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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대신 회귀함-254화 (254/275)

#254화

정소연은 무표정한 눈으로 자신의 대결 상대인 가스파르 들롱을 바라봤다.

한국에서는 그리 알려진 이름이 아니었다.

하지만 유럽에서는 오래전부터 S랭크 헌터로 이름을 떨친 사내였다.

‘1:1로는 이길 수 있는 자가 없다고 했었지.’

물론 그건 무공이란 게 등장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였다.

지금의 가스파르 들롱은 유럽에서조차 예전만큼의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본인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거 같지만 말이다.

“요즘 세계 랭킹에 이전에는 이름도 들어본 적 없던 헌터들이 순위에 올라와 있던데. 단지 무공을 배웠다는 이유 하나로 말이야.”

가스파르 들롱의 말에 정소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의 대결 상대는 아직도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단지 무공을 배워서 랭킹에 올라간 것이 아니에요.”

“실력이죠.”

오히려 그녀는 더 많은 무인들이 순위에 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초일류 수준만 되어도 S랭크 헌터는 쉽게 이길 실력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까짓 무공, 과연 내 스킬 앞에서도 제대로 통할지 한번 보자고! ‘고유 영역 전개’!”

정소연은 눈을 부릅떴다.

가스파르 들롱이 프랑스어로 ‘고유 영역 전개’라는 말을 외치기 무섭게 그녀의 몸이 어디론가 순간 이동하였다.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말 그대로 순식간의 일이었다.

‘몸이 무거워.’

모든 게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무채색의 공간.

하지만 정소연은 주변의 변화보다 자신의 신체 변화를 더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이 무채색의 공간으로 순간 이동하자마자 그녀의 몸은 마치 중력에 짓눌리는 감각을 느껴야 했다.

숨을 쉬기도 어려웠고 심지어 내공까지 원활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이 공간 전체가 그녀를 적대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느낀 기분은 절대 착각이 아니었다.

“내 스킬의 효과가 어때? 크크, 아마 모든 게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거다. 몸의 감각도, 마력의 움직임도.”

절정 고수인 그녀에게 이 정도 수준의 디버프를 주는 스킬이라니.

가스파르 들롱이 보여준 자신감이 마냥 근거 없는 허세는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비록 모든 게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자신을, 정확히는 박한새가 가르쳐준 무공을 믿었다.

아무리 불리한 상황에서도 무공이 있다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으리라.

“여유 부릴 수 있을 때 부려 봐. 참고로 당신 스승도 이 공간 안에서는 나를 쉽게 못 이겨.”

“그럴 리 없습니다.”

“그럴 리 없기는 개뿔. 협회장 목에 1,000억 달러 현상금이 걸렸을 때 내가 바로 잡으러 가려고 했었는데 말이야. 그때 잡았으면 돈도 벌고 명예도 얻는 건데 아쉽단 말이지.”

“당신은 저희 스승님의 실력을 잘 모르는 거 같군요.”

“내가 모르는 건지, 네가 모르는 건지 한번 두고 보자고!”

가스파르 들롱이 엄청난 속도로 정소연을 향해 달려들었다.

정소연은 다급히 단전의 내공을 끌어올려 ‘장풍’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가스파르 들롱은 주먹을 휘두르는 것으로 너무도 쉽게 그녀의 장풍을 없애버렸다.

‘강하다.’

가스파르 들롱의 스킬은 단순히 그녀의 몸을 약화하는 게 끝이 아니었다.

그는 S랭크급 육체 강화 능력자 수준의 육체 능력을 보여주었다.

아마 이 공간 자체가 적의 능력을 약화하고 시전자의 능력은 강화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듯싶었다.

정소연은 근접전을 피하기 위해 보법을 펼쳤다.

무인이 근접전을 피하려고 보법을 펼치다니.

상당히 이례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 그녀의 몸은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니었으니까.

정소연은 근거리에서 가스파르 들롱을 상대하는 대신, 장풍을 주로 활용하였다.

장풍이 아예 통하지 않자 이번에는 스킬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호오. 이건 뭐지?”

“제 스킬입니다.”

“무공만으로는 내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알아차렸나 보지?”

가스파르 들롱의 말에 정소연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애써 평정심을 되찾은 채 스킬을 계속 전개하였다.

그러자 수백, 수천 개의 검이 허공에 생성되더니, 이내 가스파르 들롱을 향해 날아갔다.

만천화우라고도 불리는 그녀의 고유 스킬이었다.

이 스킬 하나로도 그녀는 A랭크 승급이 거의 확실시되었었다.

무공을 배운 뒤에 더 강해진 지금의 검의 해방이라면 S랭크급 강자들도 두려워할 스킬이리라.

‘이걸 다 피한다고?’

검의 해방으로 가스파르 들롱을 확실하게 제압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효타 정도는 줄 수 있을 거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결과는 예상과 전혀 달랐다.

마치 상대는 가속 능력이라도 쓴 것처럼 수백, 수천 개에 달하는 검을 모조리 피하였다.

단 한 번의 공격도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이대로는 이길 수 없어.’

정소연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직 그녀의 내공은 여유가 있었다.

한 시간 넘게 싸우는 것도 가능할 정도로.

하지만 그녀 정도의 실력자는 유불리를 빠르게 파악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길고 짧은 것을 굳이 대보지 않아도 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보기에 이번 대결은 절대적으로 자신이 불리하였다.

무언가 특별한 시도를 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녀는 내공과 체력이 다해 패배하고 말리라.

“뭐야? 계속 그렇게 피하기만 할 거야? 아까의 그 자신감은 어디 간 거냐고!”

가스파르 들롱이 다시 달려들었다.

그 엄청난 기세에 정소연은 시종일관 밀리기만 하였다.

다른 장소에서 싸웠으면 그녀가 밀릴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핑계를 대봤자 의미는 없었기에 정소연은 전투를 이어나가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승리할 방법을 구상하였다.

‘검강. 오직 검강만이 지금의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다.’

검강.

오직 초절정 고수만이 쓸 수 있는 비기 중의 비기였다.

당연히 지금의 그녀는 쓸 수 없는 기술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정신을 집중하여 검기를 만들었다.

“검기? 이제 피하지 않겠다는 뜻이냐?”

정소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목표는 검기가 아닌, 검강을 만드는 것이었다.

박한새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정신을 집중해야 하니, 가스파르 들롱과 대화할 여유는 없었다.

“어설프군. 그따위 기술로 나를 이길 수 있을 거 같으냐!”

다시 달려드는 가스파르 들롱.

정소연은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시간이 느려지는 감각이 느껴지더니, 검기가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점점 응축하는 그녀의 검기는 이내 검강 비슷한 형태를 띠었다.

가스파르 들롱도 그녀의 검강을 본 것일까?

잠시 제자리에서 멈칫하였다.

“뭔가 달라 보이는데? 하지만 그래봤자 맞지 않으면 그만이다.”

검강이 위협적으로 느껴졌는지, 더 표홀하게 움직이는 가스파르 들롱이었다.

그 날렵하기 그지없는 움직임에 정소연의 검강은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그녀가 노린 것은 가스파르 들롱이 아니었다.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가스파르 들롱이 흠칫하며 고개를 돌리니 그가 방금 있던 자리에 큰 구멍이 나 있었다.

땅이 파인 수준이 아니었다.

그가 만들었던 공간에 균열이 생겨났다.

그것도 아주 큰 균열이.

“미친! 핵을 쏴도 끄떡없을 결계인데!”

균열을 본 가스파르 들롱이 비명을 질렀다.

반면 정소연은 쾌재를 불렀다.

‘힘이 조금씩 회복된다!’

몸이 아주 약간 가벼워졌다.

물론 내공의 흐름도 더 원활해졌다.

“이것도 막아보시죠.”

정소연이 처음으로 가스파르 들롱에게 달려들었다.

아까 보여주었던 움직임과는 비교도 안 되게 날렵한 움직임으로 말이다.

“여러분은 두 사람의 대결이 어떻게 될 거 같습니까?”

디펜드라의 질문에 헌터들은 무미건조하게 답변하였다.

“가스파르 들롱의 자신감은 늘 근거가 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이길 상대를 알아보지. 질 싸움에 나설 자가 아니야.”

흑기군 소속의 대머리 사내가 평소 자신과 경쟁하던 사이인 가스파르 들롱을 두둔하는 발언을 하였다.

라이벌 관계여도, 아니 라이벌 관계이기에 가스파르 들롱의 실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머리 사내뿐만이 아니었다.

칼의 형제들 소속의 S랭크 헌터, 표도르 카라마조프 역시 가스파르 들롱의 승산을 더 높게 쳤다.

“무공이 아무리 강해도 가스파르 들롱 경의 고유 영역에 들어간다면 그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을 겁니다.”

“당연한 거 아닌가? 가스파르 들롱이 이기겠지.”

“저 역시 가스파르 들롱이 이길 거라고 봅니다.”

그런 헌터들의 반응에 디펜드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대는 무인입니다. 그것도 극초기에 무공을 익힌 무인이죠.”

디펜드라가 그리 말했음에도 여전히 가스파르 들롱이 승리한다는 의견이 주를 이루었다.

“그래봤자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헌터 아닌가?”

“헌터 시절에도 B랭크 수준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협회장 정도가 아니라면 가스파르 들롱이 어디서 질 사람은 아닐 거예요.”

그러자 디펜드라는 마침내 납득한 것인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헌터들의 의견을 듣다 보니 그 역시도 가스파르 들롱이 이길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정소연이란 여인은, 총장은커녕 교수도 아니지 않은가.’

가스파르 들롱이라면 이 안에서 최강자를 논해도 부족할 것이 없는 사내였다.

그런 사내가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헌터에게 패배할 리는 없으리라.

“그가 압도적으로 이긴다면 협회장과 다시 협상할 여지가 생기겠군요.”

디펜드라가 그렇게 중얼거릴 때, 갑자기 그들의 눈앞에 두 사람이 나타났다.

백인 남성과 동양인 여성이었는데, 멀쩡한 기색의 동양인 여성과 달리 백인 남성은 그야말로 녹다운이 된 상태였다.

“맙소사! 가스파르 들롱이 졌다고…?”

“말도 안 돼! 상대는 일개 비서일 뿐이라고!”

적어도 ‘교수’급이라면 이해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일개 비서였다.

가스파르 들롱은 무공만 없다면 최강을 논해도 부족함이 없는 사내였으니 이들의 충격은 실로 클 수밖에 없었다.

정소연과의 대결이 끝나고 가스파르 들롱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누구보다 큰 충격을 받았을 사람이 바로 그였다.

정신을 못 차리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헌터들은 그런 가스파르 들롱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도대체 당신의 고유 영역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딱 보면 알잖아. 내가 졌어.”

“당신이, 당신의 영역에서 졌단 말입니까?”

가스파르 들롱은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갑자기 다른 말을 꺼냈다.

“난 무조건 무공을 배울 거야.”

무공을 배우겠다니.

이건 사전에 계획된 일이 아니었다.

그들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성좌의 힘을 빌려 박한새를 압박하는 것이었으니까.

“당신의 성좌께서 그걸 허락해주셨습니까?”

“허락?”

가스파르 들롱은 피식 웃었다.

-더 늦기 전에 무공을 배워야 한다. 무공을 배우면 너는 그 누구보다 강해질 수 있다!

디펜드라의 질문은 대답할 가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성좌는 그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무공을 배울 것을 지시하고 있었으니까.

“성좌께서 말씀하셨지. 무공만 배우면 나는 최강자가 될 수 있을 거라고!”

“그러니 난 무조건 무공을 배울 거야.”

디펜드라는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일행 중에서 가장 강한 가스파르 들롱이 이리 변심했으니, 더는 박한새를 압박할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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