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
한 젊은 남녀가 밤거리를 배경으로 뜨거운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아아.”
키스가 끝나자 여성이 황홀한 얼굴로 눈을 떴다.
아나 베르두라는 이름의 여성이었다.
“오늘이 스무 번째 생일이라고 했었지?”
“예, 맞아요.”
“잊지 못할 밤을 만들어줄게.”
사내의 말에 아나 베르두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사내는 그림처럼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가 속한 길드, 노바티스의 간부이기까지 했다.
헌터로서의 실력도 출중하였는데, 그야말로 모든 것을 갖추었다고 봐도 무방하였다.
그런 사내가 자신을 향해 사랑한다고 하니 아나 베르두로선 황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으로 가자. 우리 집으로.”
“네, 좋아요.”
아나 베르두는 홀린 듯 사내의 차에 올라탔다.
‘너무 좋아, 어떡해.’
그녀는 마치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설마 이런 관계로까지 진전하게 될 줄이야.
사내를 처음 좋아했을 때까지만 해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너무 완벽한 사람이었기에 그저 짝사랑으로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사내가 먼저 그녀에게 대시하더니, 연인 관계로까지 발전하였다.
“근데 이쪽은 주택가 쪽이 아니지 않나요?”
사내의 집에서 무엇을 할지 상상하며 혼자 얼굴을 붉히던 그녀는 창밖의 풍경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변 풍경은 아무리 봐도 주택가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빛 한 줌 없을 정도로 어두운 거리에 간간이 공장으로 보이는 큰 건물만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사내는 그런 그녀의 의문을 해결해주지 않았다.
말없이 차를 몰 뿐이었다.
“저, 저기요?”
“다 도착했어.”
“도착했다고요?”
아나 베르두는 눈을 크게 떴다.
어디를 봐도 주택이 안 보였다.
그저 허름한 공장 하나만 보일 뿐이었다.
“여기야.”
실제로 사내는 공장 앞에 차를 주차하였다.
누가 봐도 폐공장으로 보이는 허름한 공장 앞에 말이다.
“들어가지 않고 뭐 해?”
“…여기 어디예요?”
“내 집이라니까.”
아나 베르두는 가녀린 어깨를 오들오들 떨었다.
이상했다.
분명 아까는 사내의 목소리가 천상의 목소리처럼 느껴졌었다.
그런데 지금은 무언가 께름칙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사내가 그녀의 팔을 잡아끌자 그녀는 반쯤 억지로 끌려가고 말았다.
‘이게 무슨 소리지?’
공장에 가까워지자 무슨 소리가 들렸다.
자세히 들어보니 클럽에서 흘러나올 신나는 음악 소리였다.
철컥.
사내가 문을 열자 소리는 더 크게 들려왔다.
아나 베르두는 천천히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공장 내부는 의외로 밝았다.
하지만 그보다 놀라운 사실은 공장 내부에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스무 명에 가까운 사람이 클럽에 온 듯, 춤을 추고 있었다.
‘사람들 얼굴색이 왜 저렇게 창백한 거지?’
신나는 노래가 틀어진 상태인데도 이상하게 분위기는 음울하였다.
아니, 음울한 수준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기괴한 분위기였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고 춤은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흐느적거렸다.
“그 놀라는 표정, 너무도 황홀하구나.”
“저, 저 사람들 뭐예요?”
“너는 저것들이 사람으로 보여?”
“저것들은 사람이 아니야. 바로 제물이지.”
“제, 제물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죠?”
“물론 너도 제물이고 말이야.”
갑자기 사내의 이에 기다란 송곳니가 생겼다.
그 모습을 보고 아나 베르두가 눈을 부릅뜰 때, 사내가 아나 베르두의 목을 물었다.
아나 베르두는 비명을 내질렀다.
목에서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분명 그녀도 스킬을 가진 헌터인데 도저히 저항할 수 없었다.
“내가 말했지? 잊을 수 없는 밤을 만들어주겠다고.”
사내가 입술에 묻은 피를 닦으며 이죽거렸다.
하지만 아나 베르두는 그런 사내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미 그녀도 지금 춤을 추는 스무 명의 사람들과 똑같은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크크큭! 표정이 참 예술이었단 말이지.”
금발 사내, 반데라스는 입이 귀에 걸릴 듯 웃었다.
찢어진 입에서 새빨간 혈흔이 엿보였다.
“또 길드원의 피를 빤 거냐?”
그때, 반데라스의 뒤에서 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희한하게도 반데라스 뒤에는 사람의 형체로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저 박쥐 모양의 장식품이 하나 덩그러니 있을 뿐이었다.
반데라스는 박쥐 모양의 장식품을 힐끔 보더니, 웃는 얼굴로 말했다.
“재밌잖아? 영광된 미래를 기대하던 년인데, 그 기대가 처참히 부서졌으니 그 절망감이 얼마나 컸겠어?”
“IHA가 냄새를 맡았어.”
그 같은 말을 들은 반데라스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놈들이 우리를 눈치챘다고?”
“길드원이 등급 낮은 던전에서 계속 사망하는 걸 의심스럽게 여긴 거 같아.”
“빌어먹을 IHA 놈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스페인의 밤거리, 아니 유럽의 밤거리는 사실상 그들의 것이었다.
하지만 IHA의 유럽 지부가 세워진 순간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그들, 뱀파이어 클랜은 나날이 입지가 약해지고 있었다.
반데라스라는 이름도 사실 가명이었다.
본래 동유럽에서 활동했다가 스페인으로까지 쫓겨나며 이름을 바꾼 것이다.
“로드의 명령이 떨어지기만 하면 모조리 죽여주마!”
참고로 반데라스가 말하는 로드는 여명회의 3사도였다.
3사도가 반데라스의 피를 빨아 그를 뱀파이어로 만들었다.
“마침 로드의 명령이 떨어졌어. 미국으로 집결하라더군.”
반데라스는 환희하였다.
그가 바라던 소식이었다.
지금껏 IHA에 의해 숨을 죽이고 사느라 얼마나 답답했던가.
이제 복수의 시간이었다.
‘무공을 익히는 것들은 모조리 죽여주마!’
내공뿐만이 아니라 피까지 모조리 빨아버리리라.
미국 워싱턴 인근의 애난데일.
이곳의 허름한 빌딩에 유럽인들이 단체로 모였다.
특이하게도 빌딩에 모인 유럽인들의 외형은 마치 친척 관계를 보듯 엇비슷하게 느껴졌다.
하나같이 창백한 외모에 날카로운 눈매를 하고 있었다.
“결전의 시간이 왔다.”
“학살입니까!”
“그래. 학살의 시간이다!”
“학살! 학살! 학살!”
광기에 찼다는 것 역시 비슷하였다.
반데라스 역시 바로 이곳에 있었다.
그 또한 이들의 동료, 뱀파이어였기 때문이었다.
“목표는 IHA가 개최한 대회에 구경 온 관중 전부를 죽이는 것이다!”
“와아!”
3사도의 말을 듣고 반데라스는 환호하였다.
관중을 전부 죽이겠다니.
그러면 최소 10만 명 이상의 피를 보겠다는 말과 다를 게 없었다.
잔혹한 살인마인 반데라스로선 환영할 만한 소식이었다.
그리고 환희에 찬 것은 그의 동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치 이번 거사가 치러지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그들 모두가 환호를 터뜨렸다.
갑자기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인기척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한 뱀파이어는 영문도 모른 채 목이 베어졌다.
다른 곳에서도 연이어 절삭음이 들렸다.
3사도가 뒤늦게 외쳤다.
그가 외친 시점에 이미 10명이 넘는 뱀파이어가 정체 모를 적의 기습에 죽은 상태였다.
“IHA 놈들이 여길 어떻게?”
“너희들이 한자리에 모이기를 기다렸다.”
반데라스는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동양인 사내의 말이 심상치 않았다.
애초에 호랑이 소굴로 들어온 주제에 저 자신감은 뭐란 말인가!
하지만 반데라스는 곧 동양인 사내가 가진 자신감의 원천을 알 수 있었다.
채챙!
반데라스는 웬만한 강자의 얼굴은 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동양인 검사의 얼굴은 분명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근데 왜 이렇게 강해!’
상대의 공격은 반응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빨랐다.
그저 운 좋게 몇 번 막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혼자서는 절대 못 잡는다!’
다급히 주변을 보았다.
도움을 청할 동료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반데라스는 이내 절망감을 느꼈다.
이미 죽은 동료가 절반에, 나머지 절반도 그보다 상황이 안 좋으면 안 좋았지, 더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로드는?’
로드는 다를 것이다.
아니, 달라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뱀파이어는 이 허름한 빌딩에서 멸종하게 될 테니까.
“그거 알아? 협회장님은 오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로드는 한창 적의 리더로 보이는 사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이쪽의 상황도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적의 리더 쪽이 훨씬 더 여유롭게 느껴졌던 것이다.
“하긴, 너희 같은 벌레들에겐 협회장님이 직접 나설 필요가 없긴 해. 우리 선에서 정리가 가능하니까.”
3사도가 엄청난 모욕을 당한 듯,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러더니 마침내 3사도가 양손의 손톱을 길게 내뿜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그림자가 거대해졌다.
어둠을 다루는 자답게 그림자 역시 그의 무기였다.
하지만 막상 두 사람의 전투가 시작되자 반데라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압도하는 그림이 나와야 그가 살 수 있었다.
그런데 3사도는 상대를 압도하기는커녕 수세에 몰렸다.
‘빌어먹을! 여기가 내 묫자리였을 줄이야!’
반데라스는 자신의 최후를 직감하였다.
로드인 3사도의 상태가 저 모양이라면 그 역시 살아남을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결국 적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목이 베이고 말았다.
비무회 본선이 펼쳐지는 워싱턴 경기장의 VIP석.
나는 조용히 경기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뒤늦게 VIP석으로 들어오는 IHA 이사를 보며 눈을 빛냈다.
“협회장님. 여기 앉아도 될까요?”
“앉으십시오. 유지은 이사.”
유지은이 옆자리에 착석하자, 나는 그녀에게 전음을 보냈다.
-애난데일에서의 작전은 어떻게 됐습니까?
-성공하였어요. 적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어요.
그녀의 전음을 듣고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3사도까지 처리한 겁니까?
-한금우 이사가 직접 처리했어요.
-그렇군요.
뱀파이어만 처리한 것이 아니라, 3사도까지 처리했다니.
실로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여명회의 다른 움직임은 없습니까?
-중동의 테러 단체를 동원했어요.
-어떻게 됐습니까?
-당연히 IHA 요원들을 파견하여 처리하였어요. 이젠 테러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역시 유지은에게 정보 수집을 맡기길 잘한 듯싶었다.
이렇게 믿음직한 모습을 보여줄 줄이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이미 우리 IHA의 정보력은 특이점을 돌파한 상태예요. 방심과는 무관하게 저희를 향한 공격이 있다면 바로 간파할 수 있어요. 물론 방심할 생각은 없지만 말이죠.
IHA는 그야말로 전 세계 헌터들이 모이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였다.
그리고 그 헌터들 중에는 정보에 관련된 스킬을 가진 자들도 적지 않았다.
유지은은 바로 이런 정보계 헌터들을 자신의 휘하에 두었다.
그 덕에 이제 그녀는 여명회의 세력도는 물론이요, 그들의 말단 조직원까지 파악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 정보를 토대로 곧 유럽에서 대대적인 소탕 작전을 펼친다지?’
여명회는 앞으로 양지로 나올 생각을 말아야 할 것이다.
그들이 양지로 나오려고 움직임을 보일 때마다 철저하게 박살을 내줄 것이니 말이다.
“저 여선수, 이름이 안능희라고 했죠? 협회장님이 부사관이었을 때, 상사였다던.”
그러던 중 갑자기 유지은이 전음 대신 직접 목소리를 내서 내게 물었다.
“예. 저는 부사관이었고 안능희 선수는 소대장이었습니다.”
“제가 알아보니 인기가 대단하던데요?”
“아무래도 비각성자 중에서 유일한 본선 진출자이니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 화제가 안능희로 돌려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안능희의 인기는 내가 봐도 대단하긴 했다.
한국인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 모든 비각성자가 응원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으니.
경기를 지켜보던 관중들 일부가 비명을 질렀다.
나 역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경기를 펼치는 안능희의 상황이 심상치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