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도복을 입은 가스파르 들롱이 자신의 제자를 향해 축하 인사를 건넸다.
“32강 진출 축하한다. 베르트랑.”
그러자 그의 제자, 베르트랑 이달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이제 시작입니다. 스승님.”
“진짜 우승을 노리는 모양이군.”
“대회에 나왔으면 당연히 우승을 노려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당찬 제자의 모습에 가스파르 들롱은 픽 웃었다.
과거의 자신을 보는 듯하였다.
‘하지만 우승은 쉽지 않아.’
가스파르 들롱이 베르트랑 이달고를 제자로 거둔 것은 인류가 한창 4차 대격변을 이겨내던 시기였다.
베르트랑 이달고의 부모는 일선 헌터들이 놓친 오크 몇 마리에 의해 봉변을 당하였다.
이때 가스파르 들롱은 베르트랑 이달고의 부모가 죽은 일이 마치 자신의 잘못인 것마냥 자책감을 느꼈었다.
그가 독일을 구원한 사이, 프랑스의 일부 지역이 엉망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베르트랑 이달고의 부모가 죽었기 때문이었다.
베르트랑 이달고를 제자로 받아들인 이유도 그런 죄책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베르트랑 이달고의 재능을 확인하자, 가스파르 들롱은 오히려 자신의 선택에 흡족함을 느꼈다.
마치 과거의 그처럼, 아니 과거의 그보다 더한 재능을 보였던 것이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비무회 우승도 가능할 텐데 말이야.’
아쉽게도 그의 제자는 나이가 벌써 열아홉 살이었다.
제7회 비무회부터 나이 규정이 생겼는데, 만 20세 이상은 출전이 불가능하였다.
즉, 베르트랑 이달고는 이번 대회가 처음이자 마지막 출전이라는 뜻이었다.
“반드시 우승해서 프랑스의 저력을 보여주겠습니다. 그리고 꼭 유럽 최고의, 아니 세계 최고의 문파를 만들어내겠습니다.”
“문파까지?”
터무니없게 들리는 말이었다.
최근 들어 유럽에서 문파들이 규모를 키우고 있다지만, ‘정통 문파’ 즉, 동양 문파와는 비교가 안 됐다.
물론 말이 동양 문파지, 10위권 내의 문파는 모두 한국 문파였다.
참고로 비무회의 본선 진출자 절반 가까이가 한국 문파 출신이었다.
나머지 절반은 무공 학교 출신인 경우가 많았고.
‘이런 상황에서 한국 문파를 능가하는 문파를 만들어내겠다니. 그것도 이제 19살밖에 안 된 애송이가 말이야.’
다른 사람이 들었으면 비웃었을지도 모를 이야기였다.
하지만 가스파르 들롱은 오히려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하긴, 나도 누가 들으면 불가능하다고 말할 꿈을 꾸고 있지.’
그의 꿈은 사실 베르트랑이 품은 꿈보다 원대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가스파르 들롱의 꿈은 바로 무공의 창시자, 박한새보다 강해지는 것이었으니까.
‘과거의 박한새도 과연 이길 수 있을지 미지수인데, 지금의 박한새는 또 얼마나 강해졌을까?’
가스파르 들롱이 초절정 고수가 된 것도 벌써 수년째.
그런데도 그는 박한새에게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조금도 하지 못하였다.
그만큼 박한새의 무력은 궤를 달리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경지를 올릴 때까지 기다려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아마 그건 힘들겠지?’
한 가족이 TV 속 드라마를 보며 심심함을 달래고 있었다.
참고로 TV에서 방영되는 드라마는 최근에 유행하는 <무인 되려고 회귀함>이라는 드라마였다.
“아, 저 때 나도 저 자리에 있었는데?”
“거짓말! 아빠는 저 때 무인도 아니었잖아.”
“크흠! 저 근처 대피소에 있었다는 말이었어. 그리고 아빠도 인류를 위해 큰일을 했거든!”
“뭐 했는데?”
“인공 마정석을 만들어서 결계를 유지하는 데 힘을 썼지! 아빠가 그래도 결계를 만드는 데 지분 1% 이상의 공은 세웠을 거다!”
<무인 되려고 회귀함>은 한 헌터가 과거로 가서 세상을 구하는 내용이 담긴 드라마였다.
최근 화에는 4차 대격변의 내용이 흘러나왔는데, 이들 가족에게는 10년도 안 된 과거의 일이었기에 더욱더 몰입할 수 있었다.
“근데 다 좋은데, 주인공 실력이 왜 저래? 설정상 초절정 고수인 거 아니었어?”
가장이 드라마 속 주인공을 보며 투덜거렸다.
중년 남성인 그가 보기에도 드라마는 잘 만들어졌다.
스토리, 인물 개성, 박진감까지.
하지만 단 하나 옥의 티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연기자들의 무공 실력이었다.
“나도 아까부터 그게 거슬렸는데. 주인공이면서 보법을 나보다 못하는 거 같아.”
중년 남성의 장남 역시 중년 남성의 말에 동조하였다.
딱히 헌터 출신도 아니었고 무공 학교에 다니는 것도 아니었다.
나이도 고작해야 16살에 불과한 장남이었다.
하지만 그런 장남의 무공 수준은 상당한 편이었다.
이류 무인의 보법을 지적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래도 대종사님 역할을 맡은 배우가 대종사님의 4대 제자라서 다행이야.”
“사실 조규성이 주인공을 맡았어야 했는데…. 대종사님의 4대 제자고 잘생기기까지 했잖아?”
“어쩌겠어. 연기가 안 되는데.”
“쩝. 그건 그렇지.”
드라마 주인공이 펼치는 보법이 그만큼 한심했기 때문일까?
드라마에 집중하지 못하는 부자의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나저나 대종사님은 요즘 통 소식이 없네. 공식적인 자리에 모습을 안 드러낸 지 꽤 되지 않았어?”
4차 대격변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박한새는 언론에 거의 매일같이 등장하였었다.
물론 4차 대격변 때는 모든 언론이 박한새의 활약상을 담아 보도했기에 더더욱 대중에게 친숙하게 느껴졌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언론에서 박한새에 관한 언급이 사라졌다.
그저 과거의 영상들만 간혹 뉴스에서 틀어줄 뿐이었다.
“내가 어디서 들은 이야기인데, 대종사님이 곧 우화등선할 거라는 썰이 있어.”
“우화등선? 갑자기 뭔 우화등선이야?”
“왜, 다음 경지가 화경이잖아? 무협지에서야 화경이 그냥 지존의 경지처럼만 보이지만, 현실의 화경은 사실상 신선이나 다를 게 없지 않겠어?”
“아무리 그래도 우화등선은 뜬금없는데….”
“몰라. 나도 어디서 들은 이야기야. 근데 폐관수련 하고 있는 건 사실이 맞을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소식이 없을 리가 없잖아?”
“대종사님은 얼마나 더 강해지려고 폐관수련을 하시는 건지….”
“괜히 무공의 창시자가 아니잖아. 우리 인류에게 다음 경지를 알려주기 위해 헌신하는 거 아니겠어?”
초절정 고수만 되어도 세상 두려울 게 없는데 화경의 경지라니.
중년 남성은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았는지 실실 웃음을 지었다.
‘나도 언젠가 화경 고수가 되어 보는 거야.’
의사들은 무공을 익히면 수명이 최소 수십 년은 늘어날 거라고 이야기하였다.
만약 그 주장이 맞다면 중년 남성은 아직 한창이었다.
100세까지 아니, 130세까지 화경을 노리고 무공을 계속 익히면 화경은 못 돼도 최소 절정 고수는 될 수 있으리라.
절정 고수가 되면 수명이 또 늘어나서 화경 고수가 될 여력이 생길 수도 있었고 말이다.
-정말 화경의 고수가 되었군요.
익숙한 목소리를 듣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원래라면 보이지 않아야 할 것이 보였다.
바로 최상위 성좌, 카펠라의 모습이었다.
“덕분에 경지를 올릴 수 있었습니다.”
카펠라는 회귀하고 처음으로 내 앞에 나타났을 때, 내게 이렇게 물었다.
소원이 무엇이냐고.
내가 왜 그런 걸 물어보냐고 되묻자, 세계를 구해준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하였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시간을 다루는 권능을 나를 위해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그 권능으로 나는 수백 년을 수련하여 지금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
-약속을 지킨 거뿐이에요. 그리고 감사해야 할 쪽은 저죠.
“세계를 구원한 것에 대한 감사 인사라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당신을 위해 세계를 구원한 것이 아니니.”
카펠라는 내 말을 듣고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나요?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강해지신 건 알겠는데, 당신 얼마나 강해지신 거죠?
얼마나 강해졌냐고?
‘나도 잘 모르겠는데.’
그저 하나의 확신만 있었다.
지금의 나는 누구도 대적할 수 없을 거라는 확신.
나는 말 대신 심상으로 나의 무력을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
카펠라가 눈을 부릅뜨며 경악하였다.
아마 지금쯤 이런 장면을 보고 있을 것이다.
내 심검이 지구를 반으로 가르는 장면을.
-…신에 버금가는 무력이 아니라, 신을 압도하는 무력이네요.
“신은 인간의 수보다 많다고 하니, 그중에는 저보다 강한 신도 존재할 겁니다.”
-글쎄요. 제가 수만 년을 살아왔지만, 당신만큼 강한 존재는 본 적이 없어요.
-하나만 더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이렇게 강한 무력으로 무엇을 하실 건가요?
“더 넓은 세상으로 가서 무공을 익힐 겁니다.”
나는 화경의 경지가 무공의 한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화경에 오르자 아직 내 앞에 미지가 남아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더는 지구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 그러니 떠나자. 더 넓은 차원으로.’
박한새가 기자들을 불러놓고 엄청난 선언을 하였다.
“저는 오늘부로 협회장 자리에서 물러나겠습니다.”
그 같은 선언에 기자들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이들이 충격에 빠졌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협회장 자리를 지켜온 박한새였다.
그리고 그 10년 동안 박한새는 너무도 완벽한 모습을 보여왔다.
박한새가 아니라면 누구도 협회장이란 자리가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러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미국 대통령보다 더 영향력이 강한 IHA 협회장 자리를 자진해서 내려오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스승님, 도대체 왜 그런 선택을 하신 겁니까?”
“또 중동에서 이슬람 놈들이 이상한 소리를 지껄인 건가요? 명령만 내려주시죠. 제가 싹 다 죽이고 오겠습니다.”
당황한 것은 박한새의 제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당황하던 박한새의 제자들은 이어진 박한새의 한마디에 환호하는 반응을 보여주었다.
“새로운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드디어 초절정의 경지를 뛰어넘었다니!
실로 위대한 업적이 아닐 수 없었다.
“허어!”
“더 강해지셨단 말씀입니까?”
“화경이라면 이기어검까지 할 수 있는 건가요?”
흥분한 제자들이 이것저것 물었지만 박한새는 제 할 말만 할 뿐이었다.
“제가 수련을 이어나가려면 인세를 떠나야만 합니다.”
인세를 떠난다는 말에 제자들은 침묵하였다.
그런 제자들의 모습에 박한새는 픽 웃고는 품에서 책을 꺼냈다.
“이 경지에 오기까지 얻은 깨달음을 정리한 책입니다. 무공에 더 뜻이 있는 분들은 이 책을 참고하여 수련에 임하십시오.”
제자들을 불러놓고 유언 아닌 유언을 남긴 박한새.
그리고 며칠 뒤.
박한새는 진짜로 모습을 감추었다.
마치 우화등선이라도 한 듯, 종적을 감춘 것이다.
“제니퍼.”
“…당신이 여기는 어쩐 일인가요?”
유지은은 박한새가 사라진 다음 날, 전 IHA 협회장, 제니퍼를 찾아갔다.
“슬프지 않으세요?”
“왜 그런 걸 물어보시는 거죠?”
“좋아했잖아요. 한새 씨.”
“저보다 더 미스터 박을 좋아했던 것은 미스 유 아닌가요?”
“글쎄요?”
유지은은 싱긋 웃더니, 자신이 박한새를 그동안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이야기하였다.
“저는 사실 이성으로서 좋아했다기보단, 동경했던 것에 가까워요. 정확히 말하면 추앙했다고 해야 할까요?”
사실 그녀의 본심은 그녀도 몰랐다.
그저 제니퍼처럼 매정하게 떠난 남자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아서 대충 지껄인 말에 불과하였다.
“근데 참 이해가 안 가네요. 제니퍼 당신도 그렇고, 한국에도 한새 씨를 좋아하는 여인이 많은데 한새 씨는 왜 그녀들을 놔두고 우화등선을 한 것일까요?”
“미스 유. 당신 같은 사람들이 많아서 떠난 게 아닐까요?”
“저 때문에 떠났다고요?”
“모든 제자가 미스터 박을 신처럼 추앙하잖아요. 미스터 박은 그런 걸 좋아하지 않는데도 말이죠.”
이미 무공을 익힌 사람들 사이에서는 신에 버금가는 위치에 오른 박한새였다.
어떤 국적의 정치인이든, 박한새에게 조금이라도 안 좋은 말을 한다면 바로 암살 위협을 당할 정도였다.
심지어 그 같은 만행을 저지른 테러범은 최소 절정 고수였다.
그 정도로 박한새의 추종자는 넘쳐났다.
“만약 그런 거라면, 이렇게 떠나면 안 됐지 않았을까요? 우화등선한 시점에서 한새 씨는 진정한 신이 되었으니까요.”
유지은은 그렇게 말하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제니퍼의 말을 듣고 나니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복수 아닌 복수라고 할 수 있는 그 좋은 생각이란 다름 아닌, 박한새를 진정한 신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한새 씨. 한새 씨가 어느 세계로 떠났든, 다시 이 지구로 돌아올 수밖에 없을 거예요. 지구의 모든 이가 한새 씨를 그리워할 테니까.’
(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