랜스 아메리카 빌딩까지 테러가 발생하였습니다!”
“미국인들이 엄청나게 분노할 거 같습니다.”
“분노하는 정도가 아닐 거 같은데요? 미국을 상징하는 건물들이 날아갔어요. 인명 피해도 상당하고요. 대부분의 미국인은 반드시 복수하기를 원할 거예요.”
“이러다 전쟁이 더 격화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허어, 여기서 더 격화되면 대량 학살이 벌어진다는 것인데….”
여명회의 반격은 회귀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과감하기 그지없었다.
아마 이번에 발생한 테러들은 시작에 불과할 것이다.
2사도를 빠르게 처단하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오늘과 같은 테러가 발생하리라.
‘미국 대통령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가 문제로군.’
지금 미국 대통령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단 두 가지뿐이었다.
국력을 총동원하여 멕시코와 사생결단을 하든가.
아니면 지금이라도 나의 요구를 받아들이든가.
-미스터 박.
발신자 표시 제한의 전화를 받으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해리스 대통령이십니까?”
-맞습니다. 해리스입니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미국 대통령의 전화라.
나는 눈에 이채를 띠며 그에게 말했다.
“해리스 대통령님과 미국 국민들에게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미스터 박의 위로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미국은 늘 그랬듯, 이번에도 위기를 이겨낼 것입니다.”
-이번의 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미국에게, 아니 전 인류에게 큰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여명회는 그만큼 인류에 위협적인 세력입니다.”
-미스터 박의 경고를 흘려들은 점, 다시 한번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사과받을 일은 아닌 거 같습니다.”
“예. 말씀하십시오.”
-미스터 박의 요구대로 미군을 멕시코에서 철수하겠습니다.
-어려운 결정이었습니다. 사실 백악관 참모들은 지금도 반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저는 느꼈습니다. 여명회란 세력은 미국 혼자서 상대할 수 있는 세력이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 이성을 차린 듯싶었다.
이미 늦었다면 늦었다고 볼 수 있는 시기였지만 말이다.
-그러니 미스터 박이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미스터 박이 아니라면 그들을 막을 수 없을 겁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미스터 박의 희생정신은 오랫동안 귀감이 될 것입니다.
“대신, 미국 헌터들은 IHA의 지시를 절대적으로 따라줬으면 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해리스 대통령은 내 요구를 순순히 들어주었다.
다른 의도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여명회의 예상치 못한 반격에 경악하는 분위기였다.
‘미국을 상징하는 건물들이 저리 되었으니 정신이 번쩍 들 수밖에 없겠지.’
뭐가 됐건, 미국 대통령이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본토가 역으로 공격받는 상황이 되자 미군은 큰 혼란에 빠졌다.
“사령관님. 우리 군은 이대로 지역 사수를 해야 하는 겁니까?”
“…곧 명령이 내려질 것이다.”
“진군해야 한다면 신속히 진군해야 합니다. 지체하면 적군의 병력은 다시 원래대로 복구될 겁니다.”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다.”
철군이냐. 진군이냐.
미군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그 와중에 멕시코군은 일반 국민을 징집하고 있었는데, 그 규모가 수십만이었다.
제대로 된 군사 교육을 받지 못한 군인들이었지만, 그들은 광신도 그 자체였다.
목숨을 잃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는 광신도는 미군조차 상대하기 쉽지 않았다.
여기서 시간을 더 주게 된다면 미군도 상당한 피해를 각오해야 할 것이다.
“철군 명령이 떨어졌다.”
“진군이 아니라 철군입니까?”
“앞으로의 전쟁은 우리가 아닌, 헌터들이 맡게 될 것이다.”
장성들은 어떠한 불만도 제기하지 않았다.
만약 전쟁 초기에 이와 같은 명령을 받았으면 항명도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군을 믿지 못한다는 말이나 다름없었으니.
하지만 멕시코와의 전쟁, 아니 여명회와의 전쟁을 겪으며 장성들은 깨달았다.
헌터들의 도움 없이는 이 전쟁을 끝낼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서둘러 철군 준비를 하도록. 우리 군은 본토로 귀환하여 본토를 사수할 것이다.”
그렇게 20만의 미군은 다시 본토로 돌아갈 준비를 하였다.
얻은 거 하나 없는 원정이 된 셈이었다.
하지만 철군을 준비하는 미군 병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라도 돌아가서 다행이다.”
“이 전쟁은 미친 전쟁이야! 차라리 중동이 나을 거 같다니까?”
“죽여도 죽여도 계속 나오는 바퀴벌레 같은 놈들 같으니!”
“바퀴벌레라…. 하, 하. 너무 많이 죽여서 이제는 인간이 벌레처럼 느껴지긴 해.”
전쟁을 시작하자마자 멕시코군을 반쯤 무력화시켰던 미군이었다.
그때 대부분의 미군은 승리를 기정사실화하였다.
그런데 무력화되었다고 생각했던 멕시코군은 여기저기서 끊임없이 튀어나왔다.
군인이 아닌 민간인들도 민병대를 조직하여 멕시코 전 영토에서 유격전을 벌였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헌터까지 난입하여 마구잡이로 공격하니 미군은 체력도 정신력도 빠르게 소모될 수밖에 없었다.
“비상! 비상! 헌터들이 진지 내부로 침투했다!”
“제우스 길드에게 지원 요청해! 우리만으로 막을 수 없다!”
사기를 잃은 미군이 철군하려는 것을 여명회는 가만히 지켜보지 않았다.
그동안 보여주었던 공격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더욱더 강력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헌터들까지 대거 동원된 그들의 공격에 미군은 무더기로 죽어갔다.
“쉽게 도망치지 못할 거다. 하하하하!”
데미안 디아스는 광소를 터뜨렸다.
멕시코의 수도 근처까지 남하하였던 미군은 사방으로 포위된 채 꼼작도 못 하고 있었다.
뒤늦게 철군을 하려고 하였지만 이미 그들은 너무 깊은 곳까지 와버린 상태였다.
물론 미국 헌터들의 지원도 크게 의미는 없었다.
오히려 미국 헌터들의 무의미한 희생만 커져갈 뿐이었다.
‘아버지시여! 제가 수십, 수백만 명의 제물을 바치겠나이다!’
데미안 디아스는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의 신, 파롤이 격하게 기뻐하는 모습이 말이다.
“하하하! 이단자들아. 전쟁은 이제부터가 진짜다!”
멕시코에서 끝날 전쟁이 아니었다.
멕시코의 미군을 전부 제거하면 그 뒤에는 미국 본토를 직접 노리리라.
미국을 함락시킨다면 남미를 함락시키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물론 남아메리카는 그녀의 허락을 받아야겠지만 말이야.’
남미는 10사도 크루엘라의 것.
딱히 영토나 사람을 다스리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 그녀였지만, 그녀의 영역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데미안 디아스라고 해도 그녀의 ‘영양’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니 남미를 노릴 거라면 그녀의 허락은 반드시 받아야만 했다.
물론 지금은 남미를 노릴 게 아니라, 미국부터 정리해야겠지만 말이다.
“잘해주고 있군.”
“형제여. 하하하, 제 활약을 지켜보셨습니까?”
“늘 지켜보고 있다.”
1사도, 매디슨의 말에 데미안 디아스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다른 사도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그는 내심 매디슨을 12사도의 리더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인정을 받고 있었으니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박한새. 그자가 움직이려고 하더군. 이미 미국 정부와 이야기도 끝낸 모양이야.”
데미안 디아스는 혀를 찼다.
모든 게 계획대로 돌아가는 이 상황에, 박한새의 등장은 변수 중의 변수였다.
“일단 설득을 시도해볼 테지만, 힘들 수 있다. 그자는 이 세계에 미련이 많은 자처럼 느껴지니 말이야.”
“이단자답게 아둔하기 짝이 없습니다. 거짓된 세계에 미련을 가지다니.”
“이 세계에 미련이 많다면 이 세계의 것으로 그의 욕구를 채워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이를테면,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넘기는 것으로 말이야.”
실로 엄청난 이야기였다.
이미 세계를 정복하기라도 한 것처럼 영토의 지배권을 정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가진 힘을 생각하면 과장이라고만 볼 수는 없었다.
“이런데도 실패한다면 어쩔 수 없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박한새를 죽이는 수밖에.”
“이번이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기회라고?”
“그 이단자가 만약 자만에 취해 소수 인원만 끌고 온다면 이곳 멕시코에서 그자를 죽이는 겁니다.”
“러시아에서만 만 명에 가까운 헌터가 올 것인데?”
“충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크루엘라도 저를 돕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데미안 디아스의 말에 매디슨은 눈에 이채를 띠었다.
‘박한새가 데려올 헌터는 많아 봐야 1만 5천 명 정도겠지? 그 정도라면 확실히 박한새를 죽이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