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B랭크 헌터, 레온 트라프는 숨을 가다듬었다.
“역시 8성급 던전이라 그런지 조금 빡세긴 하네.”
옆에서 들려오는 동료의 말에 레온 트라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7성급 이하 던전은 솔직히 말하면 이제 시시해졌다.
상성이 안 맞는 보스여도 위기감을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데 역시 8성급 던전쯤 되니 숨도 차고 내공도 꽤 많이 소모되었다.
‘그래도 어렵지 않은 건 마찬가지지만.’
한때는 난공불락처럼 여겨졌던 8성급 던전이었다.
B랭크에 불과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하지만 무공을 익힌 뒤, 이 던전은 조금 어려운 수준의 던전으로 난이도가 확 내려갔다.
그의 경지가 무려 절정급이었기 때문이다.
“완전한 절정이 된다면 여기도 시시해지겠지.”
아직은 절정‘급’에 불과한 그였다.
진짜 절정 고수가 아니라는 뜻.
그리고 만약 완전한 절정 고수가 된다면 8성급 던전도 더는 어렵지 않으리라.
“레온, 너도 느꼈어?”
“던전 이변인가?”
“뭐 이제는 던전 이변 따위 우습지.”
갑자기 던전이 울리는 느낌을 받았다.
베테랑에게는 꽤 익숙한 감각이었다.
다름 아닌, 던전 이변이 발생할 때의 느낌이었다.
‘근데 이 느낌이 원래 이렇게까지 오래 지속되었던가?’
아니다.
만약 던전 이변의 징조가 이리 길었다면 감각이 좋은 헌터가 아니라도 모두가 알아챘으리라.
“뭔가 심상치 않다.”
그가 그리 중얼거린 순간, 갑자기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성이 들렸다.
“크아아아아아아!”
괴성이 들리기 무섭게 땅이 울렸다.
마치 거대한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는 듯 보였다.
“미친! 뭐가 저리 거대해!”
그것은 몬스터였다.
그것도 엄청난 크기의 몬스터.
하지만 크기가 큰 몬스터는 8성급 던전 보스 중에서도 찾아보면 적지 않았다.
몇몇 보스의 경우 아예 키가 수십 m에 육박하기도 했다.
‘단순히 크기만 한 게 아니야. 마력이 엄청나!’
마치 초절정 고수를 정면에 둔 기분이었다.
그 정도로 갑자기 나타난 몬스터는 엄청난 위압감을 자랑하였다.
레온 트라프는 다급히 자신이 차고 있는 시계, PLB의 붉은 버튼을 눌렀다.
PLB는 그냥 외관만 멋있는 시계가 아니었다.
마도구로서, 무려 던전 밖의 지구와 통신할 수 있게 해주는 기능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가 누른 버튼은 위기 신호였다.
아마 지금쯤 던전 바깥에서는 그를 구조하기 위한 구조대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 구조대는 당연히 그보다 수준 높은 고수로 구성될 것이다.
최소 절정.
이곳이 8성급 던전이란 것을 감안하면 ‘뇌제’라 불리는 이성은이 직접 그를 구하러 올 수도 있으리라.
“곧 지원이 올 거다. 그러니 당황할 필요 없어.”
레온 트라프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그의 동료들도 픽 웃었다.
“애초에 당황 같은 건 하지 않았다고.”
“처음 보는 몬스터라. 이거 기대되는데?”
“그러니까. 과연 어떤 아이템이 나올까?”
태연함을 연기하는 동료들의 모습을 보고 레온 트라프는 자신감을 얻었다.
어쩌면 눈앞에 나타난 몬스터는 9성급 던전 보스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설령 9성급 던전 보스라고 해도 그의 동료들이 함께라면 두렵지 않았다.
‘그나저나 생긴 게 꼭 전설에나 나올 거 같은 히드라를 닮았군.’
9개의 얼굴.
그 얼굴이 뱀인 거까지.
심지어 몬스터의 주변에는 녹색 안개가 깔려있는데, 왠지 독 안개로 보였다.
여러모로 전설 속 히드라와 비슷한 외양이라는 뜻이다.
‘상관없다. 히드라든 뭐든 이 검기만 있으면 두려울 게 없어!’
마법사들이 IHA에 합류하면서 세상은 많이 변했다.
마도구는 원래 극히 일부 헌터만이 사용하였었다.
하지만 마법사들이 IHA의 지원을 받자 온갖 마도구가 양산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다양한 마도구를 하급 헌터들까지 사용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헌터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마도구가 바로 PLB라는 이름의 시계였다.
IHA에서 사실상 무료로 지급하는 이 마도구는 던전에서 위기가 발생했을 시, IHA의 지휘 통제실로 신호를 보내줬다.
IHA 유럽 본부의 지휘 통제실.
평소 차분하던 분위기의 지휘 통제실이 마치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요란하였다.
8성급 던전부터, 1성급 던전까지.
모든 곳에서 적신호가 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변은 지금까지 없었는데….”
“아니, 한 번 있었죠. 8성급 던전이 열렸을 때 말입니다.”
IHA 유럽 본부의 본부장, 이성은은 침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부본부장, 나즐라가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나즐라의 물음에 이성은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앞으로 있을 희생을 생각하니 참담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각오한 일이었기에 그는 이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계획했던 대로 움직일 겁니다.”
이미 며칠 전에 IHA 협회장인 박한새로부터 경고가 있었다.
곧 대격변이 있을 수 있다는 그런 경고였다.
IHA 간부들은 아무리 박한새의 말이라도 선뜻 믿지 못했었다.
갑자기 대격변이 일어날 거라는데 믿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박한새는 IHA의 수장이기 이전에 그들의 스승이었다.
스승의 지시를 거절할 수는 없는 일.
그렇기에 대격변이 벌어질 것을 가정하고 여러 대책을 마련하였다.
IHA의 유럽 본부를 책임지는 이성은 역시 여러 대책을 마련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이성은 자신이 9성급 던전을 맡는 것이었다.
“그 계획, 바꾸는 게 좋을 거 같아.”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나즐라의 말에 이성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히드라라고 했었지? 그 몬스터, 우리가 맡을게.”
“들롱!”
그녀가 이름을 부르자, 익숙한 외모의 사내가 이성은 앞에 나타났다.
가스파르 들롱이라는 이름의 프랑스 헌터였다.
“이성은. 히드라는 내가 잡아놓을 테니, 당신은 다른 던전부터 정리해.”
놀라운 이야기였다.
히드라는 9성급 던전 보스였다.
초절정 고수인 이성은이라도 쉽게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대.
그런 상대를 절정 고수에 불과한 가스파르 들롱이 상대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확실히 가스파르 들롱 헌터가 히드라를 잡아놓을 수만 있다면 가장 나은 선택지이긴 해.’
지금 이 순간에도 독일의, 아니 전 세계의 던전에서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하고 있었다.
6성급 이하의 던전이야 유럽 헌터들의 실력이라면 쉽게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7성급 이상의 던전은?
제아무리 무공 도입으로 헌터 전력이 더 강해졌다지만, 갑자기 발생한 던전 브레이크를 막아내기는 쉽지 않았다.
물론 이성은 같은 천외천 실력을 가진 무인이 개입한다면 결과는 달라진다.
이성은이라면 8성급 던전 브레이크도 순식간에 막아낼 수 있으리라.
‘다만 가스파르 들롱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그게 문제다.’
그는 이런 자신의 걱정을 솔직하게 털어냈다.
“히드라의 전투력은 지금으로서 감히 추측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아무리 가스파르 들롱 헌터가 최근 초절정 고수에 근접한 실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도….”
“내 실력으로 히드라를 당해낼 수 없다는 건 나도 알고 있어. 어쩌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도.”
그는 프랑스 사람이었다.
프랑스가 아닌 독일에서 터진 9성급 던전 때문에 목숨을 거는 시도를 하겠다니.
이성은으로선 그의 각오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가스파르 들롱이란 사람은 원래 이런 유형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목숨까지 거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뭐 때문이냐니? 그야, ‘인류’를 위해서지.”
이성은은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가스파르 들롱을 보며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스승, 박한새의 교육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대격변이 벌어지면 가장 위험한 나라는 당연하게도 헌터 전력이 부족한 나라였다.
그리고 헌터 전력이 떨어지는 나라 중 하나가 북한이었다.
“러시아에서 S랭크 헌터 3명과 C랭크 이상의 헌터 300명을 보냈습니다.”
“일본에서도 초일류와 일류로 구성된 헌터 200명이 지원을 왔습니다.”
“중국은 무려 500명을 보내주었습니다!”
다행히도 북한의 주변국은 어느 정도 안전을 확보한 상태였다.
한국 무인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곳이 동북아시아였기 때문이었다.
그 덕에 북한은 주변국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은 과거의 북한이었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가 북한을 돕겠는가?
한국은 물론이요, 일본과 미국은 절대 북한을 돕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 러시아도 절대 선의로 북한을 도울 일이 없었을 것이고.
정권이 바뀌고 민주주의 정권이 수립된 북한이었기에 이런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주변국에서 헌터를 지원한다고 해도 아직 북한의 상황은 안전하다고 보기 어려웠다.
워낙 북한의 헌터 전력이 빈약했기 때문이었다.
8성급, 7성급 등 고위 등급의 던전 브레이크는 막을 수 있겠으나 오히려 그 아래가 문제였다.
북한의 헌터 수는 워낙 적었기에 던전 브레이크로 급격히 늘어날 던전을 제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국에서 무인이 자발적으로 지원을 왔는데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
“무인이 지원을 왔으면 당연히 받아야지!”
“근데 그 무인들이 헌터가 아닙니다.”
이미 한국의 헌터들은 러시아, 중국, 대만, 일본 등 주변국을 돕고 있었다.
8성급 이상의 던전은 거의 한국의 헌터들이 독점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의 헌터들은 북한에도 지원을 보냈다.
정확히는 비각성자 출신의 무인이 자발적으로 북한에 지원을 온 것이다.
-속보입니다. 제주 한라산에서 8성급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하였습니다.
한국은 현재 시점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였다.
하지만 그런 한국이라고 혼란이 없을 수는 없었다.
뉴스에서는 실시간으로 속보를 내고 있었고, 인터넷 게시판은 당장 세상이 망하기라도 할 것처럼 온갖 뜬소문으로 가득했다.
“어떡해. 이러다 진짜 세상이 망하는 거 아니야?”
“자기야, 걱정하지 마. 그런 일 없으니까!”
한 젊은 여성도 호들갑을 떨며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그녀의 남자친구로 보이는 이가 갑자기 한 손으로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내가 있는데 세상이 왜 망해! 나 무인이야! 이 동네에서 가장 강한 무인이라고!”
여성은 그런 남자친구의 모습에 밝은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녀가 겨우 삼류급인 남자친구를 보고 안심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헌터도 뭣도 아니었던 그녀의 남자친구를 E랭크 헌터도 우습게 만드는 삼류 무인으로 양성해낸 이 나라의 힘을 엿보고서 안심한 것이었다.
세상을 공포에 몰아넣은 대격변의 시대.
하지만 이 대격변의 시대를 기다린 이도 분명 존재하였다.
“대격변이라니, 오히려 좋아.”
“내 힘을 보여줄 땐가!”
“드디어 비각성자 출신도 활약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바로 그들은 비각성자 출신의 무인이었다.
헌터에 버금가는 무력을 가졌으나 그들은 지금껏 그 무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였다.
기껏해야 학교 강사나 경호원 등으로 활약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던전 브레이크가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대격변의 시대가 왔다.
지구에서 몬스터를 마주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물론 한국은 예외였다.
던전 입구에서 완벽하게 틀어막아 단 한 마리의 몬스터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은 안전해도 다른 나라들은 달랐다.
동남아시아, 중동, 남미, 그리고 아프리카까지.
곳곳이 위기였다.
지금 같은 시대라면 그들도 헌터와 같은 위상을 누리는 게 가능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