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허억. 허억.”
“도대체 언제까지…!”
평소의 교수들은 지칠 일이 거의 없었다.
단전에 내공이 넘쳐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교수들의 모습은 비에 흠뻑 젖은 생쥐처럼 땀에 절어있었다.
크루엘라와의 전투가 그만큼 오랜 시간 동안 이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진짜 끝이다.’
나는 크루엘라의 몇 개 안 남은 눈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교수들과 달리 내 내공과 체력은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상황.
남은 내공으로 최후의 일격을 날려야 할 때였다.
“박한새!!!!”
자신의 최후를 직감한 것일까?
크루엘라가 처절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짖었다.
“왜 부르지?”
“너는 기필코 내 손으로 죽일 것이다!”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검기를 가득 머금은 검으로 그녀의 눈을 겨루었다.
오랜 전투 경험으로 확신하건대, 크루엘라는 이 공격을 막을 수 없었다.
아니, 막지 못하는 수준이 아니라, 이 공격이 최후의 일격이 될 것이었다.
“이 육체의 죽음이 내 진짜 죽음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이 육체는 어디까지나 나의 분신일 뿐이다!”
꽤 무서운 경고였다.
인류가 대적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게 느껴졌던 그녀가 일개 ‘분신’일 뿐이라니.
교수들도 이 일의 심각성을 느꼈는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게 분신이라고?”
“말도 안 돼. 분신이 저 정도면 본체는 얼마나 강하다는 거야?”
“…진짜 인류가 멸망해도 이상할 게 없겠는데요?”
하지만 나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거미 괴물이라는 육체가 분신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봤자 너의 본체는 극히 미미한 힘만 가지고 있을 텐데? 3성급 몬스터 수준의 힘을 말이야.”
“네, 네놈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아는 거야!”
크루엘라가 기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물론 대답할 이유가 없는 질문이었다.
“네가 다시 지금의 힘을 되찾으려면 적어도 몇 년은 걸리겠지. 그 몇 년 동안 우리는 더 강해질 것이다. 9성급 던전 보스도 두렵지 않을 정도로.”
그녀가 완전한 죽음을 맞이하는 게 아니라는 걸 나는 오히려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교수들은 아마 오늘의 전투로 느낀 것이 많을 것이다.
절정 고수의 경지에 오른 그들도 대적하기 어려운 수준의 무력을 가진 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위기감 때문에라도 그들은 수련을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을 터.
그렇기에 나는 오히려 그녀가 완전히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 긍정적으로 느껴졌다.
아무리 빨라도 최소 3년 이상의 시간을 쏟아야 지금 수준의 무력을 되찾을 수 있을 텐데, 그 3년이란 시간 동안 교수들은 훨씬 더 강해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도 그 안에 초절정 고수가 되어야겠지.’
초절정 또는 화경 고수.
반드시 3년 안에 그 정도 경지의 고수가 되고 말리라.
검기를 가득 실은 나의 검이 크루엘라의 미간 정중앙을 갈랐다.
‘반발력이 없다.’
아까는 강철을 베는 듯, 반발력이 상당하였다.
내공을 아무리 쏟아부어도 생채기만 조금 낼 뿐이었다.
크루엘라의 미간이 두부를 베듯 쉽게 베어졌다.
고통에 찬 처절한 비명.
교수들은 검을 들어 올리며 경계 태세를 갖추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몇 개 안 남은 눈이 모두 감기며, 크루엘라가 마침내 숨을 거둔 것이었다.
“드디어 죽인 겁니까?”
“예. 죽었습니다.”
주현근이 가장 먼저 환호를 지르자, 다른 교수들도 그를 따라 함성을 질렀다.
비록 크루엘라의 죽음이 완전한 죽음을 의미하는 게 아님을 그들 모두가 알았지만, 일단 이 자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이 중요하였다.
앙상한 체형의 여성이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특이하게도 앙상한 상체와 다르게, 치마로 가려진 그녀의 하체는 무척이나 비대하게 느껴졌다.
마치 사람의 하체가 아닌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죽일 거다! 죽일 거야!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일 거야!”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여성은 누군가를 향해 저주하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녀가 저주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박한새였다.
방금 그의 손에 죽음을 경험하였기에 박한새를 향한 원한으로 가득했던 것이다.
‘어떻게 해야 놈을 죽일 수 있지?’
몇 분 정도 지나자 이성을 어느 정도 되찾을 수 있었다.
이성을 되찾은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생각은 ‘박한새를 어떻게 죽일지’였다.
‘다른 놈들이 움직이기 전에 내가 잡아야 하는데….’
12사도 중에 그녀를 제외해도 무려 두 명이 박한새의 손에 죽었다.
물론 2사도는 튀르키예의 헌터가 죽였다고 알려졌지만, 여명회로선 주적을 박한새로 인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여명회 전체가 박한새의 목숨을 노리려고 혈안일 터.
‘두 놈만 움직이지 않는다면 나에게도 기회가 있을 거야.’
직접 박한새의 무력을 경험한 그녀는 아무리 여명회가 총력을 다해 박한새를 죽이려 해도 쉽게 죽일 수 없으리라고 확신하였다.
그만큼 박한새의 무력은 막강하기 그지없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상대했던 그 어떤 몬스터보다 까다로웠을 정도였다.
뭐 그러니 그의 손에 죽은 것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막강한 박한새도 11사도나 12사도가 나선다면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아마존에서 십수 년 동안 힘을 숨기며 진화를 거듭했던 그녀도 감히 11사도나 12사도에게는 대적할 생각을 못 했을 정도니까.
‘이번에는 몸집을 적당히 키우고 더 날렵하게 움직일 수 있는 방향으로 몸을 진화시켜야겠어.’
그녀가 박한새를 죽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님.”
크루엘라에게도 수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9성급 던전 보스급의 막강한 힘을 가진 그녀의 분신과 달리, 그녀의 본체는 연약하기 그지없었다.
박한새는 3성급 몬스터라고 이야기했으나 사실 그것보다 약한 게 그녀의 본체였다.
그래서 그녀는 본체를 경호하기 위해 나이트 계급의 신도 십수 명을 수하로 삼았다.
지금 문 밖에서 들려오는 여성의 목소리도 그녀의 수하 중 한 명의 목소리였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크루엘라는 그 모습을 보고 눈에 쌍심지를 켰다.
수하를 책망하기 위해서였는데, 그녀는 정작 자신의 수하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누구냐?”
“누구냐니요. 저 마리아입니다. 마리아.”
“네가 마리아라고?”
분명 마리아의 얼굴이긴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크루엘라는 그녀가 자신의 수하인 마리아로 느껴지지 않았다.
“파롤의 졸개들은 하나같이 눈치가 빠르네.”
“…누구지?”
“위대한 신, 렐릭의 권속이다.”
“렐릭?”
크루엘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로선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애초에 그녀는 다른 성좌에게 관심이 없기도 했지만 말이다.
“저승에서 파롤이 묻거든, 네 원수의 권속에게 죽어서 왔다고 말해라.”
“내가 쉽게 죽어줄 거 같으냐!”
크루엘라는 이를 갈았다.
안 그래도 박한새 때문에 분노하고 있었는데, 정체 모를 자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갑자기 쓰러진 마리아를 보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공격하리라 생각했건만, 왜 뜬금없이 기절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때, 무언가가 그녀의 ‘정신’에 침투하였다.
‘빌어먹을! 이건 또 뭐야!’
감히 자신의 정신을 침범하다니.
용서하지 않으리라!
크루엘라는 자신의 정신을 침범한 이에 맞서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녀가 정신 속에서 한창 정체도 모를 이와 싸우고 있을 때, 현실에 있는 그녀의 육체는 이미 그녀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다.
거미와 유사하게 생긴 그녀의 하체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여덟 개의 발이 사방으로 뻗어지더니 발끝이 그녀의 머리를 겨누었다.
그녀가 ‘아차!’ 했을 때 그 여덟 개의 발이 그녀의 머리를 향해 움직였다.
전 세계를 두려움에 빠뜨렸던 크루엘라의 최후는 실로 허무하였다.
육체 통제권을 누군가에게 빼앗긴 채 자살하고 만 것이다.
“더러운 것에 손을 댔더니, 기분이 찝찝한데?”
크루엘라의 시체 옆으로 누군가가 나타났다.
누군가는 다름 아닌, 레이한 길드의 나즐라라는 여인이었다.
“어쨌든 10사도의 본체를 내가 잡았으니 박한새도 나를 다시 봐주겠지?”
2사도를 죽였을 때는 그의 작전을 방해한 것이 되어서 오히려 역효과를 낳았었다.
하지만 10사도, 크루엘라는 달랐다.
성좌, 렐릭으로부터 파롤의 졸개를 추적할 수 있는 스킬을 하사받은 그녀조차도 겨우 찾은 크루엘라의 본체였다.
제아무리 박한새의 정보력이 뛰어나도 크루엘라 본체의 위치는 파악하지 못했을 터.
크루엘라의 목을 들고 가면 박한새도 그녀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와아아아아!”
무공 아카데미 교수들이 던전에서 나오자 함성이 쏟아졌다.
그들이 멀쩡한 상태로 나왔다는 것은 한 가지 사실을 의미하였다.
거미 괴물, 크루엘라가 죽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는 작게 보면 헌터들의 승리, 크게 보면 그야말로 인류의 승리였다.
국적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기쁨의 함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서도 주를 가리지 않고 환호가 터져 나왔다.
사실 거미 괴물을 가장 위협적으로 보던 것이 미국인들이었다.
과테말라를 넘어 멕시코에 왔고 미국을 향해 계속 북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거미 괴물이 사냥당했으니 미국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기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모든 미국인이 기쁨을 누리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인들이 그를 뭐라고 부르는지 아십니까? 인류의 구원자라고 부릅니다.”
워싱턴의 한 빌딩에 모인 십수 명의 미국인들.
그중 전 CIA 국장이었던 맥콘이 참담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하. 동양인 따위를 인류의 구원자라 부르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우리 미국이 들어야 할 말을 왜 그자가 듣고 있는 겁니까?”
한때 미국의 정계를 주름잡던 네오콘이란 세력이 있었다.
이들은 공산주의를 포함한 사회주의와 급진주의에 적대감을 가졌지만, 현재의 그들은 그런 이념 투쟁에 큰 관심이 없었다.
이념보다 중요한 것은 헌터로부터 권력을 지켜내는 것.
즉, 헌터라는 새로운 특권층의 발호를 막는 것이 이들의 주된 관심사였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 모인 이들이 네오콘 세력에 소속되어 있었다.
“박한새, 그자를 이대로 가만히 두면 미국 헌터들 전체가 그에게 무릎을 꿇을 것입니다.”
“헌터들뿐이 아닙니다! 지금 비각성자들도 그의 이름을 연호하며 열광하고 있습니다.”
“허어. 이러다 정말 그자가 세계를 정복하기라도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네오콘은 원래도 헌터를 경계하였었다.
이미 몇몇 나라에서는 헌터에 의해 정권이 바뀐 상황.
정치인을 중심으로 결성된 네오콘 세력이 헌터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들의 박한새에 대한 경계심은 이전까지 헌터에게 보였던 경계심과는 차원이 달랐다.
단순하게 권력을 잃는 정도가 아니었다.
이들은 자칫하면 미국이란 나라가 일개 개인에게 좌지우지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무공의 창시자라는 박한새의 명성은 그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차라리 그자가 거미 괴물의 손에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누군가가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자 다른 이들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황당하게도 그들은 거미 괴물을 제거하는 것에 실패하는 한이 있더라도 박한새의 죽음을 바랐다.
거미 괴물이 미국 본토로 가서 몇만 명을 죽이든, 그것보다 박한새의 존재가 더 거슬리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때, 창문이 깨지며 누군가가 요란하게 등장하였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누, 누구냐!”
네오콘 소속이자 공화당 소속인 태프트 상원의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그러자 갑자기 난입한 사내가 싱긋 웃으며 자신을 소개하였다.
“저는 여명회의 9사도, 요한이라고 합니다.”
창백하기 그지없는 피부를 가진 사내가 하는 말을 듣고 사람들은 매우 놀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