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
“조, 조건이란 게 무엇입니까?”
“원정대에 합류하기 위해선 IHA 소속이 되어야 합니다.”
“상관없습니다! 강해질 수만 있다면!”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전 같았으면 헌터 협회의 눈치를 봤겠지만, 지금은 협회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그들이 던전에 갇혔을 때 협회가 무엇을 했던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을 구출한 건 평소 그들이 낮잡아 보던 IHA였다.
심지어 그 IHA의 협회장은 앤디 올드먼도 잡지 못했던 루키푸구스를 혼자 잡기도 했고 말이다.
이러니 IHA에 들어가는 것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협회장님. 저 역시 원정대에 합류하고 싶습니다만.”
“앤디 올드먼. 당신은 원정대에 합류할 수 없습니다.”
내 단호한 거절에 앤디 올드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당신은 마법사이기 때문입니다.”
“마법사라서 안 된다니….”
황당한 표정을 짓는 그를 무시하고 나는 그의 뒤편에 서 있는 마법사들을 향해 말하였다.
“앤디 올드먼 외에도 마법을 배운 헌터는 원정대에 합류할 수 없습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의혹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마법사가 악신과 관련되어 있다는 의혹이.”
“…악신이라니. 무슨 누명을 씌우는 겁니까!”
앤디 올드먼이 분개한 얼굴로 외쳤다.
그의 표정만 보면 악신과 연루되었다는 내 말이 그에게는 엄청난 모욕인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그의 가증스러운 연기에 속으로 조소를 지었다.
‘파롤의 졸개인 주제에.’
물론 속으로만 하는 생각이었다.
아직은 증거를 댈 수 없었기에 의혹을 제기하는 것으로 넘어가야 했다.
어쨌든 의혹이 있으면 내가 편협하게 굴었다는 논란이 생기지는 않을 테니까.
명분이란 그래서 중요하였다.
“해명은 본국으로 가서 하십시오. 이곳에는 당신이 설 자리 따윈 없으니까.”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가 올 겁니다. 그때 후회하지 마십시오.”
과연 그런 일이 생길까?
‘설령 그런 일이 생겨도 마법사의 도움을 받느니, 차라리 원정을 포기하는 게 낫다.’
그렇게 나는 튀니지 결사대 생존자 1500명과 IHA의 유럽 지부 요원 500명을 데리고 원정을 이어나갔다.
“갑자기 기분이 이상한데요?”
“저도 느꼈습니다. 뭔가 몸도 축 처지는 느낌인데….”
감각이 예민한 김민경과 이성은이 내게 다가와 그렇게 말하였다.
현재 우리는 튀니지 서쪽에 있는 알제리로 향하고 있었다.
알제리 역시도 인간의 땅이 아닌 걸 증명하듯 간간이 몬스터 무리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 정도로 원정대를 동요하게 할 수는 없었다.
원정대 멤버들의 수준은 8성급 몬스터가 떼로 몰려와도 여유롭게 퇴치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물론 내가 나선다면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고 말이다.
‘다만 여기는 조금 다르군.’
역시 악신이 지배하는 영토라서 그런 것일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분위기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저주입니다.”
“저주라고요?”
“예, 이 일대를 지배하는 악신이 지역 전체에 저주를 사용한 거 같습니다.”
“그럼 컨디션이 갑자기 안 좋아진 것도 저주 때문이겠군요.”
두 사람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상대가 악신인데 저주 정도로 놀랄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저주를 어떻게 없앱니까?”
“매개체를 제거해야 합니다.”
“매개체라면?”
“화신이나 던전 등을 말합니다. 화신이 매개체일 수도 있고, 던전이 매개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 그 매개체를 제거하기 전까지는 저주를 견디는 수밖에 없는 건가요?”
김민경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고 지역 전체에 광범위하게 퍼진 저주를 차단할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럴 때는 그저 무공으로 저주를 이겨내는 방법이 최선이었다.
“단전의 내공을 독맥으로 백회까지 올렸다가 임맥을 통해 다시 단전으로 되돌리는 과정을 반복하면 저주가 풀리긴 할 겁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헌터는요?”
“그들만큼은 따로 방법이 없습니다. 각자 가진 역량으로 이겨낼 수밖에.”
무책임한 발언일 수 있었다.
무공으로 그들의 저주까지 해결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래도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에게는 고정희 교수님이 계시니 말입니다.”
세계 최고의 결계술사라 불리는 것이 고정희였다.
그녀가 펼친 결계 안에서는 이름 모를 악신의 저주도 전혀 통하지 않을 것이다.
“적이다! 적이 나타났다!”
누군가의 외침에 헌터들은 바로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적은 나타나지 않았다.
“제라르! 적이 어디 있다는 거야!”
“바보들아! 저기 안 보여? 바쿠 무리가 있잖아!”
모두가 제라르라는 헌터가 가리킨 방향을 보았다.
그곳에는 그저 나무 한 그루만이 외롭게 서 있을 뿐이었다.
“뭐가 있다는 거야?”
“악! 저기 사탄도 있다! 사탄이 아직 살아 있어!”
“사탄? 그놈이 죽은 지가 언젠데!”
“시체 무덤이 움직이고 있잖아!”
제라르는 패닉에 빠져서는 횡설수설하였다.
처음엔 바쿠 무리가 나타났다고 하더니 그 뒤에는 사탄이 나타났다고 하고 그 뒤에는 또 오우거와 사이클로프스가 나타났다고 하였다.
심지어 앤디 올드먼을 외치며 다급히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였는데, 누가 봐도 비정상처럼 보였다.
“저 새끼, 미친 거 같은데?”
“병신 같은 놈. 의지가 얼마나 나약하면 저주 따위에 당하는 거야?”
“프랑스의 수치다!”
이내 동료들은 혀를 차며 제라르를 한쪽으로 격리시켰다.
이미 IHA 간부들로부터 이 지역에 저주가 광범위하게 깔려있다는 설명을 들은 그들이었다.
그렇기에 제라르가 이상한 행동을 하여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제라르는 시작에 불과하였다.
“제발 개 짖는 소리 좀 안 나게 해라!”
“무슨 개 짖는 소리?”
“이 소리 안 들려? 미친 개새끼들이 시끄럽게 굴고 있잖아!”
환청, 환시, 환후.
저주에 빠진 헌터들은 들리지 않는 것을 들었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았으며 맡지 않은 것을 맡았다.
그리고 하나같이 정신 이상 증세를 보였는데 심지어 동료를 공격하려는 헌터도 존재하였다.
“고정희 교수님.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바로 결계를 펼칠게요.”
저주에 빠진 인원이 늘어나자 나는 행군을 중단시키고 고정희에게 결계를 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자 고정희의 몸속에서 엄청난 양의 내공이 빠져나오더니, 반원을 그리며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이내 반경 수백 m를 중심으로 반투명한 결계가 설치되었다.
“저주에 당한 대원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다시 상태가 멀쩡해졌습니다.”
“회복은 그런대로 빠른 모양이군요.”
“예, 다만 후유증이 남아있는지 수면 시간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럼 시간도 늦었으니 오늘은 여기서 휴식을 취하면 될 거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취침 준비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렇게 주현근이 물러나자, 다른 교수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식으로라면 10km 전진하는 데도 한 세월이 걸리겠군요.”
차라도 끌고 다녔으면 조금 달랐을지도 모른다.
저주에 걸리더라도 목적지까지 빠르게 도착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도로도 전부 파괴되었고 무엇보다 몬스터가 워낙 많아서 차를 끌고 다닐 여건이 아니었다.
결국, 지금처럼 행군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는 뜻인데, 이런 식이라면 시간이 오래 걸릴 거 같기는 했다.
“사부님. 매개체만 처리하면 되는 거라면 꼭 원정대 전원을 데려갈 필요가 있을까요?”
이성은이 내게 불쑥 그와 같은 말을 꺼냈다.
“절정 고수들이 먼저 출발하여 매개체를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확실히 이성은의 의견대로 하는 것이 효율적이긴 했다.
‘원정대는 사실상 짐이 되어버렸군.’
사실 예상했던 일이긴 했다.
원정대 멤버로 튀니지 결사대만 받아들인 것도 어차피 짐이 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예 처음부터 무공을 익힌 이들로 원정대를 구성했다면 이런 일도 없었겠지만 말이다.
“다른 분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나 역시 찬성이다. 화신이고 뭐고, 우리 손으로 정리할 수 있는데 굳이 짐 덩어리를 끌고 갈 필요는 없잖아?”
“짐 덩어리는 아닙니다. 던전을 관리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꼭 필요한 인력입니다.”
“어쨌든, 지금 당장 짐이 되는 것은 사실이잖아?”
이정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른 이들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다른 이들 역시 원정대와 따로 움직이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심지어 로렌초의 경우 이런 말을 하였다.
“사부는 여기서 쉬고 있어라. 악신은 우리가 정리하겠다.”
아예 나까지 배제하겠다는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황당하게 여기다가, 이내 쓰게 웃었다.
생각해보면 모든 악신을 내가 다 잡으려고 할 필요는 없을 거 같았다.
루키푸구스의 경우야 예외일 뿐, 악신들이라고 해서 그렇게 두려워할 대상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파롤이 그러하듯 악신들이 지금 가진 무력도 한계가 있을 거다. 그러니 굳이 내가 모든 걸 하려고 하지 않아도 돼.’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그들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저는 이곳에서 대기한 채 대원들에게 무공을 가르치고 있겠습니다.”
아프리카의 악신을 토벌하는 것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알제리 북부에 똬리를 튼 이름 모를 악신의 화신 역시도 이성은의 손에 의해 제거되었다.
화신은 이상한 촉수 능력을 사용하였는데, 검기도 제대로 안 통해서 이성은은 스킬을 사용하여 간신히 잡았다.
물론 중간중간 나타나는 몬스터 무리야 다른 절정 고수들의 손에 의해 격퇴되었고 말이다.
그렇게 몬스터 무리를 처리하고 악신의 화신까지 처리하면 그 지역의 정리는 사실상 끝나는 셈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수차례 반복하며 알제리를 횡단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아프리카 수복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상황에서 우습게도 내가 집중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협회장님! 저 검기를 만들었습니다!”
“허, 벌써!”
“나도 질 수 없지!”
여기저기서 튀니지 결사대 대원들이 가부좌 자세로 호흡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래도 유럽에서 손꼽히는 인재들이기 때문일까?
하나같이 출중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단전이야 이미 대원 전체가 다 만들었고 지금은 단전의 내공을 활용하는 것을 수련하고 있었다.
‘유럽에도 바로 무공 학교를 세워도 되겠어.’
아예 영국에다 무공 학교를 설립할까?
순간 그런 생각도 해봤다.
한국이 무공의 중심지로 인정받고 있듯, 영국은 마법의 중심지로 인정받고 있었다.
영국이란 나라는 무공과 대척점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런 나라이기에 오히려 무공 학교를 세우는 것이 의미 있을 수도 있었다.
‘뭐, 만약 그렇게 하면 앤디 올드먼도 복수하겠다고 한국에다 마법 학교를 세울 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사실 그건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한국에다 마법 학교를 세워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미 유망주란 유망주는 전부 무공 학교가 데리고 있는데 말이다.
반면 영국은 마법 학교의 고질적인 인력 부족으로 학생 수가 겨우 500명이 채 안 됐으니, 무공 학교를 세우기에 여러모로 적합하다고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