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DX 길드가 무너질 때, 여명회의 한국 지부도 사실상 궤멸이나 다를 게 없는 처지가 되었다.
중국 지부가 적비단을 내세워 힘을 키웠고 멕시코 지부가 성사신교를 내세워 힘을 키웠듯, 한국 지부 역시도 DX 길드를 내세워 힘을 키웠었다.
그런데 DX 길드가 완전히 박살이 나면서 여명회의 한국 지부도 사실상 궤멸 직전에 놓였다.
하지만 여명회 신도들의 생존력은 바퀴벌레처럼 끈질겼다.
박한새의 집요한 추적에도 그들은 끝내 살아남았다.
“모두 모였나?”
“예, 상급 신도 8인. 전부 모였습니다.”
강원도에 위치한 던전에 수상한 로브를 입은 자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주변을 살피며 한 명씩 조심스럽게 던전 안으로 들어간 그들은 던전 내부의 은밀한 공간에서 만났다.
최상급 신도는 상급 신도가 전부 모이자 상부의 지시를 이야기하였다.
“1사도께서 명령을 내리셨다.”
본래 한국 지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것은 7사도였다.
한국의 이웃 국가인, 중국을 담당하는 것이 7사도, 창웨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7사도는 현재 한국 지부를 운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한국 지부는 1사도의 손에 넘어오게 되었다.
“박한새, 그자가 엉뚱한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들라고 하더군.”
“미국에서 했던 것처럼 하면 되겠습니까?”
모임의 주최자이자 한국 지부를 총괄하는 최상급 신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참고로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란 국회의사당 같은 주요 건물에 폭탄 테러를 저지른 일을 말하였다.
“무공 아카데미는 반드시 노려야 할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은 무엇일까?
청와대, 국회의사당, 63빌딩, 인천공항 등등.
여러 건물이 물망에 오를 것이다.
하지만 외국인 기준으로 한국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무공 아카데미였다.
사실상 지금의 한국을 상징하는 거나 마찬가지인 건물.
무엇보다 무공 아카데미는 박한새의 역린과도 같은 곳이었다.
이곳을 노린다면 박한새가 미국을 돕는 거 같은 엉뚱한 행동을 하지 못할 것이리라.
“쥐새끼들이 여기 다 모여있었군. 근데 뭐? 무공 아카데미를 노리겠다고?”
낯선 목소리에 여명회 신도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 당신은? 충왕, 정승호?”
“나를 알아보니 영광이야. 물론 내가 좋아하는 별명은 아니지만.”
“어떻게 여기를 알아냈지?”
“예전에 알아낸 곳이었어. 네놈들을 처음 추격했을 때 말이지.”
“설마 우리가 한곳에 모이는 순간을 기다린 것인가!”
“놔두면 또 어디서 알을 칠 텐데 한자리에 있을 때 전부 제거해야 하지 않겠어?”
“…쉽게 죽어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의 계급이 괜히 상급 신도와 최상급 신도인 게 아니었다.
무공 아카데미를 노리려고 했던 것도 그만한 실력이 있기 때문이었던 것.
“빌어먹을! 벌레가 너무 많습니다!”
“정승호를 노려! 벌레는 잡아봤자 의미가 없다!”
“너무 빠릅니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원래부터 S랭크급 강자였고 무공을 1년 넘게 익혀 초일류 수준의 강자가 된 정승호를 이길 수는 없었다.
정승호에게서 한국에 있는 파롤의 졸개를 전부 제거했다는 소식을 듣자 나는 환한 표정으로 그를 칭찬하였다.
“수고하셨습니다. 덕분에 한국을 향한 테러 시도를 완전히 봉쇄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자네가 시킨 대로 한 것뿐이야. 그런데 자네, 어떻게 알았나?”
“파롤의 졸개들이 할 만한 수작은 뻔했습니다.”
“미국도 읽지 못한 수를 자네는 다 읽고 있다는 뜻이군.”
“미국은 아직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적을 잘 모르니까요.”
“반면 자네는 일부러 함정까지 파고서 놈들이 모이기만을 기다렸고 말이지.”
정승호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였다.
함정을 팠다는 말은 조금 과장한 표현이었다.
나는 그저 놈들의 은신처를 몰래 감시하고 있었을 뿐이니까.
‘뭐, 놈들의 은신처를 일부러 없애지 않았으니 함정이라면 함정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말이야.’
어쨌거나 이번 습격으로 여명회의 한국 지부는 다시금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을 게 분명하였다.
“하지만 이걸로 안심할 수 없습니다. 놈들은 바퀴벌레와도 같은 자들입니다. 다시 한국으로 들어와 새로운 시도를 할 것입니다.”
“자네가 있는 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 같은데?”
“문제는 제가 곧 멕시코로 떠난다는 점입니다.”
“정승호 길드장님께서 한국을 맡아주십시오. 길드장님이라면 놈들의 시도를 원천 봉쇄할 수 있을 겁니다.”
“나를 믿나?”
“길드장님이 아니라면 누구를 믿겠습니까.”
내 말에 그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 정소연이 나타나 내 이름을 불렀다.
“정소연 헌터. 오랜만입니다.”
“또 외국에 나가신다고 들었어요.”
“멕시코에 갑니다.”
“저도 같이 갈 수 있을까요?”
“…협회에서 신청을 받고 있기는 한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정소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나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과 사람의 전쟁입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정소연 헌터를 죽이려고 달려들 겁니다.”
헌터들이 강심장인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강심장이라고 해도 사람의 피를 보는데 정신적인 타격을 받지 않을 순 없었다.
“맞다. 호연이도 가는데 너까지 굳이 갈 필요는 없어.”
“삼촌, 저는 갈 거예요. 꼭 보내주세요. 그리고 한새 씨. 비록 무공 아카데미 출신은 아니지만, 저 역시 무인이에요. 적이 몬스터가 아닌, 같은 사람이라 해도 두렵지 않아요.”
그녀의 강인한 눈빛을 보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정승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길드의 에이스란 것들이 전부 멕시코로 가버리게 생겼군.”
“그만큼 정승호 길드장님이 열심히 현장에서 뛰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쯧, 자네만 아니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네.”
정소연이 버럭 소리를 지르다 이내 나를 보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타인 앞에서 소리를 지른 게 부끄러웠던 모양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둘이 오랜만에 본 거 같은데, 식사라도 하는 게 어때?”
그 말을 듣고 나는 정소연에게 물었다.
“식사하셨습니까?”
“식전이에요.”
“근처에 맛있는 파스타 가게가 있는데 같이 가시겠습니까?”
많이 배고팠는지 그녀가 밝은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그렇게 그녀와 함께 근처 파스타 가게로 향하였다.
“한새 씨, 바깥에서 뵙는 건 오랜만이네요?”
“유지은 교수, 여기는 어쩐 일입니까?”
“저는 백화점 좀 가려고요. 한새 씨는 혹시 데이트?”
“유지은 교수도 아시겠지만, 이분은 화영 길드의 정소연 팀장님입니다.”
길가에서 마주친 유지은에게 정소연을 소개해주었다.
“네, 알아요. 그 유명한 얼음 마녀를 누가 모르겠어요?”
순간, 정소연이 몸을 움찔하였다.
눈앞에서 얼음 마녀란 유치한 별명을 듣게 되었으니 꽤 타격이 컸을 거 같았다.
“유지은 교수도 식사를 하지 않았다면….”
“오늘은 방해하고 싶지 않네요. 오늘은 말이죠.”
유지은은 웃는 얼굴로 그리 말하고는 이내 손을 흔들었다.
“멕시코에서는 저랑만 식사하셔야 해요. 알았죠?”
“상황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치, 저는 이만 가볼 테니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그렇게 유지은이 물러나자 나는 다시 파스타 가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까 그분과는 어떤 관계신가요?”
파스타가 나오길 기다리는데 정소연이 갑자기 그런 질문을 던졌다.
“교수와 학교 총장의 관계입니다. 조금 더 사적으로 가자면… 스승과 제자 사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저와 비슷하네요.”
비슷하다면 비슷하고 다르다면 다를 것이다.
정소연은 어쨌든 무공 아카데미 교수는 아니었으니까.
물론 초빙교수처럼 가끔 강의하러 오기도 했지만 말이다.
“연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연애, 말씀입니까?”
내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누구의 전화인가 했더니, 제니퍼의 전화였다.
“잠시 전화 좀 받아도 되겠습니까?”
“네. 저는 괜찮아요.”
“죄송합니다. 급한 전화라서.”
고개를 돌린 채 전화를 받으니 제니퍼의 명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미스터 박, 좋은 소식이 있어서 연락드렸어요.
“좋은 소식이라면?”
-IHA 이사들의 지지를 받아냈어요. 아마 곧 언론에 보도가 나올 거예요. 미스터 박이 IHA 전체의 지지를 받아 IHA 회장으로 추대되었다고 말이에요.
국제 헌터 협회의 회장 자리는 내가 되고 싶다고 해서 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당연히 내부의 지지를 받아야 했고 공식적으로 선거도 치러야 했다.
하지만 이미 협회 이사들은 물론이고 가장 강력한 경쟁자여야 할 제니퍼의 지지까지 받았으니 회장이 되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제가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미스터 박보다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아무튼, 기쁜 소식을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지금 식사를 하고 있어서 나중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멕시코에 오시면 제가 찾아갈게요.
제니퍼와의 통화가 끝나자 정소연이 궁금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IHA 회장의 전화였습니다.”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한새 씨가 IHA 회장으로 추대된다는 거 같은데, 맞나요?”
곧 언론에 보도가 나올 텐데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하니 그녀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새 씨는 헌터가 아닌데 IHA 회장이 되는 게 가능한가요?”
“저도 그게 걱정이긴 한데, 곧 무인들도 헌터 라이선스를 발급받을 수 있게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을 거 같습니다.”
제니퍼 덕분에 IHA의 변화는 꽤 빠른 편이었다.
이젠 헌터 출신이 아니어도 헌터 수준의 무력을 가졌다면 헌터 라이선스를 취득할 수 있게 제도를 바꾸고 있을 정도였다.
“IHA 회장이라니. 상상도 못 했어요.”
“저도 그렇습니다.”
“실례가 아니라면 IHA 회장이 되려는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무인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려면 무공 아카데미 총장이란 신분만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할 거 같았습니다.”
무공의 창시자란 명분만으로 무인들을 통솔할 순 없었다.
하지만 IHA 즉, 국제 헌터 협회의 수장이 된다면?
명분은 물론이고, 헌터들을 지휘할 수 있는 실질적인 권한을 얻게 된다.
‘군대는 양성했으니 이제 그 군대를 올바른 곳에 활용할 때지.’
준비는 모두 끝났다.
이제 헌터들을 이끌고 멕시코로 향하는 일만 남았다.
멕시코로 향하는 비행기 안.
우리는 한참 회의를 거듭하고 있었다.
“아직 2사도의 위치는 파악하지 못한 상태입니까?”
“죄송해요. 세이서 길드의 정보력을 총동원하였는데도 2사도의 위치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네요.”
“미국 정부에서도 2사도의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 파악을 못 한 듯싶습니다.”
예상한 결과였다.
5사도가 그랬던 것처럼 2사도 역시 무력이 강한 타입은 아니었다.
무력보다는 지도력, 정확히 말하면 ‘세뇌’를 주로 활용하는 스타일이었다.
모습을 아예 감추고 있는 다른 사도들만큼, 정보를 얻는 게 쉽지 않았다.
차라리 남미 어딘가에 있을 10사도를 찾는 게 훨씬 빠를 것이리라.
‘물론 10사도는 찾아도 크게 의미는 없겠지만.’
쓴웃음을 짓고는 교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멕시코에 도착하면 앞서 계획했던 대로 던전 중심으로 공략할 것입니다.”
“남부도 예외는 아니라고 하셨죠?”
“예. 남부를 넘어 과테말라의 던전까지 공략해야 합니다.”
던전은 여명회 간부들의 은신처이면서 그와 동시에 힘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었다.
미국은 쓸데없이 멕시코군과 멕시코 헌터들을 상대하느라 시간과 인적 자원을 소모하였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내 목표는 처음부터 던전이었다.
헌터를 많이 데려온 것도 멕시코의 모든 던전을 동시에 공략하기 위함이었다.
‘2사도는 무조건 던전 속에 숨어있을 거다. 던전을 공략하여 놈을 잡고 10사도까지 막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