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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대신 회귀함-253화 (253/275)

#253화

‘드디어 성좌들이 움직이는 건가.’

나는 유지은의 말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회귀를 경험한 나에게 있어 성좌는 꽤 익숙한 존재였다.

미래에는 세계에서 강자라 소문이 난 이들 대부분이 배후령을 가진 헌터들이었으니.

애초에 이성은부터 카펠라라는 성좌를 배후령으로 두고 있었고 말이다.

“외부의 성좌만 움직인 것은 아닐 거예요.”

“IHA 내부에도 성좌가 있잖아요.”

그러던 중 유지은이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아군을 경계하라는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특히 걱정인 것은 노홍만 교수예요.”

“노홍만 교수는 저를 배신할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아는 노홍만은 배신이란 단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사실 나를 배신할 이유가 없기도 했다.

아직 나에게 배울 것이 많이 남아있었으니까.

“한새 씨도 아시잖아요. 노홍만 교수의 개인 성향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성좌의 결정에 따라 권속의 행동이 결정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유지은 이사도….”

“물론 저 역시 경계하셔야죠. 저도 한낱 권속일 뿐이니.”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까지도 경계하라고 말이다.

“하지만 저도 저지만, 노홍만 교수가 문제예요. 저는 배신해도 한새 씨에게 큰 타격이 없지만, 노홍만 교수가 배신하면 타격이 크잖아요?”

IHA 내부에서 맡은 역할 자체는 유지은이 더 컸다.

무려 정보를 총괄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노홍만은 IHA의 미래, 조금 더 거창하게 말하면 ‘인류’의 미래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노홍만은 현재 러시아의 바스타크 던전을 관리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참고로 바스타크 던전에서는 수십만 개의 영약이 생산되는 중이었다.

“단지 그런 이유로 노홍만 교수를 의심하고 싶지 않습니다.”

“녹색 예언자가 다른 성좌들과 접촉했다면요?”

녹색 예언자는 노홍만의 성좌였다.

“그 사실은 어떻게 알아낸 겁니까?”

“저만 정보통이 아니거든요.”

“…설령 녹색 예언자가 다른 생각을 품고 있다고 해도 저의 선택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일단 노홍만 교수를 믿고 맡겼으면 끝까지 맡기되, 배신하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하면 그만입니다.”

동맹으로 여겼던 성좌의 배신?

전혀 두렵지 않았다.

이미 많은 성좌를 적으로 둔 나다.

성좌 하나가 더 적이 된다고 두려울 건 없었다.

“한새 씨는 역시 대단하시네요. 다른 성좌의 권속인 저에게 중임을 맡긴 것도 저의 배신이 두렵지 않기 때문이겠죠?”

“유지은 이사의 능력을 보고 중임을 맡긴 겁니다.”

“말만으로도 고맙네요.”

유지은이 피식 웃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나는 어깨를 으쓱하였다.

그때 장성민이 문을 노크하더니 내게 보고했다.

“S랭크 헌터들이 협회장님을 뵙고자 찾아왔습니다.”

“S랭크 헌터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유지은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아마 제가 방금 전에 이야기했던 성좌 세력에서 보낸 헌터들일 가능성이 커요.”

“그럼 한번 만나봐야겠군요.”

적이 될 가능성이 컸지만, 어쨌든 성좌 측에서 보낸 사절단이었다.

타협의 여지가 있을 수 있으니 일단 만나보는 것도 손해는 아니리라.

‘뭐 타협의 여지가 있을까 싶지만 말이야.’

성좌들이 나를 견제하는 이유는 지극히 단순하였다.

바로 무공이었다.

헌터들이 무공을 익히면서 그들이 권속으로 둘 인재가 사라진다는 이유로 나를 견제하려는 것이었다.

나로선 무공의 전파를 늦출 생각이 없으니 그들과의 타협이 어려웠다.

‘적대한다면 맞서 싸우는 수밖에.’

이미 악신 여럿과 적대 관계가 된 상태였다.

성좌 몇이 더 적대 관계가 된다고 무서워할 것은 없으리라.

칼의 형제들, 해골단, 흑기군 등등.

접견실로 들어오는 S랭크 헌터들은 하나같이 쟁쟁한 인물들이었다.

현재도 유명했지만, 미래에는 더더욱 유명해질 S랭크 헌터들.

만약 내가 없었고, 무공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들 중 한 명이 최강자로 군림하였을 터.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들의 배후에 성좌가 있다는 사실이지.’

안 그래도 헌터들이 들어온 순간, 묵직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헌터들의 존재감이 아닌, 그들의 배후에 있는 성좌들의 존재감이리라.

하지만 나는 그런 존재감을 느꼈음에도 태연하게 반응하였다.

“이렇게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오신 이유가 뭡니까?”

나는 자리에 앉기 무섭게, 그들의 태도를 지적하였다.

그들의 신분을 고려하여 일단 만나주긴 했지만, 다짜고짜 찾아온 그들의 태도는 무례하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협회장에게 급히 전해야 할 사실이 있어서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해골단 소속의 디펜드라라는 사내가 죄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그와 같이 말했다.

하지만 디펜드라만 그런 태도를 보일 뿐이었다.

나머지는 나에게 적대감을 내비치고 있었다.

“전해야 할 사실이라. 지금까지 한 번도 접점이 없었는데, 무엇을 전하려고 이러는 건지 궁금하군요.”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군요. 저는 지금부터 ‘성좌’에 관한 이야기를 할 건데, 여기서 성좌 이야기를 해도 되겠습니까?”

디펜드라가 내 옆에 앉아있는 장성민과 유지은, 정소연을 훑어보며 내게 물었다.

그러자 나는 상관없다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하였다.

이미 이 세 사람은 성좌에 관한 기본적인 정보는 알고 있으니 굳이 이들을 내쫓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무공 학교의 규모를 축소해주십시오.”

“무공 학교의 규모를 축소하라?”

“예. 저희는 지금의 절반 이하로 줄이는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터무니없는 요구였다.

이미 무공의 도입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다.

갑자기 무공 학교를 없앤다면 헌터들부터 집단적으로 반발하리라.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시는군요. 전 세계의 헌터들이 무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러분도 모르지는 않으실 텐데요?”

“협회장 본인도 비각성자이니, 비각성자 위주로 학생을 늘리면 어떻겠습니까?”

“그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요구인지 모르지는 않으실 텐데….”

“협회장도 어쩔 수 없이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건 저희가 요구한 것이 아닌, 성좌들이 요구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디펜드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갑자기 눈앞에 엄청난 광휘가 뿜어져 나왔다.

붉은색, 검은색, 보라색, 회색.

총 네 가지 색의 광휘였다.

광휘만 뿜어져 나온 것이 아니었다.

묵직한 존재감이 내 몸을 짓눌렀다.

당장이라도 고개를 숙이고 굴복하라는 듯 말이다.

나는 그런 성좌들의 행태를 보고 코웃음을 쳤다.

“현세에 관여할 능력도 없는 자들을 마치 두려워해야 한다는 듯 말씀하시는군요.”

-감히…!

그러자 성좌 중 한 명이 격분을 이기지 못했는지 분노를 토했다.

마치 김수민의 염동력이 나를 압박하듯, 엄청난 압박감이 내 몸을 짓눌렀다.

성좌는 현세에 관여할 수 없다는 내 말이 부정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단전에서 내공을 일으키자 전신을 짓누르던 압박감이 완전히 사라졌다.

결국 이 정도 수준이었다.

성좌의 힘이라는 건 말이다.

자신의 힘이 나에게 통하지 않는 것을 깨달았는지 내게 분노를 토했던 성좌는 다시 조용해졌다.

존재감도 사라진 것을 보면 아예 자리를 뜬 모양이었다.

“성좌들의 압박을 그리 쉽게 이겨낼 수 있을 줄은 몰랐군요.”

디펜드라가 놀랍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헌터들 역시 얼굴에 당황하는 기색이 흘렀다.

“그래서 더 이야기하실 것이 남아있습니까?”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 상황에서 제안이라.”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려고.

내가 시큰둥한 기색으로 디펜드라를 바라보니, 그가 갑자기 웃음을 지었다.

“저희가 무공을 배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공을 배우고 싶단 말씀입니까?”

성좌를 등에 업고 나를 압박하던 주제에 갑자기 무공을 배우고 싶다고 말하니, 나로선 황당하게만 느껴졌다.

“공적 점수를 채우면 다른 헌터들과 똑같이 무공을 배울 기회가 주어질 겁니다.”

“공적 점수란 것은 빌런을 잡으면 얻을 수 있는 거겠죠?”

“정확히는 IHA가 인정하는 공식 빌런을 잡아야 얻을 수 있습니다.”

내 말에 디펜드라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좋군요. 그래도 무공을 배울 기회는 얻었으니.”

“정말 무공을 배우실 생각입니까?”

“저희가 무공을 배우는 게 협회장에게도 손해는 아니지 않습니까?”

“적이 되지만 않는다면 손해는 아니지요.”

“저희가 무공을 배운다는 말은 협회장의 편에 서겠다는 의미와 다를 게 없습니다. 배신할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의미 없는 말이었다.

배신할 사람이 배신하겠다고 미리 선언하는 법은 없으니.

하지만 나는 더 신경 쓰지 않기로 하였다.

무공을 배운 뒤 배신한다?

지금보다 조금 더 위협적이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게 그거였다.

어차피 배후령을 둔 헌터는 전체 헌터 수에 비하면 한 줌에 불과하였다.

그들 전체가 인류를 배신한다고 해도 다른 헌터들이 인류를 위해 싸운다면 결과는 필승이었다.

“무공을 배우기 전에, 무공이 정확히 어떤 건지 알고 싶은데 말이야.”

그러던 중 한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목소리를 높였다.

가스파르 들롱이란 프랑스 헌터였는데 불어로 말한 터라 나는 알아듣지 못하였다.

다행히 정소연과 유지은이 불어를 할 줄 알아 옆에서 통역해주었다.

“무공을 알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래. 당신도 세계 최강자의 스승이 되고 싶을 거 아니야? 내 스승이 되려면 무공의 위대함을 알려달라고.”

세계 최강자라고?

나는 통역이 잘못된 줄 알고 정소연을 뻔히 쳐다봤다.

하지만 정소연 대신 유지은이 나서서 똑같은 말을 전해주었다.

‘자신감이 대단한 사내인가 보군.’

아니면 현실감각이 없던가.

뭐 기억 속의 가스파르 들롱을 생각하면 자신감이 대단한 사내이긴 했다.

그때도 무공을 배우지 않은 상태로 최강자를 자처하던 사내였으니 말이다.

“대련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제가 직접 상대해드리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가스파르 들롱을 노려보며 그와 같이 말하였다.

그러자 가스파르 들롱도 질 수 없다는 듯, 내 눈을 마주 노려봤다.

잠시 나와 눈싸움하던 가스파르 들롱의 동공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내가 기세를 점점 높여가자, 위압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내, 내가 무공을 배우게 되면 협회장이 내 선생이 될 텐데, 선생을 이겨 봐야 좋을 건 없지.”

그의 말에 유지은이 피식 웃었다.

되지도 않는 핑계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자 가스파르 들롱이 분노한 얼굴로 유지은을 노려봤다.

“그러면 저와 대련을 해보는 것은 어떤가요?”

“나쁘지 않은데…?”

가스파르 들롱은 유지은의 도발에 같잖다는 듯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

유지은이 싱긋 웃으며 기세를 끌어올리자, 가스파르 들롱이 식은땀을 흘렸다.

만만치 않은, 아니 자신보다 압도적인 힘을 가진 상대란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모양이었다.

“아니지, 아니지. 남자가 돼서 여자랑 대결할 수는 없는 법.”

“헌터와의 대결에 남녀가 어디 있나요?”

유지은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한마디 하였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장성민을 바라봤다.

“저는 비각성자입니다만…? 저라도 괜찮다면 대결해주겠습니다.”

“…쩝.”

가스파르 들롱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S랭크 헌터씩이나 돼서 비각성자와 대결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가 마지막에 고른 상대는 정소연이었다.

“너, 나와 붙자.”

“…방금 여자와는 대결하지 않는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여자였어? 몰랐네.”

“…이런 모욕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순 없죠. 저와 대결해주시겠어요?”

“하하하하! 좋다! 대결에 응해주지!”

나는 그런 가스파르 들롱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회귀 전의 기억으로 나는 그를 호탕한 남자로 알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었던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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