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해리스 대통령에게 여명회와 네오콘이 힘을 합친 상황을 경고하고자, 태프트 상원의원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앞에 태프트 상원의원이 나타났다.
그 역시 나의 취임식에 참석한 것이었다.
“반갑소. 공화당의 상원의원, 벤자민 태프트라고 하오.”
“태프트 상원의원께서 제 취임식에 참석해주실 줄 몰랐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미국의 영웅인데 참석하지 않을 수 있겠소?”
“헌터를 싫어한다고 들었는데, 제가 잘못 알고 있었나 봅니다.”
“호오, 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거 같소.”
“네오콘이 저를 적대한다는 사실도 들어본 적이 있는 거 같습니다.”
“…흐음.”
태프트 상원의원이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은근히 노기를 드러내는 게, 왜 그런 말을 꺼냈는지 질책하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저를 찾아온 용건이 무엇입니까?”
“일단 유명한 미스터 박과 인사를 나누고 싶어서 찾아온 것인데, 미스터 박은 내가 많이 불편한가 보오?”
“용건이 있는 거 같아서 그랬습니다.”
“뭐, 용건이 아예 없지는 않지.”
“그 전에 저에게 예의를 갖추어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IHA 회장입니다.”
태프트 상원의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자존심이 상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따지고 보면 일개 정치인에 불과한 인사였다.
그것도 주류보다는 비주류에 가까운 정치인 말이다.
그런 주제에 IHA 회장이자, 세계에서 제일 강하다고 알려진 내게 예의를 갖추지 않는 모습이 나로선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무력을 제하고도 영향력으로 보나, 재력으로 보나 그가 나보다 나은 것이 없을 텐데 말이다.
“알겠습니다. IHA 회장이시니, 예의를 갖추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말투 자체는 정중하게 느껴지는 말투로 내게 말했다.
물론 이어지는 그의 말만 들어도 그가 여전히 나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시간 없으니 짧게 내 용건을 말하겠습니다. 북한을 응징하는 일에, 미스터 박이 협조해줬으면 합니다.”
부탁하는 것도 아니다.
마치 명령하듯, 나의 협조를 구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태프트 상원의원의 말에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왜 그래야 하냐니, 정녕 몰라서 하는 말입니까?”
“모르니 하는 말입니다.”
“코리아의 일이고 여명회와 관련된 일입니다. 그런데 IHA 회장인 미스터 박이 협조하지 않겠다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늘어놓는 걸 보면 역시 정치인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을 응징하는 것이 여명회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미 증거가 여럿 나왔는데, 미스터 박은 미국의 뉴스를 잘 챙겨 보지 않는 거 같습니다.”
“탈북자의 말 몇 마디와 인공위성으로 찍은 그 사진 몇 장이 증거입니까?”
“제대로 된 증거 없이는 절대 상원의원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미국인들이 원하는 일이라 해도 거절할 겁니까?”
“미국인들이 원한다고 그게 옳은 일이 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과연 여론이 바뀌어도 계속 그렇게 고집을 부릴 수 있을지 두고 봅시다.”
태프트 상원의원도 마크 엘리스처럼 무언가 단단히 착각하는 거 같았다.
나는 여론에 휘둘리는 사람 아닌데 말이다.
‘그래도 북한의 일에 관심을 두기는 해야겠어.’
당장 전쟁이 벌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네오콘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정권 장악이었다.
태프트 상원의원이 북한 응징을 운운한 것도 강경한 발언을 해야 인기를 끌 수 있기 때문일 터.
한동안은 저렇게 강경 발언만 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이자들의 움직임이 북한 내부에 어떤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킬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북한이라고 국제 정세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이 북한 정권의 배후로 여명회를 지목한 것도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니, 그들 역시 어떤 식으로든 행동에 나설 게 분명하였다.
태프트 상원의원의 경고처럼 언론에서 나를 책망하는 식의 기사가 조금씩 보도되기 시작하였다.
“취임하자마자 욕을 먹게 되었군요.”
내 말에 IHA 이사들이 어정쩡한 미소를 지었다.
“모두 북한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회장님께서도 여명회는 인류의 적이라고 선언하신 바 있으니, IHA 역시도 선제적인 대응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북한을 공격하자는 말입니까?”
“필요하다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분들도 같은 생각입니까?”
“전 IHA가 먼저 나서서 움직이는 것에는 반대합니다.”
“북한이 정말 악의 축이든, 그냥 질 나쁜 국가일 뿐이든 간에 하나의 국가인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IHA가 북한을 공격하는 것은 설령 그게 도의적으로 옳은 일이라도 큰 논란이 될 것입니다.”
하워드 스펜서라는 이름을 가진 IHA 이사의 말이었다.
어찌 보면 가장 현실적인 말일 수도 있었는데, IHA는 어디까지나 헌터들로 이루어진 협회 조직이었다.
북한 정권의 배후가 여명회라는 이유로 IHA가 선제적으로 움직여서 북한을 응징한다?
응징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후폭풍은 상당할 수밖에 없었다.
일개 협회 조직이 한 나라를 무력으로 침탈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헌터들을 경계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일반인들은 이 일을 계기로 IHA를 악의 축으로 보게 될 수도 있으리라.
‘아마 태프트 상원의원의 의도도 바로 그거겠지.’
태프트 상원의원은 언론의 질타를 두려워한 내가 감정적인 행동을 하길 바라고 있을 것이다.
“먼저 나서지 말자는 말은 미국 정부가 움직이면 그때 움직이자는 말로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예, 이번 일에 아예 개입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여명회가 인류의 적이란 사실은 부정할 수 없으니 말입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북한 정권의 배후에 여명회가 있는 게 ‘확실’하다면 우리로서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요.”
나는 ‘확실’이란 단어를 강조해서 말하였다.
그러고는 그들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여러분 모두가 북한의 상황을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는 거 같아서 하는 말인데, 아시아 본부를 한국에 신설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안 그래도 나는 아시아 본부를 한국에 신설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마침 네오콘 세력이 북한을 건드니 기회로 여겨졌다.
명분 없이 한국에 아시아 본부를 신설하는 것보다 확실한 명분을 갖고 신설하는 것이 훨씬 보기 좋았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아시아 본부를 한국에 신설하면 북한 사태에 대응하기 좋을 거 같습니다.”
“아시아 본부를 신설하자는 이야기가 계속 나왔는데, 한국에 신설하는 것은 저 역시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나의 말에 대부분 찬성을 표하였다.
아시아에 별다른 이해관계가 없는 그들로선 반대할 이유가 크게 없었던 것이다.
‘한국에 아시아 본부를 설치함으로써 7사도를 보다 쉽게 공격할 수 있게 되었군.’
사실 내게 북한보다 중요한 것은 7사도였다.
지금이야 조용하지만, 회귀 전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7사도는 절대 방심할 수 없는 상대였다.
여명회의 이인자가 되어 아시아 전역에서 절대적인 존재로 자리 잡는 게 7사도, 창웨이란 사람의 미래였던 것이다.
한국에 아시아 본부를 설치하면 그를 견제하기 수월해지니 나로선 그야말로 일석이조였다.
-아주 날 못 부려 먹어서 안달이군.
“믿을 사람이 정승호 길드장님밖에 없었습니다.”
-말은 잘해. 말은.
나는 정승호의 투덜거리는 목소리를 듣고 피식 웃었다.
IHA의 한국 본부 총책임자는 정승호로 정하였다.
그는 S랭크 헌터에 무공 고수로 알려져 있었다.
더군다나 그의 길드, 화영은 한국에서 손꼽히는 길드로 성장한 상태였다.
명예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인선이었던 것.
실제로 IHA 이사들도 그가 한국 본부의 총책임자가 되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다.
-후, 자네 덕분에 사람들 앞에 나서게 되었어. 나는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말이야.
“서울을 구하셨던 13인의 영웅 중 한 분이시면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아무튼, 내 임기는 그리 길지 않을 테니 미리 후임을 생각해두는 게 좋을 거야.
“그렇게 말씀하셔도 책임감 있게 잘 해주실 거라 믿습니다.”
-너무 믿지 마. 나보다는 지금 너한테 가고 있는 소연이나 더 믿어라.
“물론 소연 씨도 제가 깊게 신뢰하고 있습니다.”
-깊게 신뢰한다는 주제에 멕시코에서는 제대로 된 임무 하나 맡기지 않았던 거야?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
-내 조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소연이는 정말 진국이야. 헌터로서도 여인으로서도. 그러니 잘 챙겨줘.
요즘 정승호와 대화할 때마다 꾸중을 듣는 거 같았다.
그런데 정소연을 소홀하게 대했던 것은 사실이라, 꾸중을 듣는 게 당연하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앞으로는 더 잘해줘야겠어.’
무공을 가르칠 때도 조금 더 신경을 써줘야 할 듯싶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사부님, 저입니다. 충구.”
허락이 떨어지자 강충구가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내게 소식 하나를 전해주었다.
“지금 로비에 사부님을 찾는 손님이 있습니다.”
“당분간은 사람을 안 만날 거라고 했었잖아.”
“물론 저도 알고 있습니다만, 보고는 꼭 해야 할 거 같아서 이렇게 보고드리려고 왔습니다.”
“누군데 그래?”
“북한 사람, 정확히는 북한의 헌터입니다.”
“북한 헌터?”
특별하다면 특별한 손님이었다.
지금 시점에는 더더욱 특별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다른 손님들처럼 쫓아낼까요?”
원래 같았으면 쫓아내는 게 맞았을 거다.
북한 사람이라고 특별 대우를 해줄 이유는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나는 북한 내부의 정보 하나하나가 귀중한 상황이었다.
“신원은 확실한 거지?”
“예. 북한에서 상당히 유명한 헌터입니다. 이름은 방학세인데, 방병률의 조카입니다.”
방학세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방병률’이라는 말에 나는 왜 유명하다는 소리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방병률은 북한의 유일한 S랭크 헌터였기 때문이었다.
“한번 만나보는 게 좋겠군.”
“그럼 지금 바로 불러오겠습니다.”
강충구가 다시 물러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20대 후반의 사내와 함께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다부진 체격의 사내였는데 피부가 꽤 까무잡잡하였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박한새 동무, 저는 방학세라고 합니다.”
방학세는 북한 사투리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말투로 내게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나는 고개를 마주 숙여 그의 인사를 받아주고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쩐 일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박한새 동무는 역시 조선의 사내답게 말을 빙빙 돌리지 않으십니다.”
칭찬인지, 욕인지 의미 모를 말을 하더니 방학세는 바로 자신의 용건을 꺼냈다.
“조선의 영웅이자, 세계의 영웅인 박한새 동무에게 부탁을 드리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박한새 동무, 저희의 혁명을 인정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혁명이라?
분명 좋은 뜻으로 자주 쓰이는 단어인데 어째서인지 북한 사람이 혁명을 입에 담자 그리 좋게 느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