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프롤로그
기묘한 꿈이었다.
죽을 때가 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이제까지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으니까.
마치 낡은 TV에서 들리는 듯한 지지직거리는 소리. 동시에 푸른색 죄수복을 입은 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탄약그룹 한서준 회장이 오늘 오전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검찰은 횡령 등의 혐의로 징역 15년을 구형하였으며….
“아… 안돼!”
내 절규에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져버린 화면.
지나간 일에 감히 개입하지 말라는 경고라도 되는 걸까?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에 손을 뻗자마자 조각난 유리처럼 머리 위로 흩날리는 그때 그 모습.
“아아….”
날카로운 유리 조각에 손을 베여 흘러내린 붉은 피가 바닥에 떨어졌다.
웅덩이처럼 고인 핏물. 그 위에 조금 더 먼 과거의 내 모습이 비치기 시작했다.
-속보입니다. 탄약그룹 이사회에서는 신임 회장으로 한서준 씨를 임명했습니다. 스물다섯이라는 젊은 나이의 그는….
붉게 상기된 얼굴. 레드카펫 위의 호기로운 발걸음.
샹들리에의 빛이 쏟아 내려지는 연단 앞에서, 어리석은 모습을 한 그때의 내가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이제부터 탄약그룹의 방향타를 쥐게 된, 신임 회장 한서준입니다.’
실력이 아닌, 혈통과 그룹 내부의 역학관계 때문에 얻어걸린 회장 자리.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망 탓에, 고작 20대 중반의 나이에 재계 서열 10위 안에 드는 재벌 회장이 된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들려오는, 내빈석에 앉은 임원들의 나를 욕하는 목소리.
‘새파랗게 어린놈이 회장인 것도 어처구니없는데, 거기에 서자 출신이라니…. 박 상무, 어떻게 생각하나?’
‘회사에 망조가 든 게지요. 한서준 회장 본인 인생에도 말입니다.’
‘하기야, 저 애송이가 총알받이의 운명을 피할 수가 없을 터. 그저 그룹만은 존속하기를 바랄 뿐….’
곧바로 임직원들로부터 쏟아지는 불신의 눈초리. 저 애송이가 탄약그룹의 키를 쥔 선장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내가… 내가 너무 어리석었다.”
꽉 쥔 주먹. 굳게 앙다문 입.
핏빛 웅덩이에 떨어진 내 눈물방울이 둥근 파동 여러 개를 만들었다.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질 때마다, 점점 형체를 잃어가는 과거의 모습.
발목까지 잠긴 웅덩이에 맺힌 형상은 흔들림 때문에 분간할 수 없을 만큼 흐릿해져 갔다.
“만약에 옛날로 돌아간다면,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텐데….”
그 순간, 갑작스레 막혀버린 목소리.
불청객처럼 찾아온 어지러움 때문일까?
나는 중얼거리던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으으으….”
머릿속에서 점점 격해지는 흔들림.
그 진동이 천장까지 닿은 모양인지, 연단 위의 샹들리에가 환한 빛을 내뿜으며 내 머리 위로 떨어졌다.
-쨍그랑!
마치 소나기처럼 내리는 수백 개의 크리스털 파편.
조각조각마다 들어가 있는 과거의 편린이 내 망막 위에 고스란히 담긴다.
후회라는 조각이, 아쉬움이라는 조각이, 소고라는 조각이….
“아아….”
정지된 화면에서 벗어나 아주 느리게 흐르는 시간. 당장이라도 숨이 멎을 것만 같다.
“행님! 서준이 행님! 고마 일어나이소!”
꿈 바깥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피할 수 없는 현실에서 불려지는 내 이름.
거친 숨을 내쉬며 눈을 뜨자 보인 것은, 벌써 근 10년째 봐 온 불 켜진 천장이었다.
“행님! 퍼뜩 일어나라니까예!”
“끄응, 뭐야? 대식이냐?”
“하… 진짜! 교도관들 오고 있는데 안 인나고 뭐합니꺼?”
“어어… 그럼, 회장 취임식은?”
아직 꿈에서 덜 깬 나는 낡아빠진 이불을 만지작거리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귀퉁이에 삐져나온 솜뭉치를 만져 보니, 진짜 교도소가 맞기는 한가 보다.
나를 깨운 동료 재소자 대식이는 답답한 듯, 연신 빡빡머리를 긁어대며 목소리를 높였다.
“취임식? 그기 무신 말도 안 되는 소립니꺼?”
“하… 그치? 말도 안 되지?”
“하이고, 행님 꿈도 꼭 개꿈을 꾸고 그라네. 퍼뜩 이불이나 개소!”
* * * *
꿈속에서는 화려한 호텔에서 샴페인 잔을 들어 올리던 대기업 회장.
현실에서는 푸른색 수의를 입은 교도소 재소자가 바로 나다. 새끼발가락 쪽에 구멍 난 고무신은 일종의 챠밍 포인트고.
“행님. 그래가 옛날 잘나가던 때 꿈 꾸셨다고예? 흐미… 이거 밖에 나갈 때가 되니 별 개꿈도 다 꾸고.”
주말 오전, 잠깐 주어진 운동 시간. 나는 친한 감방 동생 대식이와 함께 철봉에 매달린 채로 수다를 떨었다.
“나갈 때가 되긴. 나 아직 6개월씩이나 남았잖아.”
“내는 3년 남았다 아이요. 그나저나… 기분 좋았겠네예? 얼라들 쓰는 말로다가 리즈 시절 아잉교?”
“…….”
리즈 시절, 다른 말로 인생의 황금기.
탄약그룹의 모든 비리와 부실을 강제로 책임지고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기 전에는 그랬었지.
집안 눈치만 보고서 쭈그려 살던 재벌 서자가 하루아침에 회장님 소리를 들으며 떠받들어졌으니까.
나는 양팔을 당겨 철봉 위로 몸통을 끌어올린 채 대식이에게 대답했다.
“읏차! 좋기는 개뿔. 다시 빠꾸도 못 하는데, 꿈꿔봐야 순 그림의 떡이지.”
“에이… 또, 또. 안 어울리게 점잔 빼지 말고! 빠꾸가 되기만 하믄, 돌아갈 거 아입니꺼?”
나는 빙그르르 몸을 한 바퀴 돌린 채, 철봉에 다리를 걸치고는 거꾸로 매달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교도소라는 좁은 우물에 갇힌 나와는 달리, 저기 저 하얀 구름은 자유롭게 푸른 하늘을 떠다니고 있었다.
“예전 그때로 빠꾸라… 택도 없는 소리인데. 너 지금 나 놀리냐? 요새 좀 안 맞았지?”
“아, 놀리긴예. 상상은 공짜 아잉교? 그 뭐냐. 만약에 옛날로 돌아가믄 행님은 뭐부터 할 낍니꺼?”
대식이 이놈. 누가 사기꾼 출신 아니랄까 봐, 사람 홀리는 말은 아주 청산유수다.
제멋대로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내 뺨을 쓸어넘겨서였을까?
늘 그렇듯이, 나는 대식이의 말에 홀린 채 입 밖으로 속마음이 담긴 이야기를 꺼냈다.
“일단… 억울하게 독박은 안 써야겠지? 솔직히 죄 없이 징역 10년은 좀 선 넘었잖아.”
“그라고예?”
“나름 그래도 부실기업 회장 자리에 앉는 것도 기회니까, 한번 핵몽둥이 들고 싹 다 뜯어고쳐야겠고.”
그리고… 여태껏 10년 가까이 아들내미 옥바라지하는 울 엄마도 그만 고생시켜야지.
엄마는 매주 수요일마다 집부터 교도소까지 왕복 다섯 시간 거리 면회를 왔다.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나란 놈은 정말이지 불효자를 뛰어넘어 마그마 효자라 불려도 할 말이 없다.
뒤이은 말을 목구멍 너머로 삼킨 나는 잠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눈가에 이슬방울이 맺힌 것을 저 칠칠맞은 대식이 놈에게 보이기 싫어서였다.
“흐흐흐… 뭔 싸나가 질질 짜고 그럽니꺼? 아주 나이아가라 폭포수가 따로 없네예.”
“시껌마! 오늘따라 날이 습해서 그래. 눈물이 아니라 땀방울 맺힌 거라고.”
“행님, 세상 사람들이 그런 걸 보고 뭐라카는지 압니꺼?”
“뭐라는데?”
“비겁한 변명이라 캅니더. 낄낄낄.”
망할 놈 같으니.
하여간 대식이 이놈은 참 희한한 놈이다. 한 1년 전쯤 교도소에 들어온 이후로, 계속 내 옆에 껌딱지처럼 붙어 다닌다.
뭐만 하면 꼬치꼬치 캐묻는 탓에, 이제는 탄약그룹 한씨 집안 이야기도 다 안다.
그렇게 이 녀석 머리에 꿀밤을 날릴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대식이가 목소리를 깔고서 내게 말했다.
“자, 행님. 인자 슬슬 가야 할 시간인데 고마 내려 오이소.”
“응? 벌써 운동 시간 끝났냐? 얼마 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나는 철봉에 다리를 걸친 상태에서 윗몸일으키기 자세로 몸을 말아 올렸다.
감시 탑에 걸린 전자시계를 보니, 시간은 오전 11시. 아직 운동 시간은 20분이나 남았다.
오늘이 무슨 날이기는 한가 보다. 시간관념 하나는 철저한 대식이 놈이 이런 실수도 다 하고.
“야, 대식아. 저기 시계 좀 봐라. 아직 시간 많이 남았는데?”
“아아, 운동 시간 말고예. 빠꾸 시간 말하는 겁니더.”
“응?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빠꾸 시간은 뭔 말도 안 되는….”
-찌이이이잉!
갑자기 머릿속이 울리고 온몸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아까 아침에 꿈에서 깰 때 느꼈던 느낌과 똑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이었다.
어지러움 탓에 나는 도저히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철봉 위에서 중심을 잃고 머리부터 땅으로 떨어지려는데, 대식이가 다가와 나를 붙잡아 주었다.
“엇차, 내 환생 트럭은 못 불러도 빠꾸 철봉 정도야 부른다 아입니꺼?”
“대식…아. 그게, 무슨 말이냐고….”
말을 잇기 힘들 정도의 두통. 눈앞의 모습은 이미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고, 세상 모든 것이 뿌옇게 보였다.
나를 붙잡은 대식이의 얼굴도 마치 뭉개진 픽셀처럼 좀처럼 분별하기 힘들어졌다.
“1014번 재소자! 1014번 재소자! 괜찮습니까?”
감시탑 위의 교도관이 내 상태가 영 좋지 않아 보였는지, 큼지막한 확성기로 다급히 내 수형 번호를 불러댔다.
“하이고, 깜방 간수 점마들도 고생이네. 마, 행님만큼 박박 고생했겠냐면서도.”
“으으으… 대식아, 머리가 너무 아프다….”
“싸나이가 엄살은…. 거, 쫌만 참으이소. 잠깐이면 됩니더.”
점점 커져만 가는 두통. 어두워져 가는 시야.
어질어질한 느낌이 심해지자, 그 시끄럽던 확성기 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내 귀에 들려온 소리는, 마치 자장가 같은 대식이의 마지막 인사말이었다.
“인자 고생도 할 만큼 했으니 돌아가믄 잘 좀 살아보소. 기껏 얻게 된 기회… 허투루 쓰지 말고.”
* * * *
“아!”
정신이 들었다.
마치 시간 여행을 한 것처럼 어지럼증은 조금 남아 있었지만, 견디지 못할 만큼은 아니었다.
비몽사몽 손가락으로 잠긴 눈을 비비고 있는데, 뜬금없이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건넸다.
“아이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자식 된 입장에서 얼마나 애통하실는지요.”
“네? 뭐라고요?”
환생 트럭인지 빠꾸 철봉인지 뭔지는 모르겠다. 그저 당황스러움 뿐이다.
대식이의 요술 같은 무언가로부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앞에는 상복을 입은 조문객이 내게 맞절을 하고 앉아 있었다.
“이건….”
검은 양복, 상주를 뜻하는 두 줄짜리 완장, 내 의복 상태로 보아 여기가 장례식장이 맞기는 한 모양이었다.
“이게… 뭐야! 여긴 또 어디고!”
어벙벙한 표정의 내가 미처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자, 상대방은 무언가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백발이 성성한 조문객 영감님은 내 두 손을 꼭 잡아주고는 당부하듯 하던 말을 계속해나갔다.
“허어, 이번 폭발 사고… 충격이 크시리란 것 잘 압니다. 허나, 서준 도련님께서 심지를 굳건히 하셔야 해요.”
폭발 사고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 기억창고에서 오랫동안 묵혀져 있던 내용이 떠올랐다.
스무 살이 넘어서야 비로소 얼굴 한 번 볼 수 있었던 내 아버지. 분명 탄약그룹 군수 공장 시찰 도중, 폭발 사고로 돌아가셨다.
“설마, 그럴 리가….”
나는 길게 줄을 선 조문객들을 모조리 무시하고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당장 이상한 놈 취급을 받아도 상관없다. 일단… 일단은 지금 무슨 상황인지 알아야 한다.
향 연기 너머의 영정사진에는 무뚝뚝한 중년 남성이 특유의 험상궂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버지…? 그렇다면 지금이 그때 그 장례식이라고?”
수북이 쌓인 국화꽃 바로 앞쪽. 고인(故人)의 이름과 직책이 적힌 검은색 나무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고(故) 한화약 탄약그룹 회장
“뭐야. 정말… 대식이 말대로 돌아온 건가? 과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