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대신 회귀함-204화 (204/275)

#204화

‘역시 동양인이 많아졌네.’

복도를 걸으며 마리아 엘리사는 눈에 이채를 띠었다.

IHA 본부.

원래는 IHA 본부에서 동양인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였다.

제니퍼가 협회장으로 취임하기 이전까지 IHA는 인종차별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었는데 그나마 제니퍼가 협회장으로 취임하면서 동양인의 비중이 조금 올라갔었다.

그러다 박한새가 협회장으로 취임하며 동양인, 정확히는 ‘한국인’ 비중이 크게 늘었다.

이사진에서도 무공 아카데미 출신의 교수들이 대거 기용될 정도였다.

‘하나같이 기세가 범상치 않아.’

물론 인종을 구분하는 것에 큰 관심이 없는 마리아 엘리사에게 동양인 비중이 늘어난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눈여겨본 것은 새로 IHA에 합류한 동양인들의 실력이었다.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그녀는 늘 높은 자리에 있었다.

그래서인지 사람 보는 눈도 좋았는데, IHA 소속 동양인들의 수준은 한눈에 봐도 비범하게 느껴졌다.

어림짐작일 뿐이지만, 그녀가 직접 나서도 쉽게 이길 수 없는, 어쩌면 질 수도 있는 그런 상대들이 수두룩하였다.

“반가워요. 아르헨티나에서 온 마리아 엘리사예요.”

“대통령님, 어서 오십시오. 저는 박한새라고 합니다.”

하지만 역시는 역시일까?

가장 비범하게 느껴지는 것은 IHA의 협회장, 박한새였다.

무공의 창시자이자 세계의 구원자라 불리는 걸물 중의 걸물.

‘겉으로는 그냥 평범한 일반인처럼 보여. 하지만 그게 오히려 더 무서운 일이지. 자신의 기운을 완전히 감추었다는 뜻이니까.’

만약 박한새의 정체를 몰랐다면 그녀는 박한새가 자신보다 강한 무력의 소유자란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사람 보는 눈이 좋은 그녀가 느끼기에 박한새의 기세는 평범하였다.

“어쩐 일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그녀가 소파에 앉기 무섭게 박한새는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물었다.

어찌 보면 무례할 수도 있는 태도였는데, 마리아 엘리사와 그녀의 수행원들은 그 태도를 지적하지 않았다.

제아무리 그녀가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자, S랭크 헌터라고는 해도 상대는 무려 IHA 협회장이었다.

갑과 을을 나눈다면 박한새가 무조건 갑인 상황.

더군다나 현재 남아메리카 국가들은 IHA와 계속해서 마찰을 일으키고 있었다.

박한새 입장에서는 아르헨티나 역시 좋게 볼 수 없다는 뜻이었다.

“협회장님도 아시겠지만, 현재 남아메리카 헌터들 사이에서 IHA에 대한 반감이 크게 늘었어요.”

“예,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얼마 전 브라질에서는 반 IHA 연합을 결성하는 회의가 열리기도 했어요.”

“엘리사 대통령도 참석했다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그 자리에서 브라질 대통령이 IHA에서 탈퇴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어요.”

마리아 엘리사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상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박한새는 그녀의 말을 듣고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예상이라도 한 거 같은 그런 반응이었다.

“다른 나라들은 대부분 브라질 대통령의 말에 동참했어요.”

“아르헨티나는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저는 브라질 대통령의 뜻에 동참할 생각이 없어요. 그래서 적극적으로 반대 의견을 피력하였어요.”

“남아메리카 전체가 연합하려는 거 같은데, 왜 반대하셨습니까?”

“그야 IHA에서 탈퇴하면 득보다 실이 더 클 거니까요.”

그녀는 되도록 솔직하게 말하였다.

박한새의 성정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박한새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렇게 물었다.

“그 이야기만 하려고 저를 찾아온 것은 아닐 테고, 저에게 무언가 바라시는 게 있는 겁니까?”

“두 가지를 바라고 있어요.”

마리아 엘리사가 괜히 박한새를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헌터지만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기도 하였다.

IHA를 위한 선택을 하였으니, 아르헨티나를 위해서라도 IHA에게 무언가 얻어낼 필요가 있었다.

“바라시는 게 뭡니까?”

“남아메리카 본부의 위치를 아르헨티나로 옮겨주길 원해요.”

중요하다면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다면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다.

본부의 위치가 아르헨티나로 정해진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으니.

하지만 IHA와 남아메리카 헌터들의 힘겨루기가 끝난 이후를 생각하면 이 본부 위치는 대단히 중요할 것이다.

IHA가 결국 승리하게 될 텐데, 추후 IHA 본부가 위치한 곳에서 남아메리카 헌터들의 권력 분배가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들어줄 수 없는 제안입니다.”

“들어줄 수 없는 제안이라고 말했습니다.”

박한새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리 말하자 마리아 엘리사는 입을 크게 벌렸다.

그녀가 생각하기엔 당연히 들어줄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브라질이 IHA에 반기를 든 것은 이미 전 세계가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반면 아르헨티나는 남아메리카에서 거의 유일하게 IHA의 아군이 되어줄 나라였다.

당연히 IHA 본부의 위치도 아르헨티나로 조정하는 게 IHA 입장에서도 이득이었다.

그런데 설마 이토록 단호한 거절을 당할 줄이야.

“왜죠? 설마 아직도 브라질의 눈치를 보는 건가요?”

박한새의 양옆에 앉아있던 IHA 이사들은 그녀의 말을 듣고 같잖다는 듯 피식 웃었다.

설마 브라질 따위의 눈치를 보겠냐고 말하는 듯한 태도였다.

“브라질이 남아메리카의 중심이니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IHA에서 탈퇴할 생각을 품고 있어요.”

“브라질이 IHA에서 탈퇴할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어떻게 그걸 장담하시죠?”

“제가 막을 겁니다. 제가 직접 브라질로 날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오만하다고 할 수 있는 박한새의 발언에 마리아 엘리사는 순간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다른 사람이 저리 말했다면 그저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박한새의 발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저 웃으며 넘어갈 수가 없었다.

“브라질, 아니 남아메리카 전체와의 전쟁도 불사하지 않을 거라는 의미로 해석해도 될까요?”

“예. 물론 저희는 남아메리카와의 전쟁이 아닌, 빌런과의 전쟁이라고 선포할 겁니다.”

그 말은 조제 콜로르, 후안 카르도나, 호세 바첼레트 등을 빌런으로 선포하겠다는 의미였다.

실로 단호한 조치가 아닐 수 없었다.

“아르헨티나는 그들과 뜻을 함께할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마리아 엘리사는 절박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누구에게나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그녀였다.

하지만 IHA, 아니 박한새 앞에서는 당당한 모습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단지 그가 막강한 무력의 소유자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강철 같은 의지.

큰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의 의지를 읽은 것이다.

‘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이자는 그야말로 철인 그 자체야.’

무공이란 것을 홀로 독점하지 않고 학교를 만들어 대대적으로 전파한 것만 봐도 범상치 않았다.

멕시코에서의 일이나, 북한의 쿠데타를 진압한 일도 그가 일반적인 사람이 아님을 증명하였다.

그는 남아메리카 헌터들과 적대 관계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마, 남아메리카를 넘어 전 세계의 헌터들과 적이 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그렇기에 누구의 앞에서든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마리아 엘리사가 박한새 앞에서만큼은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본 박한새란 사람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라면 전 세계와 싸우라고 해도 싸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요구할 것이 두 가지라고 하셨는데, 다른 한 가지는 또 무엇입니까?”

“…없어요.”

“없다고요?”

“있었는데 없어졌어요.”

박한새가 이상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녀로선 박한새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기가 두려웠다.

‘지금은 무언가를 요구할 때가 아니라, 그의 적이 되지 않는 것에 집중할 때다.’

원래는 반 IHA 연합에 참여하지 않는 대가로 무언가를 요구하려고 하였었다.

특히 그녀가 바랐던 것은 무공 아카데미.

사실 본부의 위치를 아르헨티나로 옮기는 것보다 아르헨티나에 무공 아카데미를 설립하는 것을 더 간절히 바랐었다.

하지만 막상 박한새를 만나고 나니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박한새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요구하는 것을 들어줘야 하는 상황임을 인지한 것이다.

“엘리사 대통령님. 실례가 아니라면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데.”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혹시 남자친구 있으십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박한새의 질문에 마리아 엘리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새 씨가 설마 처음 보는 여성에게 그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어요.”

유지은이 희한한 것을 본다는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꼭 필요한 질문이었습니다.”

“엘리사 대통령한테 남자친구가 있는지, 없는지가 꼭 필요한 질문이었다고요?”

내 답변을 듣고 더 황당하게 여기는 유지은이었다.

하긴, 다른 사람의 입장에선 내 질문이 이상하게 느껴졌을 거 같기도 했다.

마리아 엘리사와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는가 싶더니, 대뜸 남자친구가 있는지를 물어봤으니.

하지만 나로선 그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때 남아메리카를 대표하는 헌터이자, 무공의 천재라 불리던 마리아 엘리사가 인류를 배신한 이유가 바로 그녀의 남자친구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원래라면 그녀의 남자친구가 될 사람이 여명회의 9사도지.’

정확한 시기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쯤 9사도가 그녀에게 접근할 시도를 하고 있을 거다.

두 사람은 꽤 오랜 시간 동안 교제했다고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다행히 지금은 아닌 모양이군.’

나비효과 때문인지.

아니면 아직 시기가 안 된 것인지.

9사도가 그녀에게 접근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 말은 마리아 엘리사를 회유할 시간이 아직 남아있다는 뜻이었다.

“한새 씨. 엘리사 대통령이 마음에 드시면 대시하세요. 한새 씨라면 무조건 통할걸요?”

“…그런 생각으로 남자친구 있는지를 물어본 것은 아닙니다.”

“그래요? 한새 씨, 아까 정말 이상했는데….”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화제를 전환할 겸, 그녀에게 지시를 내렸다.

“남아메리카의 빌런 조사는 다 끝내셨습니까?”

유지은이 현재 집중하고 있는 업무는 남아메리카 헌터들을 조사하는 일이었다.

누가 얼마나 영향력이 강한지. 또 누가 얼마나 큰 범죄를 저질렀는지.

그녀라는 고급 인력을 조금 낭비하는 거 같기는 해도 꼭 필요한 절차였다.

이번에 철저하게 조사하여 빌런을 완전히 박멸해야지만 남아메리카가 빌런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청정 대륙이 될 테니까.

‘뭐 아무리 철저하게 박멸해도 빌런이 사라질 날은 오지 않겠지만 말이야.’

빌런은 그야말로 바퀴벌레와도 같았다.

없애고 없애도 절대 사라지지 않는 존재인 것.

하지만 한국처럼 빌런으로 인한 피해가 거의 제로에 가깝게 만드는 것은 가능하였다.

이번에 남아메리카에서 빌런을 깔끔하게 청소하여 한국처럼 만들고 말리라.

“예상했던 대로 정부 고위직은 전부 다 빌런이라고 봐도 무방해요.”

“모든 나라가 다 그렇습니까?”

“아르헨티나는 그나마 고위직에 헌터 비율이 적고 범죄 수준도 높지 않지만, 다른 나라의 권력형 헌터는 마약, 인신매매는 기본으로 했다고 봐야 해요.”

“명단을 제게 넘겨주십시오. 읽어보고 바로 발표하겠습니다.”

“꽤 충격이 클 내용들인데, 바로 발표하신다고요?”

우리나라로 치면 국방부 장관, 외교부 장관 등 장관급 인사들을 빌런이라고 선포하는 일이었다.

그 충격이 절대 작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난 망설이지 않았다.

장관급 인사가 아니라 그 나라의 대통령이라고 해도 헌터인 이상 범죄를 저질렀으면 IHA에서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