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9성급 던전 브레이크로 전 세계 모든 던전에서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하였다.
훗날 4차 대격변이라 불리는 대격변의 시대가 온 것이다.
전 세계의 모든 던전이 열렸기에 세계 어디를 가도 안전지대는 없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장소는 당연하게도 9성급 던전 주변이었다.
9성급 던전은 S랭크 헌터들도 감당할 수 없었다.
던전 보스의 전투력이 그만큼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9성급 던전 보스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초절정 고수들뿐.
하지만 초절정 고수라고 9성급 던전 보스를 쉽게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본에 나타난 9성급 던전 보스는 해양 몬스터였다.
-크아아아아아아!
문어 형태의 무지막지하게 거대한 이 보스 몬스터는 일명 크라켄이라고 불렸다.
“니시무라!”
크라켄의 거대한 팔이 바닥을 치자 해일이 밀려왔다.
해일은 마치 사람처럼 일본 헌터들을 덮쳤다.
선두에 선 일본 헌터, 니시무라 타케오가 검을 든 채 해일을 막았다.
호신강기가 그를 지켜주고 있음에도 니시무라 타케오의 입에서는 선혈이 흘렀다.
‘…강하다!’
니시무라 타케오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다음 해일이 다시 밀려오고 있었다.
다급히 검강으로 해일을 갈랐지만, 크라켄의 일방적인 공격을 막을 방법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나 혼자서 크라켄을 잡을 수 있을까?’
물론 그 혼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절정 고수로 이루어진 그의 동료들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문제는 일본에 단 두 명밖에 없는 초절정 고수인 니시무라 타케오도 크라켄을 상대로는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바다를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땅으로 인식하고 싸우면 평지에서 싸우는 것과 다를 게 없어.”
그때, 익숙한 인물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바로 그의 스승, 박한새였다.
박한새를 본 순간 니시무라 타케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박한새의 경지는 같은 초절정이었다.
하지만 같은 초절정 고수라고 실력도 같은 것은 아니었다.
‘스승님이라면 크라켄을 걱정할 필요 없겠지?’
박한새는 그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마치 평지를 달리듯 던전 속 바다 지형을 내달리는 박한새.
곧이어 크라켄의 비명이 들렸다.
순식간에 크라켄과의 거리를 좁힌 박한새가 검강으로 크라켄의 급소를 찌른 것이다.
‘이게 스승님의 실력….’
박한새의 실력을 보면 과연 자신이 그와 같은 경지라고 말해도 될지 의문이었다.
박한새는 그보다 한 단계 위 즉, 화경의 고수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대격변이 시작되자 IHA 간부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아니 꼭 간부들만 바쁘게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IHA의 요원들은 전부 무공을 익힌 상태.
그리고 대격변이 일어난 지금은 후방과 전방이 따로 없었기에 모두가 던전으로 향해야 했다.
당연하겠지만, 나 역시 던전으로 향하였다.
‘9성급 던전 보스들부터 처리해야 한다.’
1성급 던전이든 9성급 던전이든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던전에서 몬스터가 튀어나오는 순간 인명 피해가 발생할 것은 기정사실이니까.
하지만 가장 위험한 것은 당연하게도 9성급 던전 보스들이었다.
특히 일본의 던전에서 출몰한 크라켄은 지구로 튀어나오는 순간, 일본에 엄청난 쓰나미를 일으킬 존재였다.
그래서 나는 가장 먼저 일본에 왔다.
크라켄이면 니시무라 타케오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니시무라 타케오는 크라켄을 상대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아마 내가 지원을 와주지 않았다면 목숨이 위험했을지도 몰랐다.
‘다른 곳의 상황도 이곳과 크게 다르지 않겠지.’
그나마 초절정 고수가 있는 던전이라면 괜찮았다.
하지만 초절정 고수가 없는 곳이라면?
‘문제는 9성급 던전만 위험한 게 아니라는 거지.’
1성급 몬스터도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
그리고 개수로 따지면 비교도 안 되게 많은 것이 8성급 이하의 던전들이었다.
‘부디 피해가 적어야 할 텐데….’
모든 조치는 다 취했다고 자부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완벽하게 준비를 했어도 무려 대격변의 상황이었다.
언제 어떤 변수가 발생하여 막대한 피해를 발생시킬지 모른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막대한 피해란 최소 수백만 명의 피해를 말하였다.
9성급 던전 브레이크를 하나라도 막지 못한다면 나라 하나가 초토화되는 것은 너무도 뻔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초절정 고수라고 무조건 9성급 던전만 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같은 무인이라도 각자 특화된 능력이 있는 법이었다.
하물며 초절정 고수라면 S랭크 헌터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유럽 본부를 담당하는 이성은처럼 속도에 자신이 있는 초절정 고수라면 오히려 8성급 이하의 던전을 맡는 게 효율적일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고정희가 바로 이런 사례였다.
그녀는 세계 최고의 결계술사였다.
그녀는 한 번에 수십 개의 결계를 설치할 수 있었고 그녀가 설치한 결계는 8성급 던전 보스조차 막아낼 수 있었다.
“이제 카타르는 안전할 거예요.”
“감사합니다. 카타르 왕국은 절대 IHA의 도움을 잊지 않을 겁니다.”
고정희는 피곤한 얼굴로 카타르 왕의 감사 인사를 받았다.
초절정 고수는커녕 절정 고수의 수도 겨우 열 명에 불과한 것이 중동의 현실이었다.
IHA의 지원도 당연히 중동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가장 처음으로 지원 온 초절정 고수가 바로 고정희였다.
고정희는 초절정 고수 중에서도 전투력이 그리 높은 편은 아니지만, 그런데도 오히려 그녀 혼자서 무수히 많은 던전을 막아냈다.
던전 보스들을 전부 처리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결계로 아예 던전 입구 자체를 틀어막았다는 사실을 의미하였다.
“이사님, 수고하셨습니다.”
“후우. 결계를 이렇게까지 많이 펼쳐본 적은 처음이네요. 제가 지금 총 몇 개의 결계를 펼쳤죠?”
“사우디아라비아에서 17개, 오만에서 13개, 카타르에서 5개, 아랍 에미리트에서 9개, 이렇게 총 44개를 설치하였습니다.”
그녀는 중동에서만 44개의 결계를 설치하였다.
모두 8성급 던전에만 설치하였으니 사실상 그녀 혼자서 44개의 8성급 던전 브레이크를 막아낸 것과 다르지 않았다.
“저 혼자의 마력으로 결계를 설치해야 했다면 44개는커녕 5개가 최선이었을 거예요.”
“협회장님께서 마정석을 최대한 비축해 두셔서 다행입니다. 이전에는 왜 그렇게까지 마정석을 비축해 두는 건지 의아했는데 말입니다.”
“아마 이런 일까지 다 예상한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아무리 많은 마정석을 모았다고 해도, 지금 소모되는 속도라면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을 겁니다.”
결계는 한번 설치했다고 해서 무한히 유지되는 것은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결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원이 필요하였는데, 그 자원이 바로 마정석이었다.
IHA는 지금껏 세계의 수많은 던전을 관리하면서 천문학적인 수의 마정석을 비축하였다.
미국과 비교해도 수십 배를 넘어 거의 100배에 가까울 정도로 많았다.
하지만 문제는 결계를 유지하는 데 소모되는 마정석의 양이었다.
그냥 평범한 결계도 아니고 무려 8성급 던전을 틀어막기 위한 결계였다.
결계 하나에만 매일 수백 개의 마정석이 소모되었다.
“후우. 역시 그런가요.”
그렇게 많은 마정석이 있었는데 벌써 거의 다 소모되었다니.
소모 속도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결계를 포기하기에는 IHA도 여력이 없었다.
이미 IHA의 모든 요원은 던전 브레이크를 막아내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었으니까.
“각 정부에 요청해주세요. 인공 마정석을 최대한 모아 달라고.”
IHA만의 힘으로 대격변을 이겨내기는 어려웠다.
각국 정부, 아니 전 세계 모든 인류의 힘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지하 대피소에 수많은 사람이 피신하였다.
“집은 무사할까?”
“이 양반아. 지금 집이 문제야? 세상이 멸망할 수도 있다는데.”
“IHA가 있는데 세상이 망하겠어? 그리고 우리가 무슨 나라야. 무공 강국 대한민국이라고.”
대피소로 피신한 중년 부부가 그와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 중년 부부는 대격변이 벌어지는 상황 속에서도 크게 긴장하지 않고 있었다.
이것은 꼭 중년 부부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대피소로 피신한 다른 주민들도 전혀 걱정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이유는 간단하였다.
IHA를 향한 믿음.
국제 헌터 협회에서 세상을 지켜줄 거란 굳은 믿음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근데 아쉽네. 나도 헌터들처럼 세상을 구하기 위해 나서고 싶은데 말이야.”
“이 양반이 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냥… 나도 나름대로 무인인데 이렇게 숨어있는 게 뭔가 한심하게 느껴지잖아.”
“무인은 무슨. 호흡법밖에 못 익힌 무인이 세상에 어디 있어?”
아내의 말에 중년 남성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무공이란 것이 흔해지면서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제대로 된 무공을 배우는 것은 아니었다.
기초적인 호흡법만 동네 학원에서 배우는 수준에 불과하였다.
중년 남성의 수준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인이라고 부를 수 없는, 그저 무공 입문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래도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여보는 알잖아.”
“침대에서 강해졌다고 싸움까지 잘해진대? 흰소리 그만하고 얌전히 호흡법이나 익히고 있어!”
중년 남성은 구시렁거리면서도 아내의 말에 충실히 따랐다.
의협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단지 무공 입문자에 불과한 그가 나설 필요조차 없는 상황이었기에 얌전히 있는 것뿐이었다.
‘아. 삼류 수준이라도 됐다면 1성급 던전은 물론이고, 2성급 던전도 내가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
이런 중요한 시기에 그저 피난밖에 하지 못하는 현실이 중년 남성에게는 그저 아쉽기만 하였다.
그때 대피소의 책임자로 보이는 공무원이 외쳤다.
“혹시 이 중에 무공이나 마법을 익히신 분 계십니까?”
공무원의 말에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웅성거렸다.
질문이 심상치 않게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중년 남성은 공무원의 물음에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손을 번쩍 들었다.
“여기서 손을 왜 들어. 나서서 좋을 게 뭐 있다고!”
무공을 익힌 무인들에게 헌터들처럼 사회적인 의무를 지게 해야 한다는 여론이 거세지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국회에서 이미 법안 몇 가지가 추가되어 무인들도 예비군처럼 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렇기에 중년 남성의 아내는 중년 남성의 행동이 우려될 수밖에 없었다.
무공 입문자에 불과한 남편을 전장으로 끌고 가기라도 할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수준은 어느 정도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냥 호흡법만 익힌 수준입니다.”
“저도 아직은 호흡법만….”
“전 삼류 무인입니다.”
손을 든 것은 중년 남성뿐만이 아니었다.
단전을 만든 삼류 무인부터 중년 남성처럼 호흡법만 간신히 익힌 무공 입문자들까지.
너 나 할 것 없이 손을 들었다.
“어려운 부탁을 드리고 싶은데, 혹시 세계를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IHA를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IHA를 돕는다고요? 제가 도울 게 있을까요?”
“호흡법만 익혔어도 충분히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IHA가 원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인공 마정석입니다.”
“아. 몬스터와 싸우라는 게 아니라, 인공 마정석을 만드는 데 힘을 써 달라는 말이었군요.”
중년 남성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전투라도 하나 했더니, 그냥 인공 마정석을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중년 남성은 미소를 지었다.
나라를 위해, 아니 인류를 위해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