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장님의 핵몽둥이-2화 (2/300)

2화회장의 자격(1)

-쏴아아아아!

일부러 틀어놓은 차가운 수돗물. 그 얼음장 같은 물로 한참을 세수하고 나니, 얼굴 피부가 스판 바지를 입은 엉덩이 부위처럼 팽팽해졌다.

나는 냉기로 얼얼해진 양쪽 뺨을 손바닥으로 만지며 중얼거렸다.

“와… 대식이 이놈. 도대체 뭘 한 거야? 다시 생각해도 안 믿기네. 이게 진짜 말이나 되는 일인가?”

뭔가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싶더니, 갑자기 2008년의 봄으로 돌아왔다.

장례식이 진행되는 3일 동안, 나는 내가 처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에 주력했다.

다행히도 사람들은 나를 이상히 여기지 않았다. 당황해하는 내 반응을 아버지를 여읜 아들의 모습으로 여긴 모양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이곳 평창동 저택에 있는 내 방 화장실에서 마침내 복잡한 마음을 다잡는 데 성공했다.

-끼릭!

나는 물이 흘러나오는 수도꼭지를 잠갔다. 그리고는 정신 집중을 위해서, 양 손바닥으로 내 볼을 가볍게 두드렸다.

“후우, 그래. 이건 꿈이 아니야. 이제 받아들이자. 지금은… 2008년이 맞아. 과거로 돌아왔어.”

2008년 봄. 아직 가을에 있을 글로벌 금융위기가 세상을 강타하기 몇 달 전이다.

회귀 전 삶에서 탄약그룹의 수장 자리에 앉혀진 나는, 이 위기로 인한 문제들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그리고 모든 책임을 홀로 뒤집어쓰고서 감옥에 들어갔고, 그동안 그룹은 공중분해 되었다.

붉게 충혈된 두 눈.

이전 일을 생각하니 머릿속으로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다.

입술을 깨무니 쇠 맛이 났다.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독백을 이어나갔다.

“두 번째 인생에서조차 멍청한 짓을 반복할 수는 없지. 이번엔… 어디 핵몽둥이라도 들고서 죄 뜯어고쳐야겠어.”

이번만큼은 다르다.

이미 나는 10년간 감옥에서 탄약그룹이 어떻게 망했는지에 대해 줄줄 욀 만큼 복기를 했으니까.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교도소 내에서 볼 수 있는 신문과 방송을 모조리 보고 머릿속에 구겨 넣었다.

“탄약그룹은 부실한 자회사가 많았다. 그래서 금융위기 때 부채 폭탄이 되어 돌아왔었고.”

얼어붙은 경제 상황, 무리한 사업 확장, 잘못된 기술 개발, 여기에 무능하고 부패한 임원진의 오판까지.

버티다 못해 파산하게 된 탄약그룹은 결국 여기저기로 쪼개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세면대에 기댄 손으로 힘이 잔뜩 들어갔다. 차가운 도자기 재질이 피부에 닿으니 현실감이 들었다.

“젊어진 걸 보니 돌아온 게 더 실감 나긴 하네. 이때는 진짜 젊긴 젊었구나.”

화장실 거울 속. 10여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 스물다섯의 나 자신.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 격투기 운동으로 탄탄하게 다져진 몸, 풍성하고 빽빽한 머리카락까지.

남자들 특징인, 화장실 거울 보면서 제멋대로 자뻑하는 것을 감안해도 빛이 난다. 어느 정도는 조명빨이긴 하지만.

“그런데 내 모습, 내가 봐도 좀 괜찮은 것 같은데? 이 정도면 그래도 나름 훈훈한 게 잘생긴 편….”

“그러엄! 우리 아들이 누굴 닮았는데. 당연히 훈훈하고 당연히 잘생겼지!”

갑자기 난데없이 내 방에 난입한 우리 엄마.

회귀 전 내 옥바라지를 하느라 금방 늙어버렸던 모습과는 달리, 지금은 그저 여느 재벌가 사모님 못지않게 젊은 모습이다. 비록… 누군가는 첩이라고 손가락질하지만.

신인 여배우였던 엄마와 젊은 재벌가 회장이었던 아버지.

젊은 나이에 일찍 세상을 뜬 본부인의 부재 사이, 두 사람이 벌인 불장난의 결과가 바로 나였다.

“우리 아들. 장례식 하는 동안 슬픈데도 의젓하게 있어 줘서 얼마나 대견한지 몰라.”

“엄마는 좀 괜찮아? 아버지 돌아가시고서 눈물이 마를 기미가 안 보이던데.”

아버지 이야기는 괜히 꺼낸 모양이었다. 눈시울이 붉어지려고 하는 것을 애써 참는 모습이 마음 아팠다.

그래도 여자보다는 어머니 쪽을 선택한 걸까? 엄마는 이내 정신을 다잡은 듯, 표정을 바로 하고는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제는 그러면 안 돼.”

“응? 뭐가요?”

내게 말을 꺼낼지 말지 고민하는 듯한 모습. 진중한 이야기를 꺼내기에는 시기상조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나 보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서서히 알아가면 되니까. 우리 서준이 머리 위에는 왕관이 올라갈 거라는 거.”

왕관. 탄약그룹의 회장 자리.

회귀 전, 이맘때에는 왕관이 무얼 의미하는지도 모르고 살았던 것 같다. 왕관의 무게를 버틸 수 있을 만큼 준비도 안 되어있었고.

그렇게 씁쓸한 과거를 곱씹으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바깥에서 무언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느긋한 말투, 늘 여유 있는 움직임,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가 인상적인, 식모 청주댁이었다.

“작은 사모님! 큰일 났구먼유. 이를 어쩐디야.”

“어머, 청주댁? 무슨 일인데?”

말로는 호들갑을 떨지만, 표정 하나만큼은 침착한 청주댁.

순박한 얼굴로 엄지와 검지를 살랑살랑 문지르며 엄마에게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

Show me the money, Ma`am.

“지가 입금이 안 되면 도통 입이 안 열려유. 작은 사모님도 잘 아시믄서….”

“아, 진짜! 이 아줌마는 안 그렇게 생겨놓고 돈독 하나는 제대로 올랐다니까. 자, 얼른 말해 봐요!”

엄마의 지갑에서 튀어나온 만 원짜리 열 장. 빳빳한 푸른 배춧잎이 청주댁의 앞치마 주머니를 향해 그대로 골-인했다.

공정거래를 철칙으로 하는 자본주의 여전사 청주댁. 그녀는 마치 자판기처럼 입금이 완료되자마자 곧바로 자신이 가진 정보를 내뱉었다.

“방금 이사장님 통화 허시는 거 엿들었는디, 도련님 사촌 형제들한테 계열사 지분을 준다 하시네유.”

“뭐라고? 이… 벼락 맞을 할망구가 우리 서준이한테는 아무것도 안 줬으면서! 절대 용서 못 해!”

청주댁의 말을 듣자마자 개구리 왕눈이처럼 동공이 확장된 엄마.

말로는 할머니를 용서 못 한다고 했지만, 사실 용서하고 자시고 할 게 있나 싶다.

아주 냉정하게 말하자면, 엄마는 첩이다. 심지어는 호적에도 못 올라간.

원래대로라면 집안에서 찍소리도 못하고 살아야 하는 엄마다. 하지만, 우리 김성혜 여사님은 아들 일이라면 암사자 같은 시어머니에게도 곧바로 전투 모드가 된다.

아직 거실로 채 내려가기도 전의 1층 계단. 우리 엄마는 마치 노련한 저격수처럼 할머니를 향해 전방에 5초간 함성을 발사했다.

“어머님! 어떻게 우리 서준이한테 이럴 수가 있어요? 한씨 가문 장손한테!”

* * * *

탄약그룹 내에는 속칭 서태후라 불리는 강철의 여제가 있다. 폭발 사고로 회장 자리가 비어버린 그룹을 수렴청정하는 서명희 이사장.

큰아들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에도, 그녀는 결코 겉으로 슬픈 감정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저 위기에 처한 그룹을 바로 세우기 위해 동분서주했을 뿐.

“개 짖는 소리 그만 허고! 법무팀에 지시해서 계열 분리 시나리오까지 싹 다 가지고 오라고 해!”

-쾅!

1층 서명희 이사장의 서재.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전화기에 대고 부하직원에게 호통을 치던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통화를 끊어 버렸다.

“그룹 본부에 순 머저리들밖에 없으니 원! 이봐, 청주댁. 냉수 좀 가지고 오게!”

마침 문가에서 청소하던 청주댁. 지시한 대로 냉수를 가지고 온 후, 서명희 이사장의 책상에 놓인 서류를 힐끗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안색이 살짝 변한 그녀는 황급히 인사를 올리고 곧장 자리를 떴다.

“그러믄 지는 나가보겠구먼유.”

“어여 가 봐.”

생각이 복잡해진 서명희 이사장. 오른손 위로 만년필이 이리저리 돌아가는 것이, 그녀의 머릿속 상황을 대변하는 듯했다.

“서준이 이놈이 회장 자리에 올라도 계속 꼭두각시 꼴이라면, 최소한 금융 쪽 계열사는 살려야 허는데….”

종법 질서상 회장직 계승 1위이지만 아직 어린 장손 한서준. 거기에 서자라는 출생의 비밀까지 있다.

앞으로의 그룹 승계 구도를 빨리 결정해야 하는 상황. 서명희 이사장은 속이 타는 듯, 책상 위에 놓인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간신히 꺼진 뱃속 불씨. 조금 쉬기 위해 의자에 몸을 깊이 묻는 그때, 바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그녀의 꿀 같은 휴식을 산산조각냈다.

“어머님! 어떻게 우리 서준이한테 이럴 수가 있어요? 한씨 가문 장손한테!”

온 집안에 메아리치듯 울려 퍼지는 며느리의 목소리. 서명희 이사장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저… 저, 붕어 대가리 같은 년. 제 아들 위한다고 하는 게 자식 잡아먹는 꼴인 줄도 모르는 년이….”

분명 아까 청주댁이 평소답지 않게 눈치를 설설 보더니, 그새 제 주인에게 일러바치러 간 모양이었다.

근본이 여배우 딴따라 출신이라 그런 것일까? 나이를 먹어도 연륜이 아니라 패륜만 늘어난다며 투덜거리는 서명희 이사장.

근처의 집어던질 만한 것을 아무거나 손에 쥔 그녀는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튀어나와 거실로 향했다.

“어딜 천박한 첩실이 이 집안에서 큰소리야! 당장 그 입 다물지 못해!”

* * * *

-슈우우웅!

은으로 만든 감사패 하나가 내 머리 근처로 아슬아슬하게 날아왔다.

조준은 엄마를 향해서 한 것 같은데, 날아온 건 내 쪽이라니. 할머니도 어지간히 분노 조절이 안 되나 보다.

“문중회에서 계승권 1위가 우리 서준이라면서요! 그룹 지분은 하나도 없는데 1등 하면 뭐하는데!”

“이런 미친년 꽃다발이… 그 입 못 다무느냐! 첩 따위가 어딜 감히 그룹 후계를 논해!”

추상같은 할머니의 호통.

금속 테 안경 너머로 풍겨오는 얼음장 같은 저 눈빛은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든다.

탄약그룹 내에서 서명희 이사장이라는 직책 대신, 서태후라 불리는 할머니다.

어지간한 임원급들도 한번 불려갔다 깨지고 나면, 팬티부터 갈아입는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이니 말 다 한 거지.

그런 할머니의 눈초리가 나를 향했다. 이 사달이 나게 한 원인이 왜 뒤쪽에 서서 지켜보고만 있냐는 뜻이었다.

“한서준이 네 녀석은 입술에 꿀이라도 바른 게냐! 어찌나 못났기에 제 어미 치마폭에서 벗어나질 못해!”

예전 같았으면 눈도 쳐다보지 못했을 할머니. 아마 이 호통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린 채, 축축해진 팬티나 신경 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두렵지 않다.

할머니가 내게 큰 목소리로 화를 내는 이유. 멀찍이 떨어져 있는 엄마에게 눈을 흘기는 이유.

이제는 전부 다 알고 있다. 그리고 그건 그저 내가 어깨에 지고 갈 수 있는 것들에 불과하다.

“그렇네요. 제가 망부석도 아니고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앞에는 서명희 탄약그룹 이사장이라는 큰 산 하나가 놓여 있었다.

지금부터 이 산을 넘는다. 그리고… 내 손에 탄약그룹을 쥘 준비를 할 것이다.

“치마폭을 벗어나면 쪽도 못 쓰는 머저리가 회장 후보라. 그럴 거면 차라리 탄약그룹은 문 닫는 게 낫겠군요.”

“허어, 이놈이?”

할머니는 처음 보는 내 굳은 모습에 당황한 듯했다. 평생을 단호함이라는 것과 거리를 두고 산 나였으니까.

꽉 쥔 주먹, 눈길을 피하지 않는 시선, 입가에 가볍게 걸어둔 미소까지. 나는 세상 두려울 것 따위는 없다는 얼굴로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이제부터 보여드리겠습니다. 어떻게 탄약그룹 왕좌에 오를 것인지. 서자라는 혈통 따위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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