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김원철(1)
김원철은, 아니 오늘 자로 위촉된 탄약그룹 본부 김원철 전략부실장은, 도도하게 흐르는 청계천 앞에 서 있었다.
자그마한 돌다리를 건너, 계단을 올라가면 바로 나오는 탄약그룹 본사. 이 49층짜리 거대한 유리 궁전은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나 보다.
그의 어린 시절부터 함께했던 고(故) 한화약 전 탄약그룹 회장의 영혼이 주변에 맴도는 걸까?
그는 아비에 이어 그 아들까지, 두 부자를 회장 자리에 올려야 한다는 운명을 실감하고 있었다.
“거기에 마귀할멈은 예나 지금이나 나한테 역정 내는 건 똑같단 말이지. 뭐… 옛날에 비하면 많이 늙으셨지만.”
어제 양평 낚시터에서 김원철은 결국 서태후의 제안을 수락했다.
단순히 즉흥적인 결정은 아니었다. 고(故) 한화약 전 탄약그룹 회장과 근 50년을 죽마고우로 지낸 그였기에, 서자라는 것이 한씨 집안 사람들에게 있어 어떤 대우를 받는지도 알고 있었다.
피바람이 불 것은 눈을 감고서도 훤히 보이는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망할 놈! 할 거면 진즉 한다고 할 것이지, 네놈은 꼭 일을 어렵게 가게 한다.’
김원철이 제안을 받아들이자 대뜸 욕부터 하던 서명희 이사장. 목소리에 안도감이 묻어 나왔다는 것은, 오직 통화 당자자 만이 알 수 있었다.
‘굽이굽이 가는 것도 일종의 낭만 아니겠습니까. 흐흐흐.’
‘헛소리! 주어진 시간이 석 달도 안 되거늘. 문중회 영감탱이들 머릿속 사정도 뻔히 아는 놈이!’
한씨 가문 문중회.
탄약그룹의 경영권은 직계가 물려받지만, 소유권은 수많은 방계 문중이 잘게 나누어 가지고 있다.
친우인 선대 회장과 함께 무언가 혁신적인 업무를 추진할 때도, 그리고 그가 원치 않은 정략결혼을 강제로 할 때도 문중회의 거센 입김이 늘 따라다녔을 정도였다.
심지어 그토록 아끼던 내연녀와 서자를 내치려고 했던 이들 또한 문중회의 다수파였고.
‘…….’
잠시 말을 아끼는 김원철. 서명희 이사장은 그 침묵의 이유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자신이 낳은 자식 일일지언정, 그녀는 다소 조심스러운 어투로 입을 열었다.
‘혹여 자네, 죽은 화약이 그 녀석 생각이라도 나서 그리하기로 결정한 겐가?’
‘아, 꼭 선대 회장 유지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낚시꾼 변덕이라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선대 회장의 유지.
굳이 말하자면 유지라기보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부탁에 가까웠던 것.
고(故) 한화약 회장은 호적에도 못 든 내연녀와 서자 아들에게 공식적인 신분을 주고 싶었다.
특히나 평생 사생아 딱지를 달고 살아갈, 능력조차 모자랐던 그의 유일한 아들에게는 더더욱.
‘아무튼, 그 전략실인지 노략질인지 하는 조직 말입니다. 그거 구성부터 슬슬 할까 합니다. 아직 그렇게 안 늦었죠?’
‘넉살은… 시간 많지 않으니, 빨리 튀어오기나 해라! 내일 당장 본사로 오고!’
보통 무슨 일을 맡기기 전에는 며칠만이라도 말미를 주는 것이 보통이지만, 서태후는 그런 걸 사치라고 생각했나 보다.
불과 하루 만에, 아니 시간으로 따지자면 만으로 열일곱 시간 만에 회사에 온 김원철.
유리창에 반사된 아침 햇살을 맞으며, 그는 탄약빌딩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약속했던 시간까지 불과 5분여 남은 상황.
“흐으… 하여간 우리 마귀할멈 성질 하나는 끝내주신다니까. 아주 여장부가 따로 없어. 그나저나….”
본사 로비에 들어서는 와중에도 김원철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그것. 어제 보았던 회의록 내용이 그의 정신에 또아리를 튼 채로 자리하고 있었다.
-한서준 전략실장: 고강도의 구조조정, 사업부 매각 및 개편, 계열사 간의 통폐합. 위기에 대비하기 위해서 탄약그룹은 살을 베어낼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그는 처음으로 그르렁거리기 시작한 새끼 사자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적어도… 나쁘지는 않았다.
이 정도 깜냥이면 급하게 대관식을 치른다고 한들, 적어도 허수아비나 총알받이 꼴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흐음….”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 버튼을 누른 김원철이 무어라 중얼거렸다. 휑하니 비어버린 정수리를 쓸어넘기면서.
“쩝, 탄약그룹 내부에 피바람 좀 불겠구먼. 정신 안 차리면 내 머리털도 남아나지 않겠고.”
* * * *
-털썩!
푹신한 침대 매트리스 위로 다이빙. 회귀 전 감옥에서는 결코 누리려야 누릴 수 없었던 감각이다.
나는 구름 같은 이불 위에 누워 어제의 살벌했던 그룹 본부 회의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일단 기본은 먹어준 것 같고. 문제는 실천인데 말이지.”
중공업, 건설, 조선 해양 3사의 사장들은 회귀 이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일단은 숙부의 편이다.
나중에 재활용할 수 있는 인원을 추린다 한들, 일단은 신용할 수 있는 내 사람이 필요하다.
나는 손을 뻗어 침대 머리맡에 놓인 인사 서류를 집어 들었다. 회장의 자질을 보인 데에 대한, 할머니가 내게 준 일종의 보상이었다.
‘옜다. 가져가서 쓸만하다 싶은 놈 있으면 한번 골라잡아 봐라.’
‘꼭 무슨 수산시장 횟감 고르는 것 같네요.’
‘횟감? 네놈이 물고기 보는 눈은 있고?’
비록 회장의 싹을 보여주었다지만, 산전·수전·공중전까지 겪은 서태후에게는 아직 내가 부족해 보이는 모양이었다.
‘예산과 인력을 달라고 했지? 전략실에 필요한 예산은 주겠다. 범위 내에서 마음껏 써라. 그러나,’
그나마 쌈짓돈은 풀어주겠다는 할머니. 내 앞으로 된 재산이 얼마 없는 차라 돈이 부족하기는 했다.
‘인력은 네 마음대로 못 한다. 적어도 서준이 네 녀석을 보좌할 고명대신은 내 찍어 둔 놈이 있다.’
결국, 메인 횟감은 본인이 직접 고르고 나머지 스끼다시나 내가 선택하라는 것이었다.
어쩐지 건네받은 인사 서류에 차장급 이상은 없었다. 전부 과장 이하 젊은 친구들일 뿐.
나는 침대에 누운 채 들고 있던 서류를 다시 침대맡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고명대신이 될 횟감에 대해서 생각했다.
“김원철, 그 낚시꾼 아저씨가 나한테 온다라….”
한 번. 딱 한 번 그는 회귀 전 내가 교도소에 있을 때 면회를 온 적이 있다.
낚시 조끼를 입고 찾아와 영치금 계좌 잔고를 가득 채워준 대머리 키다리 아저씨.
자신이 아버지의 친구였다고 말하던 그는 나를 퍽 불쌍한 눈으로 바라보았었다.
나중에 따로 조사하고 보니, 아버지의 직속 비서실장이었던 김원철. 그가 나를 도우러 온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잘 모르는 아저씨고, 일단은 한번 부딪혀 봐야….”
“서준이 너! 김원철 아저씨가 너한테 온다고 했다며?”
이런. 내 프라이버시는 왜 항상 없는 거람.
오랜 교도소 생활로 내 방이라는 게 없었기에 방문을 잠그는 습관이 좀처럼 들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가끔 이 집안사람들은 노크도 없이 내 방에 불쑥 들어오곤 한다.
방금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엄마도, 그리고 엄마 뒤에 살짝 숨은 채 내 눈길을 피하는 식모 청주댁도.
“엄마? 김원철 아저씨 이야기는 어떻게… 아아, 알 것도 같다.”
청주댁의 앞치마 주머니가 만 원짜리로 불룩한 걸 보니 소문의 슈퍼 전파자가 누군지는 뻔했다.
내가 무어라 중얼거린 걸 듣고서, 그대로 엄마한테 말하러 간 것이리라.
“지는 잘 몰러유. 무슨 일인감유?”
“하, 어련하시겠습니까. 청주댁은 그렇다 치고. 아무튼, 엄마. 김원철 그 양반 혹시 아는 분이에요?”
잠시 눈시울이 붉어지는 듯한 엄마. 무언가 슬픈 과거를 회상할 때면 늘 이런 모습이 나오곤 한다.
침대에 앉은 내게 다가온 엄마는 두 손을 꼭 잡고 당부하듯 말했다.
“그 사람 꼭 붙잡아. 꼭!”
“네? 그게 무슨….”
“원철이 아저씨…. 엄마하고 너희 아빠 이어준 사람이거든. 분명 서준이 너도 도와줄 거야.”
* * * *
한화기의 장남, 한서호 탄약 증권 리스크 사업부 팀장.
한강 너머 압구정 일대의 야경이 보이는 한남동 고급 빌라 응접실. 거만한 표정의 한서호는 두 동생에게 술 한 잔씩을 따라 주며 입을 열었다.
금융 쪽 계열사 회의를 마친 그날 저녁, 모든 것을 종합해 본 그는 확신을 가졌다.
그의 아버지인 한화기가 본격적으로 회장 자리를 향해 움직일 것이라는 사실을.
“다른 잘 들어. 이 상황, 위기이자 기회다. 무슨 말인지 알고 있겠지?”
“하, 기회는 무슨. 딱 보니까 할망구가 그 첩 새끼 끼고 돌던데, 형은 무슨 머릿속에 마요네즈라도 들어가 있나?”
맏형의 말에 괜히 핀잔을 주는 둘째 한서후. 그는 벌써부터 황태자라도 된 듯 설레발을 치는 형이 못마땅했다.
어차피 아버지가 회장 자리에 오른들 자신에게 떨어지는 떡고물은 변함이 없는 상황.
‘마요네즈라니, 이놈이 기어오르려고 작정을 하는군.’
맏형 한서후는 동생의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우군을 최대한 확보해야 하는 상황. 애써 웃는 얼굴을 유지한 그가 동생의 잔을 재차 채워주며 말했다.
“끼고 돌긴. 그건 그냥 할망구 성격이 괴팍해서 그런 거다. 한서준 그놈이 밑천을 드러내는 순간, 바로 관심을 거둘 거고.”
“참, 나. 형! 그 새끼 회의록 안 읽었어? 미국발 금융위기는 나름 신빙성 있는 가설인 거 모르나?”
탄약 손해보험에서 기업보증 업무를 맡은 한서후. 비록 팀장 직위일지언정 임원 회의에 꼬박꼬박 참석하는 그였다.
안정을 추구하는 소수파 쪽에서 비슷한 의견이 몇 번 제기된 적 있었던 게 기억난 모양이었다.
“보증 업무 쪽 먹물들도 그 얘기 하더라. 헷지 상품 팔아둔 거, 슬슬 재보험사에 맡기든 프리미엄 주고 해지하든 하라고.”
“하, 멍청한 놈이…. 한서후, 너는 그 말을 진짜 믿는 거냐? 스물다섯 먹은 첩 새끼가 제멋대로 지껄인 개소리를?”
내친김에 아예 기세를 잡기로 마음먹은 한서호. 그는 둘째 한서후에게 가까이 다가가 윽박지르듯이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미국 부동산 시장이 하루아침에 붕괴되고, 월가의 늑대들이 순식간에 파산한다고? 그것도 수천억 달러의 빚을 남긴 채로?”
“그거야 어디까지나 최악의 경우를 생각했을 때….”
기가 죽은 둘째 한서후. 하필이면 막내 여동생이 보는 앞에서 망신을 당했다.
그러나 맏형의 말에 달리 반박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모양인지, 다시 입을 열지는 않았다.
“꿈같은 이야기는 집어치워. 그건 말 그대로 개꿈에 불과하니까. 우리는 이 역대급 호황기에 실적만 내면 된다.”
골디락스 존.
물가상승 없이도 달콤한 경제성장이 이루어지는 2000년대 후반의 모습이었다.
아무리 위기론이 주변부에서 들려온들, 올해 회장 임명식 전에만 터지지 않으면 된다는 계산을 한 한서호.
새로운 샴페인 병을 꺼내 뚜껑을 연 그는 빈 잔을 채워 넣었다. 마치 자신감과 확신을 따르듯이.
“후계 구도까지 탄탄하다는 것을 문중회가 인식하면, 차기 회장 자리는… 아버지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