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유럽의 소식을 들은 IHA 요원들은 피식 웃었다.
“역시 우리밖에 없지. 흐흐.”
“그러니까. 진즉에 우리한테 맡기지 왜 나대서 피해를 보고 그러냐.”
“그래도 악신이란 놈이 꽤 강하긴 한가 본데?”
“그래봤자, 무공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야.”
“인정. 악신 따위 협회장님 앞에서는 한 방이면 끝이지.”
그들 역시 루키푸구스의 무력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은 인정하였다.
대마법사라 불리는 앤디 올드먼조차 감당하지 못한 무력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들은 박한새를 믿었다.
무공을 익히는 이들에게 있어 박한새는 거의 신과 다를 게 없는 위상을 자랑하였으니까.
“아무튼, 튀니지 결사대가 실패했으니 우리에게도 기회가 있겠지?”
“당연하지. 이미 유럽에서는 우리의 출전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던데?”
“문제는 원정대에 속할 수 있을지, 없을지야.”
“아프리카까지 가야 하는 건데, 경쟁이 빡셀까?”
“아프리카가 뭐야. 화성으로 가라고 해도 경쟁률 빡셀걸?”
박한새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IHA 요원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원정대에 참가하고자 하였다.
이미 러시아나 멕시코 등에서 박한새와 원정을 함께하면 많은 것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북아프리카로의 원정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IHA의 지도부라 할 수 있는 간부들의 의견은 조금 달랐다.
“저는 솔직히 유럽을 도와야 하는지 그것이 의문입니다.”
“맞습니다. 애초에 마법사 따위를 믿고 우리를 배제한 것부터 건방지지 않습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필승법이 있는데 자기들 욕심 때문에 우리를 배제해서 애꿎은 희생만 본 거 아닙니까?”
“자기들이 먼저 우리를 배제하겠다고 했으니, 우리 없이 자기들끼리 문제를 해결해야지요.”
“뭐, 저들이 먼저 무릎을 꿇고 애걸복걸한다면 그때는 또 고민해봅시다.”
IHA 간부들도 원래는 루키푸구스 토벌에 긍정적인 편이었다.
유럽에 IHA의 힘을 보여주는 것.
유럽에서 영향력을 늘리려면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하였다.
루키푸구스의 위험성도 인정하였고 말이다.
하지만 막상 루키푸구스 토벌에서 IHA가 배제되니 그들은 루키푸구스 토벌에 회의적인 감정을 품기 시작하였다.
토벌 과정에서 입게 될 피해도 피해지만, 유럽 국가들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이다.
유럽은 전통적으로 IHA의 힘이 약했다.
8성급 던전 브레이크 사태가 벌어졌을 때도 유럽 각국은 IHA의 지시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사태를 수습하였었다.
그 과정에서 입지 않아도 될 피해를 입은 것은 굳이 언급할 가치도 없었다.
유럽의 태도가 이러한데 IHA의 희생을 무릅쓰고 튀니지 결사대를 구할 이유가 있을까?
적어도 IHA 간부들은 그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근데 우리끼리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협회장님의 생각이 중요한데.”
“…그건 그렇죠.”
“협회장님이라면 당연히 유럽을 구하자고 하실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말릴 때까지 말리고 협회장님이 강하게 주장하시면 늘 그렇듯 져주는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장성민이 내게 찾아와 IHA 간부들의 의견을 전해주었다.
“제가 튀니지 결사대를 언제 구출하러 갈지 많이들 궁금해하나 봅니다.”
“예. 근데 사실 북아프리카로 출동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이 조금 더 많습니다.”
“이유는 뭡니까?”
“직설적으로 말하면 호구가 되기 싫다는 이유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확실히 지금 북아프리카로 가면 호구 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야말로 똥 싼 사람은 따로 있는데 우리가 똥을 치워주는 꼴이었으니까.
“당장 북아프리카로 출동할 생각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튀니지 결사대에 관해 공식적으로 어떤 입장도 밝히지 않았다.
구하긴 해야 했다.
하지만 부탁을 들어주는 쪽이 되어야지, 수고를 대신하는 쪽이 될 수는 없었다.
“북아프리카 말고도 상황이 급박한 나라는 많지 않습니까? 이를 테면, 에콰도르라든가.”
유럽의 여론이 떠들썩하였다.
바로 북아프리카로 출동할 것으로 생각했던 내가 전혀 그럴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럽이 조금 당황한 거 같습니다.”
“왜요?”
“사부께서 당연히 튀니지 결사대를 구출할 것이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호호. 우리를 완전히 호구 취급하는 모양이네요.”
유지은은 웃으며 그리 말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녀 역시 IHA를 대하는 유럽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저를 비난하지는 않습니까?”
“비난할 수는 없죠. 사람을 구하고 있는데.”
나는 지금 튀니지 결사대의 생존자를 구출하지 않고 방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이런 나를 비난하지 못했다.
내가 지원 온 에콰도르에는 무려 8성급 던전 브레이크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제 에콰도르의 위기가 해결되었으니 더 꾸물거리면 여론이 바뀌긴 할 것이다.
“한새 씨. 인도네시아에서도 8성급 던전 브레이크 사태가 터졌다는데, 저희가 지원을 가는 건 어떨까요?”
“좋습니다. 8성급 던전 브레이크 사태를 수습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지요.”
하지만 위기에 빠진 나라는 에콰도르만이 아니었다.
전 세계 기준으로 보면 평소에도 던전 브레이크는 많이 터지곤 했다.
특히 ‘돈’이 안 되는 던전의 경우 그런 일이 잦았다.
민간 길드가 돈이 안 되는 던전을 제대로 관리하는 경우는 드물었으니.
8성급 던전 브레이크 사태가 벌어진 뒤에는 이런 일이 더 잦아졌다.
헌터들의 수준이 낮은 나라의 경우, 8성급 던전 보스를 처리하지 못해서 던전이 잠식되는 경우도 많았으니 말이다.
인도네시아에서 터진 8성급 던전 브레이크도 바로 그런 경우였다.
인도네시아의 던전 브레이크도 금방 진압이 되었다.
사실 내가 직접 나서기도 전에 간부들이 다 처리하였다.
8성급 던전 보스도 이제 나 없이 잡을 수 있는 수준이 되었던 것이다.
‘또 어디를 가야 하나?’
다음에는 어느 나라를 도우러 가야 할지 생각하는데 장성민이 내게 찾아와 보고하였다.
“협회장님, 유럽의 협상단이 찾아왔습니다.”
“협상단이라.”
북아프리카에 안 가고 계속 다른 나라만 빙빙 돌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유럽 국가들이 마침내 조급함을 드러냈다.
아무것도 주지 않고 나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모양이었다.
‘물론 나 역시 그들이 진짜 위험한 상황이었으면 주저하지 않고 도우러 갔겠지만 말이야.’
지금 튀니지 결사대가 겪고 있는 상황은 겉으로 보면 심각한 상황처럼 보였다.
아니, 적지 한복판에서 던전에 감금된 상황이니 심각하다면 심각한 상황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회귀자인 나에게 있어 튀니지 결사대가 처한 상황 정도는 그리 심각하다고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던전에 들어갈 수 없는 몸인 나는 거의 한 달 넘게 몬스터에게 쫓기고 쫓겼던 적도 있었으니까.
‘더군다나 앤디 올드먼도 있고.’
적이지만, 어쨌든 그의 무력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튀니지 결사대를 지휘하는 게 앤디 올드먼인 이상, 한 달 정도는 거뜬히 버틸 수 있으리라.
“그들이 무슨 제안을 할 거 같습니까?”
“일단 북아프리카의 던전들은 다 저희에게 넘기지 않겠습니까?”
사태를 수습한 건 우리인데 정작 던전을 관리하는 건 유럽이라면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아마 아프리카에 새로 설립될 정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지분을 인정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튀니지 정부에 대한 지분이라.
솔직히 그런 것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한국에 있었을 때부터 정치와 연관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유럽의 영향력을 조금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나쁘게만 볼 건 없지.’
식민지까지는 아니지만, 사실상 유럽의 간섭을 피할 수 없는 게 앞으로 세워질 튀니지 정부였다.
나로선 21세기판 제국주의가 부활하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기에 유럽의 영향력은 최소화할수록 좋았다.
“저는 그것보다 유럽에서의 IHA 영향력을 확대하고 싶군요.”
“그건 아마 쉽지만은 않을 거 같습니다.”
“그렇겠죠. 유럽인들의 자존심이야 예전부터 알아주는 것이었으니.”
앞으로 겪게 될 인류의 위기를 생각하면 IHA의 영향력은 계속해서 확대되어야 했다.
IHA의 영향력이 강해지지 않는다면 유럽의 각국은 각자도생하려다 각개격파 당하리라.
장성민과 대화를 나누는데 유럽 협상단이 접견실에 도착하였다.
“도와주십시오. 도와주시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저희 이탈리아 역시 박한새 협회장님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겁니다.”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독일 등등.
각국 정부와 헌터 협회에서 보낸 인사들의 면면은 실로 화려하였다.
협회에서 나온 사람들은 협회의 일인자이거나 최소 이인자였고 정부에서 나온 사람들은 장관이 직접 온 경우도 있었으니까.
심지어 그 바티칸의 사람까지 왔으니 더 말해봐야 의미가 없었다.
IHA 협회장이 유럽에서 이만한 대우를 받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싶었다.
물론 지금 유럽의 여론이나 튀니지 결사대에 속한 헌터 명단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튀니지 결사대의 멤버들은 그야말로 유럽의 미래나 다름없을 정도로 최정예들이었으니 말이다.
내가 말문을 열자 협상단이 어서 물어보라며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왜 사탄주의자와 함께 온 것입니까?”
“그게 무슨…?”
협상단 대표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 통역을 맡은 통역가 한 명이 갑자기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 눈치 빠른 인간 놈이구나!”
“다, 당신 왜 웃는 겁니까?”
“이놈들은 아직도 내 정체를 모르는 거 같은데…, 큭큭!”
통역가는 유럽 협상단 전체를 비웃었다.
아직도 자신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유럽 협상단이 우습게만 느껴졌던 모양이다.
“화신인가?”
“화신이 뭔지도 아는 모양이야. 인간 주제에 아는 게 많아 보여?”
“너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
내 손에는 어느새 푸른 예기의 검이 뽑혀 있었는데 나는 그 검을 사내의 목에 겨누었다.
하지만 그는 눈도 깜빡하지 않은 채 내게 물었다.
“박한새. 내가 너를 찾은 이유가 궁금하지 않은가?”
“이유가 뭐지?”
“나는 루키푸구스의 사자로서 너를 찾아왔다.”
루키푸구스의 사자라고 하는 걸 보면 화신이 아닌 단순한 권속이었던 모양이다.
‘그런 주제에 인간이 어쩌고저쩌고, 마치 본인은 인간이 아닌 것처럼 말하는군.’
나는 조소를 흘리고는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루키푸구스가 내게 전할 말이 무엇이지?”
“경고다.”
“경고라…….”
“내가 알기로 인간 중에서는 가장 강하다지?”
“그런데?”
“명예가 중요한 위치일 거야. 물론 목숨도 중요하겠지만.”
마치 자신을 잡으러 북아프리카로 오면 명예도, 목숨도 잃을 거라 말하는 듯하였다.
실제로 그런 의미가 맞을 것이고.
“내가 악신 따위를 두려워할 거 같은가?”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선택하겠다는 건가?”
악신이라는 자가 저런 말도 하다니.
나는 같잖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는 이내.
‘이야기를 더 들어줄 필요는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