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오랜만에 정승호가 나의 집무실을 찾아왔다.
“덕분에 중국 구경을 실컷 했어.”
“정승호 길드 마스터께는 늘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중국에서 반체제 인물로 찍힌 헌터들을 규합하는 일은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IHA에서 공개적으로 진행할 수는 없었다.
지금도 IHA를 바라보는 각국 정부의 시선이 그리 곱지 않은데, 중국의 내전을 준동한다는 의혹에까지 휘말리면 여론은 최악으로 치달을 것이다.
그렇기에 죽음의 천사라 불리는 김수민을 전면에 내세웠다.
물론 김수민 혼자서는 인력의 한계가 있었기에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
눈앞의 정승호도 이번에 도움을 준 인물이었다.
“그런데 자네는 중국을 참 좋아하는 모양이군.”
“제가 중국을요?”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중국 반체제 헌터들에게 무공을 가르치면 언젠가 중국이 여러 개로 나누어지지 않겠어?”
“그게 중국을 좋아하는 겁니까?”
“중국을 얼마나 좋아하면 중국이 많아지는 걸 바라냐는 말이지. 내 말은.”
“인터넷에서 널리 퍼진 밈도 잘 알아듣지 못하다니. 자네에게 소연이를 주는 건 다시 생각해봐야겠어.”
“소연 씨가 물건도 아니고 주고받고 할 게 뭐가 있습니까.”
“…자네를 보면 가끔 답답할 때가 있어.”
그러자 정승호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자네, 소연이에 대해 별생각 없지?”
“정소연 씨에 대한 마음이 어떻다고 논하기 이전에, 지금은 연애할 생각이 없습니다.”
“연애할 생각이 없기는. 마음이 있다면 시기가 문제겠어? 너의 부모는 그 아수라장 같던 격변기에서도 사랑을 나눴는데 말이야.”
“소연이가 정 그렇게 마음에 안 든다면 차라리 확실하게 말하는 것이 어때?”
“소연 씨가 저에게 고백한 것도 아닌데 뭘 말합니까.”
“자네도 소연이의 마음은 대충 알 거 아닌가.”
“요즘 언론에서 자네를 두고 뭐라 하는지 알아?”
“독재자 소리는 많이 듣고 있습니다만.”
“독재자는 무슨. 내가 그런 거 신경 쓸 거 같아? 그딴 별명보단 의자왕이란 평판이 더 신경 쓰여.”
그런 기사라면 나도 본 적이 있었다.
황색 언론에서는 나를 무슨 카사노바처럼 보도하고 있었으니까.
“진수호 길드 마스터의 딸도 자네를 좋아한다지? 심지어 유지은 길드 마스터도 그렇고.”
“그분들이 저를 좋아한다는….”
“아무튼! 소연이에게 마음이 없다면 확실하게 말하는 게 좋다고 봐.”
“…예. 노력해보겠습니다.”
“아무래도 내 조카 일이라서 괜히 오지랖 좀 부렸어.”
“근데 조카 일이 어떻게 되든, 나는 자네의 편이야. 귀찮은 일을 많이 시키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자네가 하는 일을 생각했을 때, 자네를 응원하지 않을 수 없거든.”
“이번에 중국 일도 그래. 안 그래도 중국 놈들 마음에 안 들었는데, 내 마음에 쏙 드는 계획이었어.”
내 최측근들을 제외하면 나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정승호가 아닐까 싶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더 안 시켜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정승호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저리 약한 척 굴어도 결국 내 부탁을 들어줄 것이다.
가벼워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그의 정신은 영웅 그 자체였으니 말이다.
마법 학교 수업이 끝나자 빅터 그린은 하품하며 기지개를 켰다.
“젠장! 오늘도 룬어만 지겹게 외웠네!”
마법 학교의 수업은 그가 기대했던 것과 사뭇 달랐다.
빅터 그린은 바로 마법을 배울 것을 기대하였었다.
앤디 올드먼이 보여주었던 그 엄청난 마법들!
그는 어서 그 마법을 배워 7성급 던전, 아니 8성급 던전까지 도전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작 마법 학교에서의 수업은 지지부진하기 그지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룬어라는 정체 모를 언어만 배우는 것이 수업의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머리가 좋아서 원거리 딜러를 한 게 아닌데 말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무공 학교에 가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들었다.
그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마법의 장점을 생각하였다.
‘무공을 배우면 무조건 근접전을 치러야 하잖아? 품위 없게 말이야. 반면 마법을 배우면 굳이 근접전을 치를 필요가 없단 말이지.’
어찌 보면 우스운 이유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근접전을 치르기 싫다.’라는 이유로 마법을 선택하는 헌터가 적지 않았다.
특히 원거리 딜러인 경우 근접전이 낯설 수밖에 없었다.
강력한 스킬을 가진 헌터는 단 한 번도 근접전을 치른 적이 없는 경우도 존재하였다.
그리고 빅터 그린이 바로 이런 사례였다.
이런 빅터 그린이니 무공 대신 마법을 선택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게 누구야? 내 친구, 게리 아니야!”
마법 학교에서 하교하던 도중, 그는 헌터 학교의 동기를 만났다.
빅터 그린이 B랭크 헌터가 되면서 조기 졸업한 것과 달리, 아직도 헌터 학교에 다니는 동기였다.
“…오랜만이다.”
“게리, 잘 지냈냐?”
“어. 잘 지냈어.”
“잘 지냈다는 놈이 왜 목소리는 X 같냐?”
빅터 그린은 게리란 이름을 가진 헌터를 향해 거친 말을 내뱉었다.
누가 봐도 친구를 대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실제로 빅터 그린은 게리를 자신의 친구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심심할 때 장난치는 일종의 장난감으로 생각하였다.
“내 목소리가 어때서?”
“목소리가 어때서? 너, 말투가 좀 건방지다?”
“너보다는 나은 거 같은데?”
“게리야. 오랜만에 봤더니 내가 누군지 까먹었나 봐?”
빅터 그린은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이 순간 그가 느끼는 감정은 황당함과 분노였다.
‘이놈이 감히?’
그는 굳이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뒤지기 싫으면 그만 깝쳐. 더 깝치면 내가 이 능력으로 널 불태워버릴 수도 있어.”
화아악!
빅터 그린의 손에서 거대한 불이 치솟았다.
스킬을 사용한 것인데, 당연히 도심 한복판에서 스킬을 사용하는 행위는 불법이었다.
사람을 상대로 사용할 경우, 징역 3년 이상에 처할 수 있는 중죄였고 말이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설마 게리 같은 겁쟁이가 자신을 신고할 것이란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게리는 그를 신고하지 않았다.
신고하는 대신 그의 복부를 향해 주먹을 내지를 뿐이었다.
게리가 날린 일격에 빅터 그린은 배를 부여잡고 바닥에 쓰러졌다.
B랭크 헌터인 그가 아무리 방심했다지만, D랭크 헌터의 일격을 맞고 쓰러지다니?
고통으로 일그러졌던 빅터 그린의 얼굴은 이내 분노로 가득 찼다.
“이, 이 새끼가…!”
그는 참지 못하고 스킬, 화염구를 날렸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날리려고 모션만 취했다.
화염구는 게리에게 날아가지 못하고 허공에서 사라졌다.
‘왜, 왜 몸이 안 움직여!’
빅터 그린은 게리에게 반격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어찌 된 것인지 그의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움직이라고!’
그가 꼼짝도 하지 않는 자신의 몸을 보고 답답해할 때, 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같은 놈 때문에 괜히 학과장에게 찍히고 싶지 않으니, 그냥 얌전히 자라.”
빅터 그린은 최면제라도 맞은 듯, 갑자기 눈꺼풀이 무거워진 것을 느꼈다.
안간힘을 쓰며 버티려고 하였지만 이내 그의 눈이 스르르 잠겼다.
“다신 보지 말자.”
콘크리트 바닥에 쓰러진 빅터 그린의 귓가에는 게리의 목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왓 더 퍽!”
병원에서 깨어난 빅터 그린은 괴성을 질렀다.
“게리 그놈에게 내가 졌다고? 스킬 한 방도 날리지 못한 채로?”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B랭크 헌터가 D랭크 헌터에게 당하다니?
심지어 게리는 실전 경험조차 없는 햇병아리가 아니던가.
‘애초에 그놈은 나와 같은 원거리 딜러였잖아!’
게리의 스킬은 프리징 애로우.
일명 빙결 화살이었다.
오크도 못 잡을 거 같은 그런 스킬의 소유자였으니 빅터 그린이 우습게 여긴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런 게리가 자신을 압도했다는 게 빅터 그린은 믿어지지 않았다.
트루먼 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설마 무공? 놈이 무공을 배운 건가!’
그러다 불쑥 무공이 떠올랐다.
단기간에 무력을 키울 방법은 그가 알기로 무공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면 게리는 스킬로 그를 쓰러뜨린 게 아니었다.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하듯 날렵하게 그의 뒤로 와서는 손가락으로 꾹 눌렀을 뿐이었다.
‘아마 그게 점혈이란 거겠지?’
점혈이 맞을 것이다.
스킬이었다면 그가 반응도 하지 못한 채 무방비하게 기절하지는 않았을 테니.
물론 게리가 점혈을 사용한 게 맞다고 해도 그의 실력에 문제가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Fuck! 이게 다 마법 때문이야!’
하지만 빅터 그린은 절대 자신의 탓을 하지 않았다.
빅터 그린이 생각하기로 자신에겐 문제가 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오직 하나.
마법이었다.
만약 그가 룬어를 배운다고 허송세월하지 않았다면?
게리처럼 무공을 배웠다면 어땠을까.
이렇게 굴욕을 당하는 일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게리를 압도하였을 터!
‘게리 따위에게 굴욕을 당했는데도 계속 마법 학교를 다녀야 할까?’
안 그래도 마법 학교에 다니는 것에 회의적인 생각을 품고 있던 그였다.
그런데 자신의 상대가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게리에게 굴욕을 당하기까지 하자 더더욱 회의적으로 변하였다.
‘마법 학교 따위 자퇴해버리자!’
애초에 선택을 잘못했다.
제대로 검증되지도 않은 마법을 선택한 게 그의 실수였다.
게리가 산증인이지 않은가.
‘오늘부터 나도 무인이다!’
“스승님. 자퇴생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또 누가 자퇴했지?”
“빅터 그린이라는 B랭크 헌터가 자퇴하였습니다.”
앤디 올드먼의 얼굴은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헌터를 마법 학교로 불러들이려고 그가 얼마나 노력을 많이 하였던가.
미국 이곳저곳을 돌면서 광대마냥 마법 쇼를 하며 간신히 헌터들을 끌어들였었다.
그중 빅터 그린이란 자는 몇 없는 고랭크 헌터였다.
마법 학교에 입학한 헌터 대부분이 D랭크 이하의 저랭크 헌터였던 것이다.
“자퇴한 이유는… 아니, 됐다.”
굳이 자퇴한 이유는 묻지 않았다.
뻔했기 때문이었다.
‘즉각적인 무력 상승이 없으니 그게 답답해서 자퇴한 거겠지.’
마법은 무공과 달랐다.
무공의 경우, 단전을 만들면 급격한 무력 상승을 경험했고, 또 체내의 마력을 단전의 내공으로 전환하면 또 한 번의 무력 상승을 경험하였다.
사부가 누구냐에 따라, 그리고 자질이 어느 정도 뛰어나냐에 따라 이 두 가지 과정이 일주일도 안 돼서 끝이 날 수도 있었다.
자질만 뛰어나다면 일주일 만에 최소 하나의 등급을 뛰어넘는 실력을 가지게 된다는 뜻이었다.
반면 마법은?
일주일은커녕 한 달이 지나도 무력에 큰 변화가 없었다.
룬어를 다 외우기 전까지는 마법을 익힐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스승님. 아무래도 오러 마법을 일찍 공개해야 할 거 같습니다.”
오러 마법.
그것은 그의 스승, 매디슨이 2년 가까이 연구한 끝에 간신히 만들어낸 마법이었다.
하지만 아직 연구가 끝나지 않아, 실전에서 사용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일단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게 중요해.’
조금 더 감추고 싶었지만, 그에겐 여유가 없었다.
자칫하면 마법이 제대로 흐름을 타기도 전에 도태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