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김원철(3)
예쁘게 칠해진 네일아트, 책상 아래 떨리는 두 다리.
손톱을 입에 넣으려다가 말았다가,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가 말았다가를 반복하는 김성혜.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통 아들 생각뿐이었다.
“후우, 우리 서준이. 어떡하면 좋아…. 잘 하겠지?”
자기 아들이 서태후에 이어 회사 내의 임원들에게도 인정받았다는 소식은 익히 들은 그녀.
그러나 오늘 만날 사람은 조금 특별했다. 김원철, 아들의 후견인으로서 최상급의 능력을 지닌 자.
평소 혈통을 운운하던 그녀의 시어머니가 붙여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였다.
-딸그락!
긴장되는 마음에 타버린 속. 벌써 찬물만 다섯 컵째다.
빈 유리잔을 치우는 청주댁이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넌지시 말을 건넸다.
“작은 사모님, 불편하시믄 의사를 부를까유?”
“의사? 아줌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나 아픈 데 없는데.”
그래도 나름 미운 정에 고운 정까지 합해 온갖 정이 다 든 모양이었다. 자신을 생각해 주는 사람은 청주댁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김성혜.
그런 그녀의 순진한 기대에 응답하듯, 청주댁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자꾸 끙끙거리시는 게 혹시 변비가 심하신 거 같아서유. 것도 오래 쌓아두면 썩는다는디….”
“아줌마! 진짜 청주댁은 내 속 긁는 데 타고났어, 정말!”
분통을 터트리는 김성혜와는 달리, 마치 어디 산기슭 바위처럼 아무 감정 동요도 없는 청주댁.
“아니믄 말구유…. 왜 화를 내고 그러셔유. 이마에 주름 생기는디.”
“됐어요! 기대한 내가 바보지.”
앉은 자리에서 방방 뛰며 화를 내 봐야 아무 소용은 없다. 이미 함께한 지난 세월이 입증했으니까.
손으로 부채질해 얼굴에 올라온 열을 식힌 김성혜. 차라리 이렇게 감정을 발산하고 나니 한결 시원했다.
“알고서 그런 건지, 그냥 날 놀리려고 한 건지! 누가 상전인지 모르겠어, 정말.”
김성혜는 차분해진 감정으로 다시 사안을 되짚어보았다.
김원철, 분명 얼마 전 하늘로 떠난 남편의 심복인 사람.
어린 시절부터 늘 남편의 친구였던 그는, 다소 뺀질거리는 한량 기질이 있었으나 능력 하나만큼은 출중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탄약그룹의 뼈대를 다시 세웠다는 평을 받는 김원철이었으니 말이다.
“만약 김원철, 그 사람이 우리 서준이를 돕는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마도….”
방문을 열고 복도 쪽으로 목을 빼꼼 내밀은 김성혜. 2층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녀가 방문을 잠갔다.
그리고 침대 맞은편. 환하게 웃는 남편과 임신한 채 배가 부른 자신의 모습이 담긴 사진 액자 쪽으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삑삑삑삑
액자 뒤편 벽지를 조심스럽게 밀자 나타나는 금고. 그녀는 비밀번호를 눌러 안에 있는 내용물을 꺼내었다.
“어디 보자….”
아파트 등기부 등본 몇 통, 금융거래용 인증서가 든 USB.
아파트는 10억 원이 조금 넘는 것이기에 크게 개의치 않은 수준이었지만 USB는 달랐다.
서둘러 노트북을 켠 김성혜. USB를 꽂고 증권사 HTS에서 확인한 그녀의 계좌 잔액은 제법 규모가 있었다.
-[탄약 증권] 김성혜 님의 현재 주식평가금액은 118억 5,650만 원입니다.
“확실히 많이 불어나긴 했어. 절대 충분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힘이 될 수 있겠지?”
평창동 저택에 들어오고 나서, 시어머니로부터 적선하듯 받은 5억여 원.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그 돈은 이만큼 불어났다.
그녀 나름의 투자 감각에 최근 만났던 유능한 PB(프라이빗 뱅커)의 덕까지 본 결과였다.
“서준이가 고 할망구한테 이쁨을 받아서 애 아빠 지분을 받아간들, 혹시나 부족할지도 몰라.”
김성혜는 탄약그룹의 복잡한 순환출자 구조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경영권을 안전하게 확보하기 위해서 얼마의 돈이, 어떤 계열사에 들어가야 할지도.
그녀는 그저 100억 원이 조금 넘는 이 돈이, 아들에게 도움이 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엄마로서.
* * * *
빛 좋은 개살구.
시가총액 수백조 원의 거대 기업 꼭대기에 앉은 재벌 가문은 생각보다 개털이다.
그룹 전체로 따지면 한 줌도 안 되는 지분밖에 없는 그들.
그런 재벌 가문이 경영권을 거머쥘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이 있다.
서로 지분을 가진 계열사끼리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순환출자 방식.
김원철이 내게 물은 것은 재벌 가문이 힘을 쥐는 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이 탄약그룹 말이지. 순환출자 고리에서 가장 약한 곳이 어디일까?”
“순환출자라…. 시작부터 질문이 직설적이신데요?”
탄약그룹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언급한 김원철.
그는 내 반문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거리고는 하던 말을 마저 이어나갔다.
“탄약그룹이라는 성채 말이지. 가장 취약한 부분이 어딘지 알고는 있어야 공격이든 수비든 하지 않겠어?”
아직 애송이를 보는 듯한 김원철의 눈빛. 마치 시험에 참석한 면접관처럼 어디 이 젊은 친구가 무슨 대답을 할지 들어는 보겠다는 모습이다.
이거… 조금 자존심 상하는 상황인데?
“거기 옆에 검은색 펜 좀 주시지요. 이면지도 같이요.”
“응? 이거?”
탄약그룹 순환출자 구조? 내가 모를 수가 없다.
회귀 전 삶에서 그렇게 호되게 당해놓고도 왜 졌는지 복기하지 않는다면, 그건 애송이 수준이 아니라 재활용도 안 되는 호구라는 뜻이니까.
김원철로부터 펜과 종이를 건네받은 나는 빠른 속도로 무언가를 써 내려갔다.
-스스슥
흰 종이 위에 동그라미 수십 개가 그려지고, 그 안에 이름이 붙여졌다.
탄약 중공업에서 시작해 증권, 전자, 상사까지. 단 하나의 오류도 없이 채워진 계열사 이름들.
한 장의 종이 위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탄약그룹이라는 밤하늘의 별들.
나는 이제 이 별들을 잇는다.
“순환출자의 약한 고리…. 아마 그냥 말로 하면 복잡해서 못 알아들으실 겁니다.”
“편한 대로 해 보슈.”
둥근 별 하나에 펜촉이 닿았다.
거친 질감을 거스르고 나아가는 검은색 선.
선은 다른 별에 닿았다가, 다시 되돌아왔다가, 또 다른 곳으로 항해를 떠난다.
그리고 흔적처럼 남겨진, 선 위에 새겨진 숫자. 각 계열사가 가지고 있는 서로의 지분율은 하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순환출자라는 별자리에 얽힌, 탄약그룹의 이야기가.
“숲속의 썩은 나무는 전체 그림이 그려져야 도드라집니다. 녹음이 푸르른 산수화를 그려보았는데, 이걸로 답이 될는지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려진 관계도. 소수점 단위까지 명확하게 표시된 그 관계에서 나는 일부러 약한 고리를 특정하지 않았다.
나를 시험하려 했던 김원철에게 주고 싶은 것은 정답뿐만이 아니었으니까.
“허어, 이건 도대체….”
“이 정도 자료면 물으신 데 대한 대답으로는 충분할 것 같습니다.”
나는 그에게 정답을 주되, 그것을 직접 명시하지는 않았다.
정말 김원철 당신이 내 고명대신이 될 능력이 있다면… 내가 준 답에서 필요한 부분을 찾아낼 수 있을 터.
입이 떡 벌어진 채로 말을 잇지 못하는 김원철. 예상했던 것 그 이상이었던 모양이었다.
얼마 있지도 않은 머리숱을 쓸어넘긴 그가, 내게 진지한 모습으로 물음을 던졌다.
“김앤정 로펌 변호사들 수십 명이 달라붙어 만든 것인데…. 이걸 어떻게?”
“제 것이니까요. 탄약그룹은.”
헛웃음을 짓는 김원철. 이 역시 예상 밖의 대답이었나 보다.
이 자리에서 법률이나 회계 지식을 굳이 나열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저 그림을 그린 이상, 남은 것이라고는 왕관을 쓰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는 것뿐.
“그런데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 지금 나한테 백 점짜리 답을 줘놓고 문제가 있다고?”
* * * *
이번에는 내 차례다.
내 앞에 앉은 그가 쓸만한 패인지. 아니, 함께 할 수 있는 운명공동체가 될 수 있을지를 가늠해 볼 시간이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담담한 말투로 그에게 대답했다.
“서태후로부터 탄약그룹의 옥새를 건네받은들, 문중회가 다른 마음을 먹으면 곤란해지거든요.”
“음….”
이사회를 쥐고 있는 할머니, 주주총회를 쥐고 있는 한씨 가문 문중회.
특별한 일이 없다면 이사회에서 결정이 난 사항을 주주총회까지 끌고 가지는 않는다. 일반적으로는.
“회장 취임이 일반적인 일은 아니지. 기껏 산을 올랐는데, 누가 등을 밀어버리면 말짱 꽝 된다는 거 아니냐.”
“아시다시피 저는 서자니까요. 정통성이 부족한 제가 산에 깃발을 세우는 걸 안 좋게 볼 사람은 많을 겁니다.”
서자.
내가 가진 가장 큰 아킬레스건.
아직 내가 서자 출신이라는 점은 문중회 내에서도 일부밖에 모른다.
후계 경쟁에서 밀리게 된 한화기가 문중회에서 이 카드를 꺼내 들 것이 분명한 상황.
회귀 이후, 아직 나는 이 카드에 대항할 수를 찾지 못했다.
김원철… 과연 당신은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아버지가 심복으로 둔, 어머니가 신뢰하는, 그리고 할머니가 후견인으로 붙인 이 남자는 내게 무슨 답을 줄 것일까?
“방법이 있지.”
긴장되는 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고민하는 모습이라고는 일절 보이지 않던 김원철. 그가 내게 입을 열었다.
“힘으로 찍어 누르는 거야. 자본주의 세상에서 힘은 곧 돈이고, 돈은 곧 지분을 뜻하니까.”
다소 실망스러운 대답.
물론 돈으로 지분을 확보해 문중회를 찍어 누르는 것이야 정공법이긴 하다.
문제는 그 돈이다.
내가 따로 빼 운용할 수 있는 자금은 100억 원도 채 되지 않는 상황.
경영권 획득을 위해 필요한 액수의 백 분의 1도 되지 않는, 미미한 금액이다.
“푸하!”
내 어두운 표정을 보고서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작게 웃음을 터트린 김원철이 하던 말을 연이어나갔다.
“그 뭐냐, 그때 그 회의록. 인상 깊게 읽어 보았다. 조만간 금융위기가 온다고 했다지?”
“올해 안에 터질 것은 필연이라고 봅니다.”
“나도 얼추 예상은 하고 있었지. 미국 은행가 놈들, 어디서 단체로 쥐약이라도 주워 먹은 건지 원. 그래서 말인데.”
다시 진지한 얼굴로 돌아온 김원철. 그는 책상 위에 놓인 사무용품 통에서 볼펜 두 자루를 꺼내어, 그중 하나를 내게 건넸다.
“우리 전략실장님은 삼국지 좋아하나?”
“원래 좋아했는데,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싫어졌습니다.”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숙부와 있었던 스토리를 들려주자 웃음을 참지 못하는 김원철.
“흐흐흐… 그러면 유비, 조조 놀이는 하지 말고. 주유와 제갈량 흉내나 내 보자고. 제갈량 역할은 내가 한다?”
주유와 제갈량… 분명 적벽대전에 있었던 것을 비유한 것이리라.
서로가 생각한 계책을 손바닥에 쓰고 동시에 보여주던.
“타이밍. 세계 경제의 폭탄이 터질 것이라 예상되는 때를 한번 맞춰 보자고.”
“그거 재미있겠네요. 그럼 어디 촉나라 승상 되시는 분 실력을 좀 보겠습니다.”
-딸각!
볼펜 뚜껑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서걱거리는 소리만이 사무실을 가득 채웠다.
꽉 쥔 왼손. 교환된 눈빛. 굳이 카운트다운을 셀 필요도 없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펴진 손에는 똑같은 숫자만이 적혀 있었으니까.
* * * *
“히야… 이거 참, 어떻게 보면 아빠보다 아들이 난 것 같기도 하고.”
전혀 다른 두 손.
비록 한쪽 손은 뽀얗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희고, 다른 손은 주름이 잔뜩 잡혀 있었지만, 두 손바닥에 적힌 숫자는 똑같았다.
마치 거울을 마주한 것처럼.
-9월
-9월
갑자기 자신의 허벅다리를 탁하고 치는 김원철. 그리고 거기에 화답의 웃음을 보낸 나.
더 이상의 구체적인 설명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2조 원. 순환출자 구조에서 문중회의 영향력을 누를 수 있는 최소 금액이다. 9월에 있을 파도를 잘 탄다면….”
“10배. 안전장치를 고려했을 때, 그 이상의 수익률은 어렵습니다. 그러니 필요한 종잣돈은 2,000억 원이죠.”
총알을 마련하는 데 필요한 돈 계산은 끝났다.
문제는 그 돈을 어디서 끌어오느냐는 것뿐.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를 반복하던 김원철이 셈을 모두 마친 모양인지 내게 계산 결과를 말했다.
“2,000억. 2,000억… 나머지는 모르겠고, 일단 절반까지는 충당할 수 있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