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충구를 죽인 자가 누굽니까?”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제가 왔을 때는 이미….”
정소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하였다.
강충구를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는 거 같았다.
“하하하! 나다! 그 더러운 동양인 놈을 죽인 건 나라고!”
그때 사지가 결박되어 있던 빌런이 그리 외쳤다.
나는 무표정한 눈으로 빌런을 노려봤다.
“흐흐, 내가 얼마나 두려웠는지 살려달라고 아주 난리를 피우더군! IHA 헌터 놈들은 역시…. 크르륵.”
이죽거리던 빌런이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자신의 목을 졸랐다.
“사, 살려줘!”
간신히 비명을 토해내는 빌런.
그의 바지는 무언가에 흠뻑 젖은 듯, 축축해져 있었다.
나는 그런 빌런을 무시한 채 강충구의 시신을 다시 바라봤다.
경험이 많은 헌터는 시신에 남겨진 흔적만 봐도 범인이 누구인지를 대충이나마 추측할 수 있었다.
강충구처럼 실력이 뛰어난 무인을 죽일 자는 얼마 없으니 추측하기는 더욱더 쉬웠다.
‘불, 얼음, 그 외에 날카로운 상처들까지. 분명 강충구는 한 사람과 붙었는데 다양한 스킬에 맞은 흔적이 있다.’
흔적을 보는 나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범인이 누구인지 감이 왔기 때문이었다.
‘마법사의 짓이군.’
마법사.
그들은 1사도가 양성한 여명회의 숨겨진 힘이었다.
먼 훗날에는 여명회의 신도 전체가 마법을 익힌 마법사가 되기도 했다.
‘마법사가 왜 지금 나타난 거지?’
아직은 숨어서 한창 마법을 연구하고 있을 시기였다.
마법은 무공 이상으로 난해한 학문.
아마 지금쯤이면 1사도도 마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시기였다.
이성은도 회귀하고서 가장 먼저 마법사들을 처리하려고 하였으나 은신처를 찾지 못해 포기했다고 했다.
지금으로부터 최소 몇 년은 기다려야 마법사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게 정상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런 내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한새 씨. 지금 바로 백악관에 가셔야 할 거 같아요. 백악관이 습격을 받고 있어요!
유지은이 긴급하게 전해준 소식을 듣고 나는 눈을 부릅떴다.
설마 백악관까지 습격을 받다니.
나는 다급히 백악관이 위치한 펜실베이니아 거리로 날아갔다.
“와아아! 헌터다!”
“엄청 빠른데?”
“히어로님! 워싱턴을 구해줘요!”
빌런들의 난동으로 옥상에 피신해있던 시민들이 나를 보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평소라면 손 인사 정도는 해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여유가 없는 상태였다.
그저 굳은 표정을 한 채 백악관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접근 금지. 더 다가오면 적대 행위로 간주하고 공격하겠습니다.”
“…박한새 협회장이셨습니까?”
“백악관이 공격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왔는데…. 다행히 잘 막은 모양이군요.”
하지만 내가 백악관에 도착했을 때, 이미 상황은 종료된 상태였다.
경호원들이 나의 진입을 막는 것만 봐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예. 이곳은 안전합니다.”
“IHA 헌터들이 제때 도착했나 봅니다.”
내 말에 A랭크로 보이는 백악관 헌터가 조소를 지었다.
“아니요. IHA 헌터들은 상황이 다 끝난 뒤에야 도착하였습니다.”
그럼 백악관은 누가 구했단 말인가.
“백악관을 구한 것은 바로 저분입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모델처럼 훤칠한 체형의 사내가 백악관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영국의 마법사, 앤디 올드먼이라고 합니다.”
“마법사라….”
앤디 올드먼이란 사내가 손을 내밀며 자기를 소개하자, 나는 굳은 표정을 지었다.
상대가 마법사란 이유만으로 나는 앤디 올드먼이란 사내를 좋게 볼 수 없었다.
어쩌면 강충구를 죽인 범인이 이자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령 충구를 죽인 게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죽여야 할 대상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마법사란 족속들은 내게 있어 제거 대상에 불과하였다.
1사도의 심복들이었으니까.
앤디 올드먼이 나의 살기를 느꼈는지 뒷걸음질을 쳤다.
“저와 원수라도 진 것처럼 바라보시는군요. 순간 8성급 던전 보스의 피어를 맞이한 줄 알았습니다.”
“박한새 협회장님! 백악관을 구한 영웅에게 지금 무슨 짓입니까.”
갑자기 다른 사내가 우리 사이로 끼어들었다.
피터 파인.
그는 ‘The Guardians’ 조직의 수장이었다.
참고로 The Guardians는 한국으로 치면 이능관리부였다.
헌터와 던전 등을 관리하는 부서인 것.
“이자가 백악관을 구한 영웅이라고요?”
“예, 올드먼 경이 S랭크 헌터인 윌리엄 조이스의 난동을 막아주었습니다!”
“…윌리엄 조이스가 난동을 부리게끔 만든 게 과연 누구일 거 같습니까?”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나의 말에 피터 파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앤디 올드먼이 자작극을 펼쳤다는 의심은 전혀 하지 않는 모양새였다.
“박한새 협회장님. 저는 당신이 왜 저를 싫어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희는 오늘 처음 본 사이이지 않습니까?”
난 그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피터 파인을 향해 말했다.
“제 도움은 더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마침 IHA 헌터들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들과 함께 IHA 본부로 귀환하였다.
“앤디 올드먼에 대한 모든 것을 조사해주십시오.”
IHA 본부로 귀환한 나는 유지은에게 곧바로 지시를 내렸다.
앤디 올드먼을 조사하라고 말이다.
‘최소 최상급 수준은 되어 보였다.’
마법사 등급이 최상급이라면 절정급이라고 볼 수 있었다.
즉, 앤디 올드먼은 무공 아카데미의 교수들 수준의 무력을 지녔다는 뜻이었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최상급 마법사라니. 이것도 나비효과인가?’
지금 시기에 최상급 마법사가 될 정도면 먼 훗날에는 마스터 경지에 오를 자라고 봐야 했다.
그리고 마법사로 마스터 경지에 오른 이라면 내가 모를 리 없었다.
여명회에서 12사도급의 강자로 분류되는 게 마스터 경지의 마법사들이었으니까.
“앤디 올드먼. 그는 영국 출신의 헌터예요. 각성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그때 랭크는 A였다네요.”
“A랭크의 헌터라. 스킬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건 아직 알아내지 못했어요. 특이하게도 헌터로 각성했으면서도 던전에서 사냥한 경험이 거의 없는 헌터였거든요.”
모든 헌터가 자신의 스킬을 밝히고 다니지는 않았다.
혼자서 활동하는 헌터들은, 자신의 스킬을 무덤까지 끌고 갈 기세로 감추는 경우도 적지 않았는데, 앤디 올드먼이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사실 던전에서 활동한 경험이 적을 뿐만 아니라, 아예 사회 경험도 없다시피 하더라고요. 기록을 보면 그가 10년 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 도저히 파악할 수가 없었어요.”
뭐 뻔한 일이다.
어디 은신처에 숨어서 마법을 수련하였겠지.
“이번 미국행이 그의 첫 행보인 거 같은데, 첫 행보로 미국 대통령을 구했으니 엄청난 행운아인 거 같아요.”
“행운아보다는 음모가라고 보시는 게 나을 거 같습니다.”
“음모가요?”
“갑자기 헌터들이 난동을 부린 이유가 뭐일 거 같습니까?”
“펜테리움의 부작용 때문에 난동을 일으킨 게 아니었나요?”
“부작용이 한날한시에 일어날 가능성이 과연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설마 앤디 올드먼이…?”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자는 여명회의 신도입니다.”
“…미국에서는 벌써 그를 영웅이라 추앙하고 있는데 그가 여명회의 신도였다고요?”
“여명회의 신도가 왜 해리스 대통령을 구한 걸까요?”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그자가 왜 영웅 행세를 하려는지 모르겠거든요.”
이번 일로 그들이 유통하는 펜테리움에 대한 여론은 더욱더 악화하게 될 터.
이미 중독된 이들을 제외하면 앞으로 펜테리움을 찾는 사람은 없게 될 것이었다.
즉, 여명회 입장에서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게 크다는 의미였다.
“여명회를 향한 부정적인 여론을 바꾸려는 수작이 아닐까요?”
그건 아닌 거 같았다.
그런 수작이라면 애초에 본인이 여명회란 사실을 숨기지도 않았을 터.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제가 조사해볼게요. 그자의 목적이 무엇인지 저도 궁금해졌거든요.”
“부탁드리겠습니다. 그자는 강충구 비서실장을 죽인 강력한 용의자입니다.”
유지은은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고개를 숙이며 답하였다.
“…예. 반드시 알아내 올게요.”
그녀가 물러나자 정소연이 내게 다가와 한국의 소식을 전하였다.
“무공 아카데미에서 한새 씨를 찾는 전화가 계속 오고 있어요.”
“무슨 용건이랍니까?”
“복수 때문에 그러는 거 같아요.”
“복수라면 강충구 비서실장의 복수를 말하는 겁니까?”
“…맞아요.”
생각해보면 무공 아카데미에는 나만큼이나 강충구의 복수를 원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의 사매, 사제들이 그러했고 그에게서 진법 강의를 들었던 교수들이나 학생들 역시 그의 복수를 갈망하고 있을 것이다.
‘역시 내가 앤디 올드먼을 죽였어야 했나?’
앤디 올드먼이 괜히 나를 보고 겁을 먹은 것이 아니었다.
사실 나는 그를 본 순간, 그를 죽일 것을 진지하게 고민하였었다.
만약 내가 IHA 협회장이 아닌, 일개 개인이었다면.
그랬다면 아마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IHA 협회장이었다.
미국의 영웅으로 알려진 앤디 올드먼을 죽일 수 없는 위치란 뜻이었다.
“이미 몇 명은 비행기에 탔다고 하네요.”
“학교는 어쩌고 미국으로 온답니까?”
나는 그렇게 묻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동료가 죽었는데 수업이 중요할까 싶었다.
“이정 본부장은 아예 브라질 대통령을 체포하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정까지 저리 나설 정도면 확실히 강충구가 무공 아카데미에서 평판이 좋기는 했던 모양이다.
‘슬슬 남미 빌런 연합을 정리할 때가 되긴 했지.’
남미 빌런 연합 때문에 강충구가 죽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영향이 아예 없다고도 보기 어려웠다.
미국에 약쟁이 헌터들이 넘쳐나는 것도 남미에서 마약을 유통했기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이사들을 불러주십시오. 남미 빌런 연합을 어찌 처리할지를 두고 회의하겠습니다.”
“예, 바로 불러올게요.”
정소연이 물러나자 나는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당장 강충구의 복수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남미 빌런 연합만큼은 지금 즉시 응징에 나서리라.
워싱턴 D.C.에서 빌런들이 난동을 부린 사태를 두고 전 세계가 큰 충격에 빠졌다.
“IHA에서 출동한 헌터들이 아니었으면 수십 명 정도가 아니라, 수천 명이 다쳤을지도 몰랐겠는데?”
“수천 명이 뭐야. 난동을 일으킨 A급 빌런만 무려 열 명인데.”
미국 대통령이 죽을 뻔하고 수십 채의 건물에 화재가 나는 등, 워싱턴 D.C. 전체가 소란에 빠진 것에 비하면 인명 피해 자체는 적은 편이었다.
다 합해서 겨우 50명 정도가 죽거나 다쳤으니 말이다.
하지만 연루된 헌터들의 랭크가 너무 높고 그들의 동기도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IHA에서 발표하기를, 이번 사태의 원인이 펜테리움이라는 마약에 있다는데?”
“펜테리움? 그거, 헌터들이 사용하는 각성제 아니야?”
“웬만한 헌터들이라면 다 각성제로 쓰긴 했는데, 그게 부작용이 엄청 심하대. 이번에 난동 부린 헌터들도 다 그 약 먹고 이성을 잃은 거래잖아.”
“미친! 이성을 잃게 만드는 마약이라니.”
“그러면 펜테리움을 복용한 헌터들은 사실상 시한폭탄이나 다를 게 없다는 거잖아!”
원래도 IHA에서 펜테리움은 부작용이 심한 불법 마약이라고 주장하였었다.
하지만 마약의 위험성에 대해 경각심이 낮은 미국에서는 지금까지 펜테리움의 부작용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그저 머리가 조금 나빠지는 정도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다 멕시코 사태에 이어 워싱턴 D.C. 사태까지 일어났다.
이제 미국에서 펜테리움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펜테리움에 대한 여론이 극도로 악화하고 있을 때, IHA의 대변인이 공식적으로 성명을 발표하였다.
<펜테리움을 유통하는 모든 조직을 박멸할 것!>
<박한새 협회장, “설령 국가 권력자라고 해도 예외는 없다.”>
이 같은 IHA의 선언은 남미 빌런 연합을 완전히 말살하겠다는 선포와 다를 것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