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회장의 자격(2)
회귀 전, 할머니의 말에 사족을 붙이는 건 그 누구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나는 더욱 그랬다. 주제에 걸맞지 않게 얻었던 회장 자리. 그것을 손에 쥐고 절대 놓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아까 전 거실에서, 할머니는 내가 밝힌 포부를 듣자마자 혀를 차는 것으로 답했다.
“쯧… 꼴에 사내라고 허언은. 네놈 그릇은 정해져 있거늘.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는구나.”
“제 그릇 사이즈는 얼마나 큰지 아직 모릅니다만, 적어도 탄약그룹 사이즈가 어찌 될지는 알고 있습니다.”
눈썹 한쪽을 으쓱이는 서태후.
마뜩잖은 표정의 할머니는 내 쪽으로 턱 끝을 살짝 들었다. 어디 끝까지 말할 수 있으면 말해보라는 신호였다.
“이대로 가다간… 탄약그룹은 내후년을 버티지 못하고 공중분해 됩니다. 파산이죠.”
“어딜 감히 그런 불경한 소리를 지껄이는 게야! 네깟 놈이 뭘 안다고!”
기대했던 대답과 달라서일까?
서태후의 추상같은 노여움이 곧바로 나를 향했다.
잠깐이나마 모자란 손주 놈에게 강단이란 게 생긴 것처럼 보였겠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고작 이런 것이라니.
당장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아니, 이미 터져버린 할머니의 분노.
그 불꽃과도 같은 노여움을 앞에 둔 나는, 그저 침착하게 탄약그룹의 계열사 이름 세 개만을 읊었다.
“탄약 중공업, 탄약 건설, 탄약 조선 해양.”
중공업, 건설, 조선 해양.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급속도로 수축해버린 산업.
조만간 찾아올 전 세계적 불황기에 이런 대형 프로젝트 사업은 망하기 딱 좋다. 기존에 받을 돈도 못 받게 된다.
그리고… 이들 세 산업은 탄약그룹의 중핵이라 할 수 있는 사업 영역이었다.
“어떻게… 서준이 네가 그걸….”
탄약그룹이라는 왕국을 수렴청정하는 서태후. 세 계열사 이름을 듣자마자 할머니의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방금까지 칼바람처럼 휘몰아치던 격노는 놀라움으로 바뀐 지 오래였다.
“죽어가는 계열사를 품고 있으면 그룹이 죽습니다. 보이지 않는 부채에 목이 졸리게 될 겁니다.”
길게 말할 필요도 없다. 서태후라면 분명 그저 이 키워드만으로도 내 그릇이 어떤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할머니. 나는 고개를 숙여 짧게 예를 표하고는 자리를 옮겼다.
“회사 업무로 바쁘시겠지만, 이 점 숙고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 광경을 본 집안 식구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변해버린 아들의 모습에 놀란 엄마와 할머니만이 아니었다.
수다스러운 관리인 아저씨도, 느긋한 식모 청주댁까지. 하나같이 입에 손을 틀어막고 서로 놀란 눈동자만을 데굴데굴 굴리기에 바빴으니까.
“중공업, 건설, 조선 해양….”
2층 내 방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는 동안 들린 것이라고는, 할머니의 나지막한 독백.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 * * *
호텔 플로렌스. 탄약그룹 산하에 있는 강남의 5성급 고급 호텔.
검은 독일제 승용차 한 대가 호텔 로비 바로 앞에 멈추었다.
이내 뒷좌석 문이 열리고, 운전기사의 수행을 받은 나이든 귀부인 한 명이 차에서 내렸다.
“중공업, 건설, 조선 해양….”
서명희 탄약문화재단 이사장. 얼마 전 폭발 사고로 사망한 탄약그룹 고(故) 한화약 회장의 어머니이다.
“서준이 이놈이 대강 아무것이나 찍은 것은 아닌 모양이지만…. 이것만으로는 모르겠군.”
그녀는 오늘 집 안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홀로 중얼거렸다.
한씨 집안의 종법 질서상으로는 회장직을 이어받아야 할 유일한 장손. 그러나 서자라는 혈통 문제에 능력까지 부족해 보였기에 늘 고민이 많았다.
그러나 오늘, 그 모자란 손주 놈이 변했다. 마치 각성이라도 한 듯 제 어미 치마폭을 벗어나기 시작하더니, 그룹의 부실한 부분만을 콕 집어냈다.
“그래도… 혹시나, 혹시나 모른다. 만약 내가 생각한 그것이 맞으면?”
머리가 복잡해진 서태후. 그녀는 입고 있던 코트를 비서에게 넘기며 지시를 내렸다.
“금방 끝날 터이니 밑에서 대기하고 있게.”
“예. 이사장님.”
“아, 참. 그리고.”
결정하기를 조금 주저하는 듯한 서명희 이사장.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마치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듯한 어린아이처럼.
“김원철. 그놈아한테 연락해서 다시 좀 오라고 해.”
“…….”
김원철. 고(故) 한화약 회장을 충심으로 모시던 심복 중의 심복.
장례식 이후, 살면서 섬기는 주인은 오로지 한 명뿐이라며 탄약그룹을 떠난 그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지시 때문일까? 비서는 즉각 대답을 올리지 못했다.
그런 비서의 마음속을 읽기라도 한 듯, 코웃음을 친 서태후는 가볍게 호통을 쳤다.
“쓸데없는 생각일랑 허지 말고!”
“제가 어찌 감히 그런… 지시하신 대로 해 놓겠습니다, 이사장님.”
서태후가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난 비서. 그는 조심스레 주위를 살피고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화면 위에 적힌 번호는 그가 개인적으로 연락해서는 안 되는 사람의 것이었다.
-010-2039-XXXX. 한화기 전무
행여나 누가 볼세라, 살 떨리는 긴장감 속에서 들리는 통화 연결음.
비서의 애간장이 녹아 없어지기 일보 직전, 마침내 핸드폰 너머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전무님. 이사장님께서 방금 문중회에 입장하셨습니다.”
“어머니가? 오늘은 안 가신다더니 무슨 일이지?”
한씨 집안 문중회는 실질적으로 가문 내의 주주 의결 기관 역할을 하고 있다.
탄약그룹의 태생 자체가 이들의 자금을 기반으로 했기에, 지분 20%를 가진 문중회의 영향력은 막대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만… 한 가지 특이점이 있습니다.”
“특이점? 말해보게나.”
“김원철. 이사장님께서 김원철 그자를 다시 부르고자 하십니다.”
“김원철? 자네 지금 김원철이라 했나!”
* * * *
호텔 플로렌스 꼭대기 층. 이곳에는 일반 대중들에게 공개되지 않는 비밀 공간이 있다.
최고의 VIP들에게만 공개되는 이 공간은, 탁 트인 전망과 화려한 내부 인테리어 장식으로 채워져 있었다.
유리창 너머 반짝이는 강남의 야경을 배경 삼아 배치된 의자. 거기에는 한씨 집안의 사람들이 각기 가진 지분만큼 차례대로 앉아 있었다.
서명희 이사장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상석 바로 옆자리의 노인이 그녀를 반겼다. 노인 앞의 흑단 나무로 만든 명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탄약그룹 명예 고문 한덕술]
노인은 서명희 이사장의 아주버니이자 한서준에게는 큰할아버지가 되는 자였다.
“허어… 서 이사장님 오셨군요. 그간 뒷정리는 잘 되셨는지요?”
“못난 아들놈이 그렇게 가버린 탓에 정신이 없었지요. 배상 문제부터 집안일까지, 일단 급한 불은 다 껐습니다.”
구미 공장 폭발 사고.
고(故) 한화기 탄약그룹 회장이 공장을 시찰하는 도중 창고 내의 폭약이 모조리 터져버린 대참사.
그 사고 때문에 현재 탄약그룹에는 막대한 배상 책임이 뒤따랐다.
설상가상으로 책임을 져야 할 회장까지 저세상으로 가버린 상태. 결국, 수렴청정 중인 서명희 이사장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히고야 말았다.
“보험사 쪽에서 커버되는 금액이 6조 5천억 원. 자체 배상해야 할 금액은 3조 8천억 원이 넘게 생겼습니다.”
“저런… 이사장님께서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점잖고 온화해 보이던 한씨 집안의 노인. 이야기의 본론을 꺼내자마자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차기 회장. 누구를 낙점하실 생각이신지요?”
“…….”
말을 아끼는 서명희 이사장.
그녀의 마음속은 몹시 복잡해 보였다.
차기 회장 후보는 두 명. 승계 순위 1위는 전 회장의 유일한 아들인 한서준이다.
그러나 한서준에게는 서자라는 출생의 비밀이 있다. 따라서, 전 회장의 동생이자 승계 순위 2위인 한화기 전무에게도 왕관을 쓸 기회가 있다.
흰 수염을 쓰다듬는 한덕술 명예 고문.
앞에 놓인 녹차를 한 모금 마신 그가 입을 열었다.
“수렴청정으로는 한계가 있으니 어서 차기를 정해야 합니다. 주인 없는 배는 좌초하기 마련이니.”
“…고심 중입니다. 시간이 조금 걸릴 듯하네요.”
평소의 서태후답지 않게 미적지근한 반응.
문중회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한덕술 명예 고문은 마음이 급했다. 회장 자리를 비워서는 안 되는 것이니까.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긴 노인. 그는 이내 무언가 떠오른 듯, 서명희 이사장에게 입을 열었다.
“그룹을 이끌어갈 수 있는 재목이면 좋으나, 그게 아니라면… 당장 불어닥칠 폭풍을 피할 널빤지도 괜찮습니다.”
“널빤지라. 차라리 총알받이라는 말이 맞겠네요.”
“책임을 온전히 덮어씌우고 백지에서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요. 여하튼, 가급적 빠른 결정을 바랍니다.”
* * * *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거실.
몇 시간이 지났지만, 엄마는 아직도 가슴이 떨리는 모양이었다.
손으로 부채를 만들어 열기를 식히고 있는데, 마침 청주댁이 진정 효과가 있는 녹차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작은 사모님두 차암… 갑자기 그렇게 뛰쳐나가시면 어떻게 해유.”
“어머, 어머! 이 아줌마가 진짜. 자기는 돈 다 받았다고 스윽 빠지는 것 좀 봐!”
따지고 보면 둘 다 문제다. 돈 10만 원에 위험한 정보를 판 청주댁도, 그걸 듣고 전방에 함성부터 지른 엄마도.
청주댁은 늘 그렇듯, 머리를 긁적이며 엄마에게 모르쇠를 시전했다.
“지는 잘 몰러유. 머리가 나빠서 그른가? 사실 기억도 안 나구먼유.”
“내가 말을 말아야지! 됐어요, 어쨌거나 결과는 좋은 거 같으니까.”
갑자기 내 쪽으로 몸을 돌리는 엄마. 우리 김성혜 여사님은 걱정이 가득 묻은 눈으로 내게 말했다.
“아들, 왜 그랬어. 엄마는 아주 그냥 깜짝 놀라서 얼마나 가슴 졸인 줄 알아?”
내 오른손을 양손으로 꽉 쥐여 잡은 우리 엄마. 아들내미를 걱정하는 마음이 그대로 전달될 정도다.
“이제까지 할머니한테 안 그랬으면서 갑자기 왜 그런 거야?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은. 그냥 있는 사실 그대로 말한 건데. 아무 걱정하지 말고 좀 쉬고 계셔.”
“애간장 다 녹여 놓고 말은 잘해. 정말 무슨 생각이야?”
핀잔을 주듯, 말은 그렇게 해도 내심 입가에 미소를 걸고 있는 엄마. 이제까지 유약한 모습만 보였던 아들이 나름 든든한 모양이었다.
거기에 할머니에게 당당하게 이야기했던 것. 서자라는 혈통 따위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잘 해 보이겠다는 말이 마음에 든 듯했다.
한씨 집안 호적에는 첩실인 엄마의 이름이 없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엄마. 나름 머릿속에 계획이 있으니까.”
그렇게 엄마와 내가 간만에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전화를 받고 온 청주댁이 내게 말을 걸었다.
평소 할머니에게 혼이 나도 느긋함을 잃지 않는 청주댁. 그러나 지금은 다소 당황한 기색이 얼굴에 서려 있었다.
“저기, 도련님. 저녁에 어디 안 나가시쥬?”
“딱히 약속 같은 건 없습니다. 왜요?”
“그게… 이사장님께서 저녁 잡숫고 꼭 하실 말씀이 있다네유. 도련님 어디 가지 말라고 그러셨어유.”
단 몇 시간 만에 입질이 왔다.
아까 말한 중공업, 건설, 조선 해양이라는 단어가 할머니의 뇌리에 깊게 박힌 모양이었다.
그렇게 내가 머릿속에 정리된 과거 지식을 다시 되새기고 있는데, 청주댁이 내게 하던 말을 계속했다.
“근디 도련님. 오늘 저녁에 작은 어르신도 오신다고 허는디….”
“작은 어르신? 숙부… 말인가요?”
숙부, 탄약그룹 본부의 한화기 재무실장.
회귀 전 탄약그룹의 분식 회계를 숨기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모든 책임을 당시 꼭두각시 회장이던 나에게 모조리 덮어씌운 자이기도 하고.
“어떻게… 저녁 식사 참석하실 건가유? 정 불편허시면, 제가 전달을 못 했다 하고 대신 혼나도 돼유.”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 청주댁. 은근 곰 같으면서도 눈치는 여우인 사람이라 그런지, 정확하게 맥락을 파악하고 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단호한 내 대답에 살짝 놀라는 청주댁.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엄마 역시 예상치 못한 대답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오히려 기대되거든요. 숙부… 그러니까 우리 한화기 실장님하고는 한번 제대로 붙어봐야 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