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김원철(2)
앞에는 한강이, 뒤에는 테헤란로의 야경이 보이는 청담동의 고급 빌라.
유리창에 비친, 흰색 네글리제를 입은 한 여자의 모습.
마치 무언가에 질렸다는 듯한 표정의 그녀는, 한화기 재무 본부장의 막내딸 한서희였다.
“…….”
팔짱을 낀 채 오른손에 든 와인 잔을 조금씩 흔드는 한서희.
제멋대로 움직이는 붉은 액체는 마치 그녀의 복잡한 속사정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머릿속에 야망밖에 없는 첫째, 머릿속에 아무것도 없는 둘째, 그리고… 아차!”
새하얀 눈밭 같은 네글리제. 그 위에 흥건하게 적셔진 포도주.
낙인처럼 흐르는 붉은 물결이 그녀가 처한 위치를 재확인하기라도 하는 듯, 옷 사이사이를 깊게 물들였다.
“…이룰 수 없는 소망만이 가득한 나까지. 셋 다 답이 없기는 매한가지네?”
슬픈 얼굴을 한 한서희.
재벌가의 여식으로 태어나 편히 살 수 있는 인생이었음에도, 그녀는 이루고자 하는 것이 있었다.
금융.
월 스트리트와 시티 오브 런던의 늑대들과도 맞설 수 있는 최고의 금융 전문가가 되고 싶었다.
미국 와튼 스쿨에서 금융 공학 박사를 마치고 실무에서까지 성과를 낸 그녀.
그 때문에 유교적 가풍이 진한 탄약그룹의 한씨 가문임에도 간신히 경영 일선에 참여할 수 있었다.
물론, 딱 거기까지만.
“후우… 아버지가 회장이 된들, 문중회에서 나를 인정할 리도 없고.”
한서희가 몸담은 탄약 캐피탈.
그룹 내에서 그 회사의 위치가 바로 그녀의 한계였다.
겉으로는 금융 쪽 계열사임을 표방하고 있으나, 실상은 탄약 자동차의 할부·리스 업무만을 담당하는 데에 지나지 않는 회사.
참 찜찜한 자리였다. 마치 유리창에 비친 그녀의 젖어버린 모습처럼.
붉은 포도주는 네글리제 안쪽 속살까지도 찝찝하게 만들었다.
때마침 피곤을 느낀 한서희.
옷을 벗은 그녀는 욕실로 들어가 비누 거품으로 가득한 월풀 욕조에 몸을 담갔다.
“회장 자리. 그런 골치 아픈 자리는 바라지도 않지만, 적어도 금융 쪽만큼은 내가….”
탄약그룹 회장직 따위는 필요치 않다. 그저 금융, 영미권의 선진 금융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회사의 차세대 리더가 되고 싶은 한서희.
그러나 지금의 구도에서는 그저 백일몽에 불과했다.
-똑똑!
“아가씨, 지는 이만 들어가 보겠구먼유.”
이틀에 한 번씩 오는 관리인이 집 청소를 모두 마친 모양이었다.
불투명 유리 너머로 한서희가 손을 흔들며 대답했다.
“수고했어요, 아줌마.”
“아, 참. 그리고 아까 낮에 말씀하셨던 그거 말인데유….”
낮에 말한 것.
한서희 역시 그룹 본부 조간 회의록을 읽어 보았다.
놀라운 감정과 함께 든 불신감.
이제까지 봐온 한서준이라는 사람의 이미지는 무능한 서자 그 자체였기에, 그녀는 단번에 그 회의록에 적힌 내용을 믿기 어려웠다.
서류가 아닌, 직접 주위에서 보고 느낀 사람들의 크로스 체크가 필요한 상황.
탄약그룹 한씨 집안의 관리인들끼리 통하는 연락망, 그것을 이용할 타이밍이었다.
“말해봐요. 본가 쪽에서는 뭐라 하던가요?”
“실제로 사람이 좀 바뀌었다고 해야 허나? 여튼, 맹하던 양반이 하루아침에 총명해졌다고 하네유. 이사장님이 대하는 태도도 그렇구….”
회의록에 적힌 발언 내용, 그를 둘러싼 주변인들의 평판까지. 하나같이 동일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저 누군가의 꼭두각시가 아닌, 한서준 개인 역량이 꽃핀 것이라는 사실을.
“한서준… 분명 혈통도 능력도 전부 밑바닥이었는데, 어째서?”
관리인을 보낸 그녀가 열기에 붉게 상기된 얼굴로 월풀 욕조에서 일어났다.
가슴팍에 찐득하게 남아 있던 포도주 자국은 깨끗하게 씻긴 지 오래였다. 그녀가 느꼈던 그 찝찝함까지도.
“사람이 하루아침에 달라질 리는 없고, 설마… 발톱을 숨겼다는 거야? 이제까지?”
의심에서 확신으로, 확신에서 호기심으로, 호기심에서… 기대감으로.
욕실에서 나와 서재로 자리를 옮긴 한서희.
결제를 기다리는 수많은 메시지를 전부 접어둔 채, 그녀는 그룹 인사와 관련된 파일을 틀었다.
-[전략실장 한서준]
아직 공백에 가까운 세부 내역이 어떻게 채워질지 궁금해하며, 그녀는 홀로 중얼거렸다.
“독한 아이네, 우리 서준이.”
* * * *
“저 사람이 한서준 전략실장? 진짜 어려 보이는데…. 스물다섯 밖에 안 된다며? 히야, 깡도 좋다.”
“아무리 자기 할머니라지만, 그 서태후 바로 옆에서 대놓고 칼춤을 췄다던데. 임원들은 죄 바보 됐고.”
다 들린다.
뒷담화를 할 거면 좀 안 들리는 목소리로 작게 할 것이지, 1층 로비가 오페라 홀처럼 음향이 울리는 구조인지도 모르나 보다.
어쩌다 보니 앞담화를 듣게 된 나. 어제 일 이후, 회사에서는 나를 보는 직원들의 수군거림이 늘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한화기 재무 본부장도 물 먹었다는 소문이 있어. 그 KS 산업 알지? 사실은 그게 그 양반 비자금… 이크!”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중 갑자기 왜 지방방송이 끊겼나 했다.
뒤를 돌아보니 곧바로 보이는 것은 석상처럼 굳은 표정의 숙부였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동방예의지국의 일원으로서 반가운 아침 인사 정도는 기본 예의일 터.
“좋은 아침입니다, 숙부님.”
“…평판이 좋아 보이는군. 혼잡하니 임원용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지.”
밀폐된 상자. 사람이라고는 나와 숙부 둘밖에 없는 엘리베이터 안.
숨 막히는 적막감이 좁은 공간을 가득 메운 상황에서, 숙부가 입을 열었다.
“견제구, 예상치 못했다. 이제까지는 천둥소리에 놀란 척한 유비 흉내를 낸 것이었군.”
굳이 삼국지에 나오는 고사까지 인용하는 숙부.
이전까지의 내 모습과 어제 그룹 조간 회의에서의 간격이 상당했던 모양이었다.
서로가 고개는 앞으로 고정한 채, 엘리베이터의 금속 문에 비친 상대의 눈만 바라보는 상황.
나는 숙부에게 다시 질문으로 대답을 주었다.
“조조가 되고 싶으신가 봅니다? 끝내 조조는 살아서 황제 자리에 오르지 못했습니다만?”
“그 자리는 본래 조카를 위해 남겨둔 자리였지만, 조금 사정이 달라져서 말이지.”
이것… 봐라?
회귀 전, 나를 총알받이 회장으로 올린 사람이 숙부였다는 것은 알고 있었건만, 대놓고 이렇게 말할 줄이야.
10년. 그 억울한 감옥살이를 떠올리니, 순간적으로 치솟은 감정에 잠시 평정심을 잃었던 것 같다.
힘이 잔뜩 들어간 두 눈, 말린 채로 우드득 소리를 내는 주먹, 앙다문 입술까지.
찰나의 순간이었으나, 숙부는 내가 보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생각했던 것 이상이로군. 그것까지 알고 있었던 것인가.”
소복이 내린 서리처럼 당혹스러움이 얼굴에 서린 숙부. 주사위가 던져졌음을 직감한 듯한 표정.
나와 숙부, 두 사람은 돌아올 수 없는 경계선에서 서로를 마주 봐야 할 것이다.
-45층. 문이 열립니다.
때마침 전략실이 위치한 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나는 일부러 숙부의 옷깃을 바스락 소리가 날 정도로 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닫히기 직전의 엘리베이터 문 앞, 뒤돌아선 채 빤히 경계선 너머를 바라보던 내가 입을 열었다.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본부장님. 좋은 하루 되시길. 오늘만이라도.”
그르릉거리는 기계음을 내며 닫히는 문.
엘리베이터 중심에 선 경쟁자의 모습이 면에서 선으로 바뀌는 순간까지 나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에.
* * * *
웃어른과의 찐한 대화. 방금 해보니 별로 몸에 좋은 것 같지는 않다.
숙부 때문에 아침부터 온몸의 기운이란 기운은 다 빼놓아서 그런가, 급격히 모닝커피가 땡겼다.
“카페인… 카페인이 필요해.”
전략실 사무실로 출근하자마자 내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진한 에스프레소 커피부터 뽑는 것이었다.
-치이이익!
어지간히 피곤했나 보다. 머신에 캡슐을 넣고 기다리는 동안,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진짜 아침부터 죽겠네.”
“벌써 죽으면 안 되지. 나도 한잔 달라고 할 거였는데.”
머리가 반쯤 벗겨진 중년 아저씨.
회귀 전, 교도소에 면회차 왔던 그때에 비해서 아직 머리숱이 다 죽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큰 체구에 털털한 듯한 인상의 그는 바로….
“흐흐흐…. 뽑는 김에 나도 한잔 달라니까. 어디 전략실장이 타 주는 커피 좀 마셔 보자.”
“김원철 아저씨?”
“얼레? 이미 나 아는 모양이네. 에이, 재미없게시리….”
다소 주책맞다 싶을 정도로 요란하게 커피를 홀짝이는 김원철.
막상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보니,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아버지의 심복이었다는 사실이 영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말하는 거나 행동하는 거나, 아무리 봐도 어디 동네 낚시터의 한량 아저씨 느낌이다.
“어우, 쓰다. 써. 안 그래도 마귀할멈… 아니, 이사장님한테 아침부터 한소리 들어서 씁쓸한데 커피까지 쓰네.”
“뭐라 하시던가요. 저희 마귀할멈께서.”
여기 오기 전에 이미 할머니를 찾아뵙고 왔다는 김원철.
생각보다 의뭉스러운 양반이다. 털털함 속에 뼈가 있다.
내 눈매가 조금 가늘어지자, 커피잔을 내려놓고 능청을 떠는 그. 슬슬 본론을 꺼내려는 모양이다.
“응? 아이, 참. 그걸 또 들었어? 뭐, 다른 건 아니고….”
한량 낚시꾼의 입에 걸린 웃음기가 지워지지는 않았다.
변한 것은 오직 그의 눈빛뿐. 드넓은 사무실의 분위기가 바뀌는 데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고명대신 역할을 하라기에 그냥은 못 한다고 했지.”
“그냥…은?”
“그러니까,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새싹이 당장 회의록 문서상에서는 푸르른 녹색처럼 보였지만.”
탁자 위의 깍지 낀 손이 턱받침 역할을 하더니, 그의 얼굴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당장이라도 나라는 사람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싶은 것처럼.
“실제 싹이 푸를지 누럴지는 또 확인해봐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거든. 그러니 머릿속이 의심암귀로 가득 찼다며 화부터 내시더라.”
“싹이 푸를지 누럴지라….”
누군가에게 먼저 시험을 받는 것.
내가 그 시험에서 능력을 입증하던 그렇지 못하던, 관계의 주도권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니다.
특히나, 아무리 고명대신 역할일지언정 전략실이라는 조직은 내가 주도해야 하는 베이스캠프.
원래라면 김원철이 주도하는 이 상황에 끌려가서는 안 된다.
그러나….
‘원철이 아저씨… 엄마하고 너희 아빠 이어준 사람이거든. 분명 서준이 너도 도와줄 거야.’
문득 오늘 출근하기 전, 엄마가 내게 말했던 것이 머릿속에 맴돌기 시작했다.
엄마와 아버지를 이어준 사람, 나를 도와줄 가능성이 큰 사람.
그렇다면… 이번에 두는 첫수는 내 쪽에서 내어주어도 괜찮으리라.
생각을 마친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오른쪽 엄지로 스스로를 가리켰다.
“그럼 어디 한 번 확인해 보시죠. 저도 이래저래 들은 바 있으니, 아저씨께서 먼저 확인하셔도 좋습니다.”
“흐흐흐… 그러면 간단한 수수께끼 하나 던져볼까?”
수수께끼.
아무렇지 않게 장난치듯 툭 던진 말이었지만, 그 질문에는 너무나 많은 함의가 담겨 있었다.
탄약그룹의 회장 자리.
내가 그 자리에 어울리는 인물인지는 이미 파악했다는 듯한 말.
그러면 이제 그 자리에 어떻게 올라갈 것인가? 그것이 바로 김원철의 물음에 담긴 메시지였다.
“이 탄약그룹 말이지. 순환출자 고리에서 가장 약한 곳이 어디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