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회장의 자격(3)
-똑똑!
종일 기다리던 노크 소리. 한화기 탄약그룹 재무실장은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어 애써 감정을 절제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다시 무표정으로 변하고 나서, 그는 문밖의 남자에게 대답을 주었다.
“들어와라.”
최근 신경 쓰이던 일을 밑에 직원에게 맡긴 한화기였다.
그의 조카, 한서준. 분명 자신의 계획에 장기 말로나 쓰일 법한 머저리였다. 우유부단하며, 판세를 읽는 능력이 없고, 어미의 혈통마저 천한, 그래서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기 적절한 자.
그런 조카에게 어머니인 서명희 이사장이 갑작스레 사람을 붙인다고 했다. 그것도 김원철, 선대 회장의 최측근이었던 자를.
“지시했던 것, 알아보았나?”
“이사장님께서 김원철 그자에게 연락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룹 기조실에서 비밀리에 인사이동 검토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주인에게 보고를 올리는 탄약그룹 감찰팀장 유지원.
자기 앞에 있는 이 차가운 남자가 언짢은 심기를 드러낼 때를 직감적으로 알아서일까?
그는 육중한 몸에 걸맞지 않게 다소곳이 손을 모았다.
미간에 주름이 잡힌 한화기.
보고서 맨 앞장 종이가 우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그가 입을 열었다.
“빌어먹을 할망구 같으니. 갑자기 또 무슨 변덕이지?”
“그룹 내에서는 별다른 징후가 없었습니다만, 평창동 내에서 특이사항이 있었습니다.”
“본가에서? 하! 설마 어머님이 그 첩년 따위에게 자비를 베풀기라도 하신 건가?”
혈통에 오점을 남기는 첩. 탄약그룹 한씨 가문의 정통성에 금이 가는 일만큼은 학을 떼는 서명희 이사장이다.
이제 와 동정심 따위에 철인 같은 서태후가 움직일 리는 없다.
“작은 사모와 관련된 것은 아닙니다만… 운전기사들 사이에서 도는 이야기를 종합해 볼 때.”
잔뜩 구겨진 채 한화기의 손에 잡혀 있는 서류 뭉치. 종이 사이로 보고 대상인 한서준의 사진이 유지원 감찰팀장의 눈에 들어왔다.
자기 주인의 심기를 최대한 거스르지 않게끔, 그는 조심스러운 어투로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한서준 개인의 역량이 피어났다… 라는 결론입니다.”
“유 실장, 자네 농담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군. 쓸모가 없어진 사람이기도 하고.”
서른 장이 넘는 보고서를 통으로 잡은 채 찢어발기는 한화기.
불길한 감정을 정면으로 마주해서일까?
그는 네 등분으로 찢긴 서류 뭉치를 그대로 유지원 감찰팀장에게 던져버렸다.
“…….”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한서준, 그 무능한 첩 새끼가?”
입을 굳게 다문 유지원 감찰팀장. 이놈의 한씨 가문 사람들은 하나같이 괴팍한 것이 한 성깔씩 한다.
어차피 보고서를 최종 검토할 때부터 억울하게 욕먹을 각오는 되어있는 그였다. 왼쪽 정강이에 보랏빛 피멍 하나쯤은 감수해야 한다.
그렇게 다가올 태풍에 대비해 이를 앙다물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따르르르릉!
책상 위 유선전화 액정에 찍힌 익숙한 전화번호. 서명희 이사장의 번호였다.
“예. 어머니. 아니, 이사장님.”
“저녁 일정 취소하고 여덟 시까지 평창동으로 오너라. 늦지 말고.”
평소 서명희 이사장의 말에 좀처럼 토를 달지 않던 한화기였다.
그러나 아까 전 조카에 대한 언짢은 보고를 받아서였을까? 그는 자신의 직감이 시키는 대로 이례적인 물음을 던졌다.
“…무슨 일이십니까?”
“하! 이제 반문도 할 줄 아는군. 막내 아들놈 머리도 하루아침에 커버린 겐가?”
막내 아들놈 머리‘도’.
불길한 직감이 맞아떨어졌다. 손아귀에 우그러졌던 조카의 사진만큼이나 그의 표정 역시 험상궂게 일그러지는 순간이었다.
“…아닙니다, 이사장님. 그럼 저녁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뚝!
끊긴 전화와 함께 찾아온 침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이를 앙다문 한화기는 찢긴 채로 바닥에 떨어진 종잇조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봐. 저기 저 종이쪼가리에 적힌 내용. 한 문장으로 정리해서 말해.”
서른 페이지가 넘는 문장을 요약하라는 직장 상사. 전화 통화 내용을 옆에서 들어보니 유지원 감찰팀장이 원래 조사한 내용이 맞는 모양이었다.
‘하, 저 개새끼가 진짜….’
당장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욕이지만, 꾸역꾸역 속으로 밀어 넣어야 한다.
딸내미 미국 유학 비용을 대려면 지금 자리를 지켜야 하므로, 무조건 참고 또 참는 게 답이다.
“…한서준이 말한 키 포인트는 중공업, 건설, 조선 해양 이 세 가지라고 합니다.”
“중공업, 건설, 조선 해양… 정말 머저리가 눈을 뜬 건가? 거기에 어머니는 김원철까지 붙이시겠다라.”
한화기는 자신의 책상 구석에 놓인 체스판 장식물을 바라보았다.
다른 말들 사이에 숨어 자신의 차례가 돌아오기만을 바라는 검은색 나이트. 앞으로 몇 수만 지나면 곧바로 상대 킹을 향해 돌진할 기세였다.
그리고 바로 지금, 흰색 비숍 하나가 나이트의 앞을 막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보지 못한 주교 모자를 눌러 쓴, 한서준이라는 비숍이.
“…후계 구도를 위한 수를 다시 두어야겠군.”
“실장님?”
“뭘 그렇게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나? 가서 할망구 의중이나 알아 가지고 와!”
갑자기 내려진 축객령. 문밖으로 쫓겨난 유지원 팀장은 품속 담뱃갑을 만지작거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하… 진짜, 우리 주인님 머리통 한 대만 때리면 소원이 없겠네.”
* * * *
할머니, 그리고 숙부와 함께하는 화목하지 못할 저녁 식사 전. 나는 내가 내뱉은 호언장담에 책임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시 봐도 선녀는커녕 아주 미친년이란 말이지, 우리 탄약그룹.”
책상 위에는 탄약그룹 전체의 재무제표와 현시점의 국제 금융에 관한 논문이 어지러이 널브러져 있었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관련 파생상품 규모 리서치
-대규모 엔지니어링 산업과 유동성 경색에 대한 상관관계 분석
중공업, 건설, 조선 해양.
2008년 가을의 금융위기가 찾아오는 순간, 순식간에 자금이 경색될 사업계획들. 당장은 탄약그룹의 자랑거리지만 머지않아 발목을 잡을 족쇄들이었다.
“돈 퍼먹는 하마들은 싹 다 육포로 만들어야 해. 이건 뭐 그룹 내실이 공갈빵만도 못하네. 그리고….”
자금과 관련된 사항에 이어, 내 눈에는 현재 기술 상황에 대한 보고서 요약본이 비추어졌다.
아직 하늘을 제멋대로 활보하는 드론도 없다. 고성능 고효율 2차전지도, 빅데이터를 처리할 인공지능도 없다.
미래에 태동하게 될 핵융합 발전 기술도, 우주 산업과 관련된 기술도 없는, 4차 산업혁명 이전의 모습이었다.
“그래도 이건 큰 방향만 잡아주면 되겠다. 자잘한 것들이야 실무진이 알아서 구를 테고… 문제는 투자금인데.”
시간과 예산. 공돌이들에게 미래 기술 개발을 시키면 늘 반대급부로 필요한 것들이다.
시간이야 인력을 갈아 넣으면 되는 문제다. 피라미드도 지었는데, 21세기의 공돌이들이 기술 개발을 못 할 리가 없다.
그러나 예산은 그렇지 못하다. 천문학적인 금액의 자본이 딱 맞는 시기에 과감하게 투입되어야 한다.
“최소 수십조 원에서 많게는 수백조 원까지. 무슨 짐바브웨여? 화폐 단위가 좀 이상한데?”
가장 화끈하게 돈을 끌어모으는 것은 가상화폐지만, 아직은 2008년. 10년을 죽어라 묵혀야 비로소 돈이 된다.
“코인은 김장 김치 같은 거니까 묵은지 될 때까지 기다리고. 일단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그렇게 내가 자금 조달 방안에 대해 이리저리 생각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식모 청주댁이었다.
“도련님. 들어가도 되나유?”
“네, 무슨 일이죠?”
“방금 이사장님 도착하셨거든유. 이야기부터 끝내고 진지 잡수실라나봐유. 서재로 곧장 오라시는디.”
문밖에 인기척이 더 있다 싶었더니 엄마가 선 채로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들내미가 걱정되는 모양인지 눈동자는 불안함으로 가득 찬 상태.
“쬐끄만한 게 벌써 이렇게 커가지고….”
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팔짱을 낀 엄마에게 다가가 씨익 웃음을 지었다.
“잘 하고 올게요. 기대해도 좋아.”
* * * *
여자 기숙사 사감 선생님이 최종 진화를 하면 이런 눈빛일까?
서명희 이사장은 자신 앞에 선 두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서자인 맏손주 한서준, 둘째 아들인 한화기.
손주 놈은 종법 질서상 계승권 1순위지만, 서자라는 약점을 가졌고 능력은 미지수. 둘째 아들놈은 재무 쪽으로는 제법 경험이 있으나, 회장의 재목은 아니다.
‘조만간 둘 중 하나는 회장 자리에 올려야 한다. 문제는 그룹이 처한 상황인데….’
서명희 이사장의 첫째 아들이자 선임 회장의 사망 이유인 구미 공장 폭발 사고. 연말까지 지급해야 할 보상금이 무려 3조 8천억 원에 이른다.
안 그래도 무리한 투자로 불안하기 짝이 없는 탄약그룹에 치명타가 아닐 수 없다.
‘폭풍우를 뚫고 지나갈 선장을 올리던지, 아니면… 문중회 영감탱이 말대로 책임을 뒤집어쓸 총알받이를 내세워야 하는군.’
원래대로라면 총알받이를 내세울 생각이던 서태후였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서자 손주 놈에게 당장 욕받이 역할을 시킨 후, 자숙기간을 갖게 한다.
그리고 그동안 재무 쪽 전문가인 둘째 아들을 통해 그룹을 안정화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버리는 카드였던 손주 놈이 실상은 원석이었다면?’
중공업, 건설, 조선 해양.
손주가 그룹의 약한 고리를 명확하게 짚어낸 그 순간. 가치라고는 없는 시커먼 돌덩이 사이에서 광채가 서리는 듯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서명희 이사장. 재벌로서의 직감이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회장 옹립 결정이 조금 늦어져도 재목인지 여부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오래 걸릴 것도 없다. 석 달, 딱 석 달간만 문중회의 압력을 견뎌내면 이 새싹이 어떻게 필 것인지 확인할 수 있다.
마침내 고민을 끝낸 서태후. 그녀가 앞에 선 두 남자를 보고서 입을 열었다. 지극히 단도직입적으로.
“두 사람 모두, 탄약그룹의 회장 자리에 관심이 있겠지. 그렇지않더냐?”
“…….”
“…….”
한서준과 한화기, 두 사람 모두 즉각 대답하지는 않았다.
무언가 머릿속에서 자기들만의 계산을 하는 듯, 누구도 쉬이 속내를 밝히지 않는 상황.
그리고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콧방귀를 뀐 서명희 이사장. 그녀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스윽
마호가니 책상 위, 그녀의 주름진 손. 그리고 두 남자에게 각기 주어진 그룹 본부 인사이동 관련 문서.
서명희 이사장이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이 그곳에 적혀 있었다.
-한화기 재무실장(전무급), 재무 본부장(부사장급)에 보함.
-한서준, 전략실장(상무급)에 보함.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걸까?
인사이동 문서를 받아든 두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그런 반응이야 알 바 아니라는 듯, 탄약그룹의 안주인은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이며 단언했다.
“앞으로 석 달. 각기 주어진 위치에서 성과를 내는 것을 보겠다. 후계 문제는 그때 정할 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