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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대신 회귀함-191화 (191/275)

#191화

“지금쯤 미국 정부는 애가 타 있을 거 같네요.”

“한새 씨가 거미 괴물을 방치하고 있잖아요.”

“저에 대한 미국인들의 여론도 안 좋아졌다고 들었습니다.”

“좋지는 않죠. 사람들은 한새 씨의 작전을 모르니까요.”

유지은의 말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거미 괴물, 크루엘라와의 전투를 피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작전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내가 비겁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을 거 같았다.

비록 인명 피해는 없지만, 거미 괴물이 도시와 각종 기간시설, 유적지 등을 파괴하는 동안 계속 방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한새 씨의 작전이 옳았던 건 틀림없는 거 같아요. 거미 괴물의 움직이는 속도가 계속 줄어들고 있는 걸 보면 말이죠.”

“며칠 정도 기다려서 체력을 더 빼둬야 할 겁니다.”

“그 정도로 강한가요? 거미 괴물이?”

나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나도 직접 크루엘라를 상대해본 경험은 없었다.

이성은이 미리 처리했었으니까.

하지만 간접적으로 듣는 것만으로도 대충 예상이 갔다.

지금의 나도 감히 승리를 자신할 수 없는 상대란 사실을 말이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미스터 박, 접니다. 해리스.

미국 대통령의 전화였다.

“어쩐 일로 전화를 주셨습니까?”

나는 평온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누군가에게는 미국 대통령과 통화하는 것이 대단한 영광일 수 있으나 나에게는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사과를 드리고 싶습니다.

“사과라면?”

-CIA가 미스터 박에게 무례를 저질렀다고 들었습니다.

미국 대통령의 사과라.

이건 나로서도 꽤 특별한 일이었다.

“대통령께서 주도하신 일이 아니란 사실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다행이군요. 저는 혹시 미스터 박이 오해하고 계실까 걱정했었습니다.

“그 말씀을 하시려고 전화를 주신 겁니까?”

-맥콘 국장을 곧 해임할 예정입니다.

“저 때문에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닙니다. 미스터 박을 상대로 무례를 저지른 인사입니다. 심지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저희에게 서운한 감정이 남아있다면 이 일로 조금 풀어졌으면 좋겠습니다.

크루엘라가 두렵긴 했나 보다.

CIA 국장까지 해임 처리 하며 내게 사과하는 것을 보면.

하기야, 핵도 통하지 않는 괴물인데 두렵지 않을 수는 없었다.

심지어 미국 본토를 향해 진격하고 있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데 미스터 박, 이런 말씀 드리기 조심스럽지만…, 그 북쪽으로 올라오고 있는 거미 몬스터 있지 않습니까?

마침 해리스 대통령이 크루엘라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 몬스터에 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거 같습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은?

“이번 주 안에 그 몬스터와 결판을 낼 겁니다.”

-저, 정말입니까?

“북아메리카를 위협하는 것은 물론이고, 인류 전체를 위협하는 몬스터인데 가만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역시 미스터 박은 히어로 중의 히어로입니다!

해리스 대통령은 마침내 걱정이 해소되었는지 한층 밝아진 목소리로 나를 극찬하였다.

-혹시 저희 미국이 도울 일은 없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이미 준비는 다 끝났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미스터 박만 믿고 좋은 결과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통화가 끝나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과연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을지, 이번만큼은 나도 확신이 안 서는군.’

개미 군단을 상대할 때도, 리치가 이끄는 언데드 군대를 상대할 때도.

늘 자신감이 넘쳤던 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자신이 없었다.

그만큼 크루엘라는 무시무시한 상대였다.

‘내가 만약 경지를 올렸다면….’

화경 고수.

아니, 초절정 고수만 되었어도 확신이 생겼을 거 같았다.

크루엘라를 혼자서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하지만 지금의 나는 회귀 전의 경지와 비교하면 큰 차이가 없었다.

여전히 나는 절정 고수에 불과했던 것이다.

[카펠라의 권속, ‘이성은’이 단전을 만들었습니다. 수련 효과 x200 상승권.]

갑자기 떠오른 퀘스트 알람음을 듣고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벌써 단전을 만들었다고?’

회귀자 이성은.

나는 마침내 멕시코에서 그를 만났다.

1년 6개월 만의 만남이었다.

하지만 그를 만났을 때, 반가운 마음은 생각했던 것만큼 크지 않았다.

사실 반가운 마음보다는 씁쓸함이 컸었다.

나는 그를 기억하지만, 그는 나를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런 경험을 한두 번 겪었던 것은 아니었다.

주현근을 봤을 때도, 안능희나 강충구 같은 이를 봤을 때도 똑같이 경험하였었다.

하지만 이성은은 나와 같은 ‘회귀자’ 출신이어서 그런지 더 씁쓸한 기분을 느꼈었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성은이 회귀자로서 나를 기억하고 있기를 은연중에 바랐던 모양이었다.

예상대로 이성은은 회귀자가 아니었다.

다만, 회귀 전의 배후령과 똑같은 배후령을 두었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를 만난 순간, 퀘스트가 떠오르더니 그가 ‘카펠라의 권속, 이성은’이라는 사실을 알려줬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수련 효과 상승권, 이것만 잘 사용하면 초절정 고수가 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수련 효과 상승권.

이성은을 만나고 처음으로 얻게 된 퀘스트 보상이었다.

아이템 효과는 간단하였다.

단 1회에 한해 24시간 동안 수련의 효과를 적혀있는 배수만큼 상승시켜주는 것이었다.

즉, ‘수련 효과 x200 상승권’을 사용할 경우, 단 하루의 수련이 200일 동안 수련한 것과 비슷한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한새 씨? 무슨 생각을 그리 하세요? 해리스 대통령이 무슨 안 좋은 이야기라도 한 건가요?”

“아닙니다. 잠시 거미 괴물에 대해 생각 좀 해봤습니다.”

나는 유지은에게 그리 말하고는 이성은이 있을 장소로 향하였다.

“사부!”

내가 올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이성은이 나를 향해 달려왔다.

“사부가 시키신 대로, 단전을 만들었습니다.”

“퀘스트를 완료해서 보상도 받았는데, 확실히 체감이 되는 거 같습니다.”

나만 퀘스트를 받는 것이 아니었다.

이성은 역시도 퀘스트를 받았는데, 그의 보상은 나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이번에는 200일이냐?”

“어떻게 아셨어요?”

“딱 그 정도 수련한 것처럼 느껴지니까.”

나의 경우 아이템을 지급하여 내가 직접 그 아이템을 사용해야 하는 형식이라면 그의 경우는 보상을 수령하는 즉시, 수련 효과가 적용되는 방식이었다.

즉, 그는 퀘스트를 깨자마자 200일 동안 무공을 수련한 효과를 적용받았다.

“몸이 엄청 단단해졌습니다. 내공 보유량도 훨씬 더 많아졌고요.”

“내공량만 보면 5갑자 이상일 거 같은데?”

“저야 자세히는 몰라도 교수들만큼 보유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무공을 이틀 수련해서 그 정도면 정말 엄청난 거다.”

엄청난 정도가 아니다.

경지로 따지면 삼류에도 못 미쳤던 무인이 이틀 만에 일류 이상의 경지가 된 셈이니.

“한번 보법을 펼쳐 볼래?”

그에게 보법을 시켜보았다.

무공을 배운 지 이틀 차인 그에게 보법을 시키는 것은 터무니없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성은, 그만큼은 예외였다.

처음에는 살짝 어색해하더니, 곧 능숙하게 보법을 펼쳐내는 이성은이었다.

‘저 정도 수준이면 허공답보도 금방 해내겠는데?’

정말 무시무시한 수준이었다.

퀘스트를 두 번 깨서 이 정도 수준의 무인이 되다니.

만약 다른 교수들이나 조교들이 그의 수준을 보면 허탈함을 느끼지 않을까 싶다.

‘이성은을 조금 더 빨리 찾았어야 했나?’

잠시 그런 생각을 해봤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성은이 이 정도의 성장력을 보여줄 수 있었던 이유는 이성은이 그동안 집요하게 던전을 공략해온 덕분일 것이다.

그가 던전을 공략하지 않았다면 그의 성좌도 힘을 되찾지 못했으리라.

“다음 퀘스트는 뭐야?”

“모르겠습니다. 아직 안 떠가지고.”

“안 떴어? 지금까지는 바로바로 떴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봤자 겨우 두 개 떴었습니다. 사부에게 무공을 배우는 것과 단전을 만드는 것.”

“어쩌면 그 두 개가 끝일지도 모르겠군.”

하긴, 수련 효과를 수백 배나 증가시키는 그런 종류의 아이템을 쉽게 뿌릴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이런 보상을 매일 챙겼다면 회귀 전의 이성은은 히드라의 독 따위에 죽지 않을 몸, 만독불침을 완성하지 않았을까?

뭐 사실 이성은을 두 번이나 회귀시킨 것만으로도 카펠라라는 성좌의 힘은 파롤과도 비견되게 느껴졌지만 말이다.

권속이 아닌 나까지 회귀시키기도 했고.

갑작스럽게 퀘스트가 발생하자 나는 바로 내용을 읽어보았다.

하지만 퀘스트 내용을 읽던 나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사부, 퀘스트 떴습니다!”

“…무슨 퀘스트지?”

“조금 이상한 퀘스트입니다. 사부가 나즐라라는 여인에게 무공을 가르치게끔 설득하라는 퀘스트입니다.”

“하필 나즐라를….”

“사부가 아는 사람입니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입술만 질끈 깨물었다.

‘카펠라. 도대체 뭐 하자는 겁니까. 하필 그녀에게 무공을 가르치라는 퀘스트를 주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퀘스트였다.

정소연, 김수민, 이성은 등등.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무공을 가르치라는 퀘스트가 떴을 때 나는 다 이해했었다.

김수민 같은 경우는 훗날 빌런이 되기는 했지만, 심성 자체는 선하였다.

이성은이나 정소연의 심성이야 말할 것도 없었고.

반면 나즐라라는 여인은?

오랜 연인이었던 나를 배신하고, 인류까지 배신한 여인이었다.

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카펠라의 의도를 파헤치고 있을 때, 주현근이 내게 다급히 달려왔다.

“엘치촌 던전을 관리하던 야마구치 스토무가 전하기를, 튀르키예의 한 길드가 엘치촌 던전 내부로 진입했다고 합니다.”

“튀르키예? 설마 레이한이라는 이름의 길드인가?”

“어떻게 아셨습니까? 맞습니다. 나즐라라는 여인이 길드 마스터로 있는 레이한 길드가 저희의 통제를 거부하고 엘치촌 던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주현근이 전해준 소식을 들은 나는 인상을 와락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엘치촌 던전의 심장부.

던전 보스인 자이언트 골렘이 수문장으로서 수호하고 있는 석성 내부에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실질적인 엘치촌 던전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여명회의 간부들이었다.

“크루엘라 형제는 어디까지 왔지?”

“오악사카주를 지나고 있다고 합니다.”

“얼마 남지 않았군.”

여명회의 2사도, 데미안 디아스는 희소식을 들었음에도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이단자 놈이 가만히 있는 이유가 수상하단 말이지.’

그는 멕시코로 오자마자 전광석화처럼 움직여 데미안 디아스의 팔다리를 자르고 사실상 엘치촌 던전에 감금시켰다.

사이비 교주로서 멕시코 전역을 지배하다시피 했던 데미안 디아스의 영향력은 순식간에 거품처럼 사라졌다.

만약 박한새가 그의 목숨까지 노렸다면 이미 데미안 디아스는 그의 성좌인 파롤의 곁으로 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박한새는 멕시코시티 근처에 틀어박힌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신도들의 말처럼 크루엘라 형제를 두려워해서 그러는 거라면 나쁘지 않은 일이긴 한데….’

크루엘라의 무력을 생각하면 박한새가 크루엘라를 두려워하는 것도 이상할 게 없긴 했다.

그런데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하고 넘어가기에는 박한새의 행보가 마음에 걸렸다.

만약 크루엘라가 두려워서 데미안 디아스를 내버려 두는 것이라면 진즉에 멕시코를 떠나야 했지 않았을까?

하지만 박한새는 오히려 본격적인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설마 그 이단자 놈이, 이 몸을 인질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데미안 디아스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갑자기 폭음이 들렸다.

그르륵, 그르륵.

그와 동시에 골렘이 움직이는 소리도 들렸는데, 데미안 디아스는 직감하였다.

적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당신인가요? 파롤이라는 잡신을 따르는 파롤의 졸개가?”

처음 보는 여성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적대감을 강하게 표출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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