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강충구가 뒤를 돌아보니 흑발의 백인 남성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장을 빼입은 그의 모습은 워싱턴 D.C.의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여유롭게 느껴졌다.
그런 사내의 모습을 보고 강충구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이자가 이번 사건의 배후일 수도 있다.’
그의 날카로운 직감이 속삭였다.
눈앞의 백인 남성은 흔하디흔한 빌런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 엄청난 실력자이거나, 거대한 세력을 휘하에 둔 거물 중의 거물일 것이라고 말이다.
“당신, 정체가 뭡니까?”
“이 상황에서 내 정체를 묻다니. 상당히 침착한 성격이군.”
“아무래도 당신이 이번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처럼 느껴져서 말입니다.”
사내는 감탄했다는 듯, 탄성을 내질렀다.
“그걸 알아차렸다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여야겠어.”
“원래도 죽일 생각이었지 않습니까?”
“물론이지. 벌레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 죽이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은가?”
강충구는 사내의 말을 듣고 더 망설이지 않았다.
전력으로 보법을 펼친 뒤, 검기를 가득 실은 검을 그대로 내질렀다.
상대의 목을 향해 내지른 검기는 무언가에 막힌 듯, 허공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였다.
‘방어막 같은 스킬인 건가.’
아무래도 상대는 듀얼 스킬 능력자인 듯싶었다.
아까 보여준 공격 스킬 말고도 방어 스킬이 하나 더 있는 것을 보면.
하지만 강충구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무공 아카데미에서 수천 명의 학생들을 상대로 대련 경험을 쌓았었다.
재능이 넘쳐나는 무공 아카데미의 학생들을 상대로 쌓은 전투 경험은 그를 노련한 싸움꾼으로 만들어주었다.
듀얼 스킬 능력자?
무공 아카데미에서는 그리 희귀한 존재가 아니었다.
트리플 스킬 능력자도 꽤 존재했던 것이다.
강충구는 다시 보법을 펼쳐 이번에는 상대의 뒤를 노렸다.
이번에도 무언가에 막혔다.
하지만 반발력이 이전보다 약해진 것이 느껴졌다.
이는 그의 공격이 효과가 없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의미하였다.
“확실히 세군. 내 방어막을 거의 다 부수다니 말이야.”
“여유를 부리는 것도 지금이 마지막일 겁니다.”
검에다 더욱더 많은 내공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검기의 외형이 더 무시무시하게 바뀌었다.
실제 공격력도 증가한 상태.
강충구의 말처럼 사내가 여유를 부리는 것도 지금이 마지막일 것이리라.
검기를 가득 실은 강충구의 공격에 검을 가로막던 무언가가 결국 깨져버렸다.
사내는 이제 무방비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끝이다!”
검이 막힘없이 사내의 목을 향해 날아가자 강충구는 승리를 확신하였다.
하지만 그 순간, 사내의 몸이 강충구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놀라서 사내가 사라진 자리를 잠시 바라보던 강충구는 뒤에서 들리는 소음에 다급히 몸을 움직였다.
“그 순간에도 내 아이스 볼트를 막아내다니. 반사신경이 대단한데? 무공을 익히면 다 그 정도 수준의 실력을 갖게 되는 건가?”
강충구는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었다.
수십 개의 구체가 날아와 그의 전신을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얼굴을 향한 공격은 막았으나, 팔뚝과 종아리를 향한 공격은 막지 못했다.
“당신. 도대체 스킬이 몇 개인 거지?”
강충구가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헌터가 무인과 상대하다 보면 수많은 스킬을 보유한 헌터와 상대하고 있는 거 같은 기분을 느낀다고 한다.
무공이라는 배움 하나가 여러 개의 스킬을 가진 효과를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강충구는 지금 눈앞의 있는 상대에게 그 이상의 기분을 느꼈다.
그저 스킬이 많은 헌터와 상대하는 것이 아닌, 여러 명의 헌터를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스킬? 내가 사용한 게 스킬로 보였나?”
사내는 강충구의 말에 코웃음을 치더니 이렇게 말했다.
“눈이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군. 내가 사용한 건 스킬 따위가 아니야. 스킬보다 상위의 힘, 바로 마법이다.”
“마법…?”
강충구는 눈을 끔벅거렸다.
마법이라니.
갑자기 마법은 무슨 마법이란 말인가.
하지만 상대는 그런 강충구의 의문을 해결해 줄 생각이 없는 듯, 강충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항복해라.”
“…겨우 이 정도의 상처로 저를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럼 사지를 절단시켜야겠군.”
“사지가 절단된다고 해도 당신에게 항복할 일은 없을 겁니다.”
사내는 강충구의 단호한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는 이내 조소를 지은 채, 다시금 강충구를 설득하였다.
“지금 내게 항복하면 마법을 배우게 해주지. 너는 무공에 이어 마법까지 손에 쥐게 되는 셈이다. 무공을 익힌 헌터들보다 훨씬 강해질 수 있게 되겠지.”
그의 태도는 마치 절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한 것처럼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강충구는 그런 사내의 태도에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제가 무공 하나 때문에 사부의 곁에 있는 줄 아십니까?”
“그러면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건가?”
“저는 사부의 신념이 곧 제 신념과도 같기에 사부의 곁에 있는 것입니다.”
“신념? 무슨 신념을 가지고 있지?”
“당신 같은 인류의 적을 말살하는 것. 그게 바로 저의 신념입니다.”
사내는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죽기 전에 너부터 죽을 거 같은데?”
“지원이 올 때까지 끝까지 버틸 겁니다.”
“널 도우러 올 사람은 없다.”
“IHA를 우습게 보지 마십시오.”
조지타운은 본부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장소였다.
아마 지금쯤 그의 동료들이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을 게 분명하였다.
“일단 너희 보스는 못 오겠지. 일정 주기마다 이틀 정도 어디론가 사라지던데, 지금이 딱 그 시기잖아.”
강충구는 속으로 움찔하였다.
박한새가 보름마다 사라지는 것은 IHA의 핵심 간부들만 아는 사실이었다.
IHA에서는 그야말로 극비 중의 극비로 취급하는 정보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사내는 그런 극비 정보를 너무도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오지 못할 거다.”
마치 그가 말할 것을 기다렸다는 듯, 커다란 폭발 소리가 들렸다.
“백악관조차 공격을 당할 정도로 워싱턴 전체가 큰 혼란에 빠질 거거든.”
IHA를 떠난 나는 바로 장산군도로 이동하였다.
‘다행히 7사도는 아직 장산군도의 던전을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군.’
던전 주변은 늘 그렇듯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7사도가 이 던전을 발견하였다면 이렇게 조용할 리는 없을 터.
물론 7사도가 함정을 팠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던전에 들어오자마자 듀라한을 소환하였다.
이제는 숫자가 꽤 되었기에 듀라한들도 큰 전력이었다.
만약 7사도가 함정을 팠어도 듀라한들이 있는 한, 크게 위험하지는 않으리라.
던전에 들어오기 무섭게 각종 몬스터들이 달려들었다.
나는 직접 나서지 않고 듀라한들을 내보냈다.
8성급 몬스터, 듀라한.
헌터로 치면 B에서 A랭크 사이의 무력을 가졌다.
물론 말이 B에서 A지, 만약 동등한 숫자의 A랭크 헌터와 부딪친다면 듀라한의 필패였다.
B랭크 헌터들과 부딪쳐도 질 가능성이 컸고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헌터들에게는 합격술이란 것이 있었다.
진법까지는 아니어도 서로 팀워크를 이루며 유기적인 공방을 펼쳤다.
서로 부족한 점을 보완하며 펼치는 헌터들의 전투 방식은 비교적 전투 방식이 단조로운 듀라한에게는 상성상 불리하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내 듀라한은 다르다.’
강충구가 만든 진법을 가르친 뒤로 듀라한의 합격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동등한 숫자의 B랭크 헌터가 상대라면 내가 거느린 듀라한이 무조건 이길 것이다.
A랭크 헌터들이라고 해도 크게 밀리지는 않으리라.
그리고 만약 10기 이상의 듀라한이 뭉친다면 어지간한 S랭크 헌터도 잡을 수 있었다.
그 정도로 내가 거느린 듀라한의 전투력은 상당하였다.
‘내 도움을 크게 받지 않고 리치까지 잡을 정도니 말 다 했지.’
나는 듀라한에게 묶여서 꼼짝도 못 하고 있는 던전 보스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듀라한들이 이제는 나름대로 쓸 만해진 거 같아 기분이 좋았다.
처음에는 이들을 언제쯤 활용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는데 말이다.
“이걸로 듀라한이 100기를 넘게 된 건가.”
리치의 라이프베슬을 부수니 뱃사공의 목걸이에 10기의 듀라한을 더 추가할 수 있게 되었다.
방금 전까지 90기를 거느렸으니, 10기를 더하면 앞으로 100기의 듀라한을 거느릴 수 있게 된 셈이었다.
‘100기라. 아직은 회귀 전에 7사도가 이끌었던 죽음의 군단과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한 숫자군.’
턱없이 부족한 정도가 아니었다.
아예 비교하는 게 우스울 정도의 차이였다.
그도 그럴 것이, 회귀 전 7사도가 이끌었던 죽음의 군단은 말 그대로 ‘군단’이었다.
만 단위의 언데드를 이끌었다는 뜻이다.
‘그 정도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500. 딱 500기 정도만 되어도 당장은 충분해.’
500기라고 무시할 수 있는 숫자는 아니었다.
듀라한은 무려 8성급 몬스터였다.
사실상 6성급 던전 보스 수준의 무력을 지녔다는 뜻이었다.
더군다나 내가 거느린 듀라한은 더 강한 전투력을 가졌으니 500기만 모여도 엄청난 전투력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던전에서 나온 나는 휴대폰을 보고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부재중 전화가 수백 통이나 찍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새 씨!
급하게 유지은에게 전화를 거니 그녀가 심각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워싱턴 D.C.가 공격받고 있어요!
다른 어디도 아니고 미국 수도가 공격을 받고 있다니.
왜 부재중 전화가 수백 통이나 쌓여있는지 바로 이해가 갔다.
“…피해는 큽니까?”
-테러를 시도한 빌런들이 예상보다 강력하여 민간인 피해가 다수 발생하였어요.
민간인 피해가 다수 발생했다는 소리에 나는 이를 갈았다.
내가 가장 분노하는 순간이 바로 이런 상황이었다.
“남미 빌런들입니까?”
-정체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지금까지 확인된 빌런들의 정체는 미국인들이었어요.
“미국인 헌터가 미국 수도를 공격했다는 말씀입니까? 아니, 그보다 상황은 어떻습니까?”
-여전히 곳곳에서 소동이 일어나고 있지만, IHA 요원들의 활약으로 빌런들은 문제없이 진압되고 있어요.
-다만, 상황이 위급하여 강충구 비서실장도 출동하였는데 지금 소식이 끊어졌어요.
그 순간, 내 스킬 ‘직감’이 경고하였다.
강충구가 위기에 몰렸다고 말이다.
‘늦지 않았기를.’
마침 와그너의 신발이 쿨타임이 되었기에 나는 바로 워싱턴 D.C.로 넘어왔다.
그러고는 조지타운 방향으로 날아갔는데 이상하게 감이 좋지 않았다.
나는 애써 찝찝함을 지운 채, 강충구가 마지막으로 향했다는 장소로 이동하였다.
‘…설마.’
할렘가를 연상케 하는 삭막한 분위기의 거리.
그 거리 한복판에 익숙한 체형의 사내가 누워있었다.
“한새 씨….”
잠든 듯, 길바닥에 누워있는 사내 옆에 서 있던 여성이 내게 말을 걸었다.
여성은 다름 아닌, 정소연이었다.
“죄송해요. 한새 씨.”
“갑자기 왜 사과를…?”
“죄송해요.”
나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이 같은 경험을 너무 많이 해봤기에 그녀의 사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렸던 것이다.
“충구 씨가 한새 씨에게 꼭 전해달라고 했어요. 한새 씨 덕에 진정한 삶을 살 수 있어서 행복했었다고. 정말 감사드린다고 말이에요.”
정소연이 내게 강충구의 유언을 전하였다.
이로써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 강충구가 죽었다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