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장님의 핵몽둥이-5화 (5/300)

5화응우옌 서 쭈운(1)

“이거야 원….”

청계천이 내려다보이는 탄약그룹 본사 건물.

새로이 재무 본부장으로 승진한 한화기는 이 상황이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 듯한 모양이었다.

머리 위에 물음표 한 개를 띄운 채 알쏭달쏭한 얼굴을 한 그는 턱을 괸 채로 무어라 중얼거렸다.

“한서준…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그의 조카가 서명희 이사장으로부터 전략실장 타이틀을 받은 것은 생각해 둔 범위 내의 일이었다.

전략실.

기존에 전례가 없던 조직 인데다가 주어진 권한도 명확하지 않다.

그래서일까?

전략실로의 부서 이동 희망자는 단 한 명도 없는 상황. 제대로 인력풀도 구성되지 않은 가건물 같은 부서라 볼 수 있다.

“포기하기라도 한 건가? 싸워보지도 않고 처음부터? 놈이 그럴 리가 없을 텐데….”

한화기는 자신의 책상 위에 올라간 서류를 만지작거렸다. 자신의 최측근인 유지원 감찰팀장으로부터 받은 보고서였다.

-한서준 전략실장이 일주일째 출근하지 않음. 행방이 모호한 상황으로, 회사를 포함한 어디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음.

심기가 불편한 한화기.

분명, 그의 조카가 서태후의 서재에서 인사이동 서류를 건네받았을 때 보인 눈빛은 맹수의 것이었다.

이미 중공업, 건설, 조선 해양이라는 키워드로 이빨과 발톱을 드러냈던 한서준.

그런 그가 벌써 포기라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도 없는 상황.

-똑똑똑!

생각에 잠긴 그를 깨운 것은 직속 여비서의 노크 소리였다. 시곗바늘이 가리키는 시간은 8시 50분. 그룹 본부 조간 회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본부장님, 이동하실 시간입니다.”

“벌써 그렇게 되었군. 이봐, 김 비서.”

무언가 생각이 난 듯한 한화기.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회의 끝나고 금융 쪽 계열사 사장들 따로 모이라고 해.”

“예, 알겠습니다, 본부장님.”

“그리고, 내 자식새끼들도 그 자리에 같이 참석시켜. 서호, 서후, 서희까지 셋 다.”

한화기의 자녀인 한서호, 한서후, 한서희. 세 사람은 각각 탄약 증권, 탄약 손해보험, 탄약 캐피탈에서 차장급 직위에 앉아 있다.

평소였으면 아직 미숙한 그들을 사장단 회의에 참석시킬 일은 없다.

그러나 지금은 후계 경쟁에 막 불이 붙은 상황. 다소 무리수를 던지더라도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다.

“세 분 모두 오늘 따로 일정이….”

“오늘 일정이고 뭐고 다 상관없으니까 무조건 오라고 해. 절대 늦지 않게.”

“예, 본부장님. 그대로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눈치를 보더니 공손히 인사를 하고 멀어져가는 직속 비서.

거울을 보며 비뚤어진 넥타이를 고쳐매던 한화기는, 남들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혹시 모르니 돈놀이 쪽에서 자식놈들 성과를 좀 만들어 둬야겠군.”

평창동 저택 내의 끄나풀들을 통해 듣기로는, 서태후가 한화기의 자식들에게 금융 쪽 계열사 지분을 줄 마음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현재 차장 직위에서 부장 또는 상무급으로 올려도 별다른 반발은 없으리라.

그렇게 행복한 생각을 하면서 방문을 나서는 한화기. 갑자기 그의 품속에서 진동 소리가 들렸다.

-지이이이잉!

“아, 유지원이. 무슨 일인가?”

“본… 본부장님! 큰일입니다!”

마치 발등에 불이라도 떨어진 듯한 목소리의 유지원 감찰팀장.

평소 궂은 면박에도 주인 앞에서는 호들갑스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던 그였다.

그런 부하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은 한화기. 그의 등줄기에 무언가 불길한 촉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중공업, 건설, 조선 해양.

그의 조카가 겨눈, 날카로운 칼날이 다가오는 듯한 촉이.

“설마….”

“한서준, 한서준 전략실장이 지금 나타났습니다! 지금… KS 산업 비자금 관련한 부분을 털고 있습니다!”

“뭐야! 한서준 그놈이 KS에 대한 건 어떻게 안 거야!”

일그러진 한화기의 표정이 거울에 비쳤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그리고 왜 불행은 항상 몰아서 오는 건가.

목소리만 들어도 식은땀을 흘리고 있을 것만 같은 유지원 감찰팀장. 전화기 너머로 그가 또 다른 비보를 전했다.

“그리고… 서명희 이사장님께서 오늘 자 그룹 본부 회의에 참석하신다고 합니다. 본부장님? 본부장님?”

이를 앙다문 채 주먹을 꽉 쥔 한화기.

판이 깔린 지 불과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는데, 한서준의 묵직한 잽이 그의 얼굴을 후려갈긴 셈이었다.

-째깍째깍….

무심하게 돌아가는 시곗바늘이, 마치 그에게 빨리 조간 회의에 참석하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한서준, 이놈이 감히….”

* * * *

“응우옌! 응우옌! 이리 오라니까!”

애타게 나를 찾는 반장의 목소리.

이 자리에서만큼은 나는 한서준이 아니다. 당당한 베트남 황실의 후예이자, 한국으로 일하러 온 성실한 외국인 노동자일 뿐.

내 목에 걸린 명찰에는 가짜 신분이 적힌 ID 카드가 매달려 있었다. 그 싸구려 플라스틱 카드에 인쇄된 이름은 다음과 같았다.

-일용 노동자 : 응우옌 서 쭈운

며칠 전, 할머니로부터 전략실장 직함을 받은 나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주어진 시간은 고작 석 달. 그동안 서태후에게 내 가치를 입증해야 한다.

이런저런 방법들을 고심해 보았으나, 단기간에 무언가를 보여줄 방법은 단 하나였다.

탄약 중공업, 탄약 건설, 탄약 조선 해양의 부실, 그것도 숙부와 관련된 것을 미리 밝혀 경고하는 것.

“얌마, 응우옌! 거기서 뭣 허냐. 얼 좀 그만 타고 빨리 온나!”

“반장님 잔소리 많다. 반장님은 시끄러운 대머리.”

“아니, 응우옌 이놈은 한국말을 어디서 이상하게 배워 가지고… 진짜 베트남 사람 맞아?”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은 울산광역시, 탄약그룹 계열사의 생산 기지가 집중된 지역이다.

탄약 중공업, 탄약 건설, 탄약 조선 해양 3사의 합작으로 진행되는 해양 플랜트 사업. 그 기초 건설 구조물이 내 눈앞에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으나 티를 내서는 안 된다.

외국인 노동자로 신분을 위장한 내게 당장 필요한 건 감탄사가 아닌, 메소드 연기였으니까.

진정한 응우옌이 되기 위해서, 나는 군용 갈색 위장크림을 얇게 얼굴에 펴 바르는 것까지 감수했다.

구릿빛 피부, 떡 진 머리, 낡아빠진 옷차림까지, 누가 봐도 생활고에 찌든 듯한 외국인 노동자다.

“응우옌 한국말 잘한다. 응우옌은 베트남 엘리트다. 반장님은 탈모 엘리트.”

“시끄럽다! 헛소리 그만 허구, 얼렁얼렁 이동하자니까!”

처음에는 전략실장 명함을 들고서 회사 내부 장부를 요구할까 생각도 했다.

마치 전략 컨설팅 회사나 회계법인 감사팀이 그러하듯, 문제점을 쏙쏙 짚어서 공개하는 식으로 말이다.

‘협조자가 있다면 가능했겠지만…. 중간에 숙부의 수족들이 업무 협조를 죽어도 안 할 테니 불가능하겠지.’

회귀 이전, 허수아비 회장 자리에 있을 때도 그랬다.

내가 꼴에 혁신안이라고 가지고 온 것을 진행할 때, 한화기는 자기 사람들을 이용해 의도적으로 업무를 지연시켰다.

순전히 나를 견제하기 위해서.

‘또 그 짓거리 당하면, 석 달이란 시간은 막바로 순삭이라니까.’

직속 부하도 없는 상황에 허울뿐인 전략실장 자리. 말라죽기 딱 좋다.

결국, 내가 찾은 답은 현장에서 부실에 대한 증거를 잡아 그룹 본부 회의에서 전부 털어버리는 것이었다. 내부 장부를 까는 것은 그다음이다.

“다 왔다. 내리자, 응우옌.”

그리고 지금, 며칠간의 고생 끝에 나는 탄약그룹 해양 플랜트 산업의 고질병이라고 할 수 있는 중심부에 도착했다.

-끼이이익!

거대한 크레인 하나가 벌겋게 녹이 슨 고철들을 마구잡이로 움켜쥐고 트럭에 적재하고 있었다.

회귀 전, 탄약그룹 내에서 난리가 났던 고철 폐기물 처리 리베이트 사건.

분명 회사는 폐기물 업체인 KS 산업에 고철값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러기는커녕 역으로 수백억대의 수거 비용을 지급하였고.

‘나중에 드러난 바로는…. 숙부의 불법 비자금 조성 주요 루트였지.’

구슬땀을 흘리며 노가다를 하던 나는 중간중간 소형 캠코더를 이용해 작업 과정을 화면에 담았다.

분명 하청 업체여야 할 KS 산업이 갑의 위치에서 작업 지시를 하는 모습과

-야… 이! 탄약 애들 일하는 게 왜 이따구야? 무슨 거북이여? 빨리빨리 적재들 못 허냐?

탄약 중공업 현장 소장이 KS 산업 관계자에게 직각으로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장면과

-하하… 이거 잘 부탁합니다. 저번 건으로 저희도 크게 챙겼어요. 다음 주에는 구리 파이프니까 단가가 좀 될 겁니다.

거기에 물량이 제대로 맞는지 체크하는 과정에서 공식 서류에 담긴 숫자까지 캠코더에 담을 수 있었다.

-폐기물 목록: 고철 250톤, 9,000만 원.

“히야… 고철 250톤이면 원래 12억 원을 받아야 하는 건데, 오히려 저쪽에 폐기물 처리비로 9,000만 원을 주네? 이것들이….”

“응우옌! 얌마, 조용히 해라. 이거 본사 높으신 분이 알면 난리가 날 것이여.”

내 혼잣말을 들은 모양인지, 반장 아저씨가 흠칫 놀라서 내 입을 손으로 막았다. 하필 기름때 묻은 꼬질꼬질한 목장갑 낀 손으로.

“웩.”

“웩 같은 소리 하네. 내가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혹여라도 이거 밖에서 말하면 안 된다. 이거 현장 소장도 얽혀 있는 건이여.”

반장 아저씨는 진심으로 내가 일자리를 잃을까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이 사람 좋은 대머리 아저씨는 담배 한 개비를 꼬나물고는 나를 타일렀다.

“잘못하면 응우옌 너 비자 막혀서 불법체류자로 전락할 수 있어. 그래서 보조는 외국인 쓰는 거고.”

“반장 아저씨 걱정하지 마라. 나 비자 짤려도 상관없다. 나 힘 좀 센 사람이다.”

“이건 무슨 똥배짱인지 원… 아무튼, 난 얘기해줬다. 만 원 줄 테니까 가서 커피랑 빵 좀 사 오고.”

* * * *

빵을 사러 갔던 내가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나는 일용 노동자 ID 카드를 그대로 목에 걸고는, 현장 사무실로 직행했다.

손에는 오늘까지 사용했던 신분증과는 전혀 다른, 탄약그룹 본부 전략실장 명함을 내보이며.

“저기요! 아저씨, 여기 들어오면 안 돼요. 아… 더럽게 진짜!”

앙칼진 경리 직원 하나가 코를 막고 성가시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고 보니 이 직원, 아까 전 KS 산업에 고철을 넘길 때 함께 있던 사람이었다. 일종의 공범인 셈이다.

“더러운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고, 여기 소장이나 나오라 하쇼.”

경리 직원 눈앞에 점점 가까워지는 내 명함.

실시간으로 눈매 교정 수술이라도 받는 중인 걸까?

좁쌀만 하던 그녀의 눈알이 점점 왕방울만 하게 커지는 모습이 실시간으로 보였다.

“진짜… 전략실장? 한서준… 상무님?”

“뭐야! 박 주임, 무슨 일인데 이렇게 시끄럽나! 이 노가다 놈은 또 뭐고!”

때마침 나타난 배불뚝이 현장 소장. 에베레스트산처럼 부풀어 오른 똥배를 자랑하기라도 하듯, 뒤뚱거리며 걸어온 그가 손으로 내 명찰을 낚아챘다.

“응우옌 서 쭈운? 무슨 동남아 외노자야? 얌마, 너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당장 저리 안 꺼져!”

“저기, 소장님. 그분은 응우옌이 아니라요….”

“박 주임아. 그게 무슨 소리냐? 이놈 이거 손에 꼴같잖은 명함은 또 뭐고… 어, 어….”

빙결 광선이라도 맞은 듯, 갑자기 얼어붙은 현장 소장. 20년간 현장에서 잔뼈가 굵던 그의 머리에 비상 경보음이 울려 퍼지는 순간이었다.

“전략실장… 한, 한서준!”

“내가 여기 오기 전에 그룹 감찰팀에 연락했거든?”

뻥이다. 한화기의 수족이 팀장 자리에 있는 감찰팀에 연락할 리가.

그러나 당장이라도 오줌싸개가 될 것만 같은 현장 소장에게는, 감찰팀이라는 단어가 매우 효과적인 모양이었다.

이미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 채 그저 밑바닥만 보고 있는 배불뚝이 아저씨. 나는 그에게 맹수가 초식 동물에게 그르렁거리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당장 KS 산업하고 관련된 거래 장부 가지고 와. 빤쓰 속까지 싹 털리기 전에.”

“저기… 전략실장님. 저 혼자 한 거니까 제발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주시면….”

“개소리하고 있네.”

자진해서 순장조가 되려는 현장 소장. 나름 윗선에서 커버해줄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내가 한 번만 말할 테니까 잘 들어.”

나는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짬 바이브로 배불뚝이 현장 소장에게 조언 아닌 조언을 해 주었다.

“혼자 싹 뒤집어쓰고 교도소 가는 거, 생각보다 훨씬 개떡 같거든. 정말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