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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의 핵몽둥이-11화 (11/300)

11화스위스 은행(1)

앞에는 환락에 취한 젊음이, 뒤에는 황금으로 쌓아 올린 대저택이 줄지어 서 있는 곳. 이태원.

유흥가의 음악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높이 올라간 그곳, 한화기 탄약그룹 재무 본부장의 자택이 있다.

그리고 높다란 담장 아래. 검은색 승용차 두 대가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

“아, 형은 하필이면 꼭 이런 날 마시자고 해서! 이게 뭔 꼴이냐고, 정말!”

차에서 내린 차남 한서후.

술을 어찌나 마신 건지 딸기코가 된 그가, 자신의 형을 향해 싫은 소리를 내뱉었다.

“에이, 씨… 형 때문에 아버지 또 뭐라 하겠네!”

이미 차 안에서 그런 궁시렁거리는 소리를 질리게 들은 장남 한서호.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보아, 이미 빈정이 상할 대로 상한 모양이었다.

“너는 이걸 내 탓을 하냐? 아버지가 이 야밤에 갑자기 호출하실 줄 누가 알겠는데?”

“개소리는… 아까는 결과로 입증하자며 오만 잔소리는 다 까놓고, 이제 와서 딴소리셔?”

주머니에서 넥타이를 꺼내 옷매무새를 정돈하는 한서호.

취할 대로 취해버린 동생이 내뱉는 말에 대응할 가치가 없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술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그는 초콜릿 한 알을 입에 넣고는 대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동생을 향한 날 선 대답과 함께.

“술주정 작작 부리고, 정신 똑바로 차려. 들어가서 같잖은 소리 지껄일 거면, 차라리 입이나 닥치고 있고.”

* * * *

싸늘한 냉기. 불콰한 술 냄새. 한화기의 서재에는 전혀 다른 두 가지의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아들들의 꼬락서니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인지, 그저 눈동자만 힐끗 움직인 한화기.

그는 아들들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두 사람 다 술이라도 마신 건가.”

“아, 예! 간만에 3남매가 우애도 다질 겸 해서 아까 저녁때 모였었습니다! 하하하.”

마치 자랑스럽다는 듯이 대답하는 둘째 한서후. 그 모습을 본 한서호가 머리가 아픈 듯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저 머저리는 하필 골라도 꼭 저런 영양가 없는 단어를 고르나….’

자신의 아버지이지만 한화기는 차갑고 잔인한 성정임을 알고 있기에, 지금처럼 기분이 언짢아 보일 때는 기분을 맞춰야 한다.

머리를 굴린 한서호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선택은 정면 돌파였다.

“본부장님께서. 아니, 아버지께서 마땅히 가지셔야 할 것. 감히 그걸 탐하려는 서자 놈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심한 쓰레기 둘을 보는 듯한 아버지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고개를 조금 돌려 시선을 그의 장남에게로 향한 한화기. 그는 다음 대답을 기다린다는 듯, 턱 끝을 조금 추켜올렸다.

달라진 분위기를 인지한 한서호. 아무래도 정답을 맞춘 모양이었다.

“그리고… 감히 차기 탄약그룹의 주인께 발톱을 세운 그 잡종 놈을 어떻게 잡을지를 구상했습니다.”

“역시 맏이는 다른가 보군. 그래도 생각이 있는 녀석이 하나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평소 냉혈한에 가까운 한화기의 입에서 칭찬이 나왔다. 그것도 오직 맏이 혼자만을 향해서.

안도의 한숨을 쉬는 한서호.

장남으로 35년. 그의 아버지 밑에서 먹은 눈칫밥이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휴, 잘 넘어갔다. 이대로만 계속 가면….’

물론 공평한 세상답게, 버는 사람이 있으면 까먹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가장 중요한 순간, 아군 진영에는 늘 트롤러가 있기 마련이니까.

“끅, 저기, 근데 아버지. 왜 서희 걔는 여기 안 부르신 거죠?”

아직 취기가 가시지 않은 모양인지 딸꾹질까지 섞인 질문을 던지는 둘째 한서후.

기껏 맞춰놓은 아버지의 비위를 다 망쳐 놓게 생겼다.

‘하… 일생일대에 도움이 안 되는 멍청이가! 머리에 든 게 없으면 분위기 파악이나 잘 하지!’

동생의 한심함에 분통이 터지지만 차마 내색하지 못하는 한서호.

다행히도 그의 아버지가 화를 내는 일은 없었다.

“…서후는 형에게 많이 배워야겠구나.”

“제가 따로 신경을 못 쓴 탓입니다. 내친김에 제가 서후에게 바로 알려주도록 하겠습니다.”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하는 한서호. 이번 기회에 차라리 못난 동생과 똘똘한 형의 구도를 만든다면, 그림이 좀 더 나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그는 평소 절대 보여준 적 없는 부드러운 모습으로 동생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문중회 어르신들은 탄약그룹이 한씨 가문만의 재산이라 생각하신다. 주주총회는 문중회의 영향력이 크고. 이제 알겠니?”

“모르겠는데? 형 설명이 너무 개떡 같아서 도저히 찰떡같이는 못 알아듣겠어.”

마침 술도 들어갔겠다, 한서후는 형이 가식을 떠는 모습이 꼴 보기 싫은 모양이었다.

에붸붸 소리까지 내며 형의 심기를 마구 자극하던 그가 하던 말을 마저 이어나갔다.

“그리고 서희도 우리 한씨 가문이잖아? 뭐가 문젠데?”

“서희가 결혼하고 자식을 낳으면, 그 애는 한씨가 아니니까 그렇지. 출가외인의 한계인 거다.”

“아아… 그랬지. 하여간 늙다리들 생각하는 꼬라지 하고는. 청학동 수준에서 못 벗어났다니까.”

잔뜩 흐트러진 데다가, 판단력까지 흐려진 동생의 모습에 속으로 코웃음을 치는 한서호.

‘띨띨한 놈… 그래. 너는 그 위치가 어울린다. 저놈이 말했던 서브프라임 그런 것도 신경 쓸 필요도 없겠고.’

그가 생각했을 때, 동생이 말한 미국발 금융위기 어쩌고 하는 이야기도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사실 그 이야기의 근원을 되짚어 올라가면, 결국 그가 그토록 하찮게 여기는 서자의 머리통에서 나온 것에 불과했으니까.

“서호가 속이 깊구나. 시야도 넓고.”

“과찬이십니다. 아버지.”

“네 말대로 문중회의 영향력은 막대하다. 그렇기에 앞으로 서희는 그룹 경영에서 점점 뒤로 물릴 것이고.”

한화기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서호의 어깨를 오른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그가 보일 수 있는 믿음의 표현 중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그러니 장남이 잘 해야겠지. 차남도 분발하고.”

“언제든지 아버지의 힘이 되어드릴 준비가 되어 있으니, 불러만 주십시오.”

간만에 본 장남의 듬직한 모습에 제법 흐뭇한 모양이었나 보다.

내친김에 신뢰의 표시를 조금 더 주어야겠다고 생각한 한화기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실 그룹 임원들에게. 아니, 머슴 놈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다. 선대 회장 대의 일이지.”

“어떤 일인지….”

“꼬리표 없는 돈이 해외 어딘가에 잠들어있다. 지난 10여 년간 회계 장부에 돈이 샌 흔적이 있더군.”

선대 회장의 꼬리표 없는 비자금.

필시 국세청과 검찰의 손이 닿지 않는 해외에 차명 계좌로 작업한 것이 확실했다.

그것도… 결정적인 순간 날카로운 비수로 쓸 수 있을 정도의 규모가.

정신이 번쩍 든 한서호가 조심스레 손을 들어 질문을 던졌다.

“혹시 그 규모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확실하지는 않지만, 자금을 세탁하고 통상 조세피난처로 여러 바퀴 돌리는 비용까지 감안한다면.”

목울대가 꿀렁거리는 소리마저도 침묵에 묻힐 듯한 분위기.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친 한화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대략… 미화 1억 달러, 원화로 1,000억 원 정도.”

“1,000억 원!”

1,000억 원.

그것도 100% 현금으로 이루어진.

이 정도 금액의 비자금이면, 위기 시 우호지분 매입을 통해 백기사 역할을 요구할 수 있다.

만약 경영권 방어가 탄탄한 상황이라면, 어지간한 계열사 하나를 더 만들 수 있는 자본금이 될 수도 있고.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최소한 마중물 역할은 할 성싶더구나. 아주 결정적인 순간에 말이지.”

* * * *

은근히. 아니, 어쩌면 대놓고 돈을 밝히는 청주댁도 이 평창동 저택에 있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적어도 요리 실력 하나만큼은 여느 한식당의 쉐프에게도 뒤처지지 않는다.

늦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서 배를 땅땅 뚜드리고 있는데, 후식으로 수정과를 들고 온 청주댁이 내게 말했다.

“도련님. 식사 다 하셨으면 작은 사모님이 잠깐 방으로 오라고 하시는 데유.”

“무슨 일이죠?”

“지는 몰러유. 식순이가 아는 게 있어야 말이쥬.”

안 그래도 집에 들어선 때부터 엄마가 무슨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이긴 했다.

그저 내 머릿속이 복잡해 보여서 집에 오고 나서 바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을 뿐이다.

“후우… 김원철 그 양반은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인 거람.”

김원철.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미간에 주름이 잡히게 만든 사람.

오늘 오전.

지분 싸움에서 이기려면 필요한 돈이 2,000억 원이라는 내 말에,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계산을 끝마쳤다.

‘2,000억. 2,000억… 나머지는 모르겠고, 일단 절반까지는 충당할 수 있겠네.’

‘1,000억 원이나 되는 돈을 어떻게 조달하려고 그러십니까?’

솔직히 그에게 큰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1,000억 원을 논하면서 하는 말이나 행동에 영 진지한 자세가 없어서였다.

행여나 누가 듣는 사람이 있는지 사무실 문을 빼꼼히 열었다가 닫은 김원철의 모습은 코미디언에 가까웠으니까.

그러나 그 코미디언이 이면지 귀퉁이에 흘려 쓴 내용만큼은, 결코 함부로 여길 수 없었다.

-양택수 탄약그룹 부회장

-한율산 한씨 가문 전 문중회 간사

‘스위스 은행. 양택수 부회장은 ID를, 한율산 영감탱이는 비밀번호를 가지고 있지. 둘 다 네 아버지의 사람이었고.’

‘스위스 은행이라면… 해외 비자금? 설마 아버지가 따로 숨겨놓은 겁니까?’

양택수, 한율산, 그리고 김원철.

세 사람에게 해외 비자금에 대한 권한을 분산해 두었던 아버지.

운명의 장난이라도 되는 것이었을까?

내 앞의 김원철은 ID와 비밀번호를 가진 사람의 인적사항을 담당한, 일종의 키맨이었다.

‘경영권 방어용으로 조성해 둔 게 있어. 환율 계산하면, 한국 돈으로 그러니까… 얼추 1,000억 원쯤 되거든.’

-똑똑똑!

그렇게 오늘 오전에 있던 일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2층 끝 엄마의 방 앞에 와 있었다.

“우리 서준이 밥 다 먹었어? 들어와, 들어와. 엄마가 할 얘기가 있어.”

“무슨 일이에요, 엄마?”

“쉬잇!”

입술에 오른손 검지를 올리고 아무 소리도 내지 말라는 엄마. 꼭 무슨 스파이 영화 놀이 같아서인지 웃음이 나왔다.

“아이, 참. 무슨 일이길래 오늘 우리 엄마가 이러실까.”

문이 닫히고 나서야 비로소 내 발언권을 허용해준 엄마. 그나마도 음향 크기는 들릴 듯 말 듯 한 수준.

잠시 노트북 타자를 두드리던 엄마는 화면을 내 쪽으로 보여주었다.

“이제 아들 거야.”

“엄…마? 이게 도대체 무슨….”

순수 평가액으로 100억이 훌쩍 넘는 주식 보유액.

더 놀라운 것은 세부 내역이었다. 20년간 단 한 번도 바깥으로 빼낸 적 없이 묵혀두기만 한 금융자산.

마치 지금 이때를 위해 쓰라는 듯, 나를 기다려 주었던 모습이 감동으로 다가왔다.

차마 무어라 말을 잇지 못하는 나. 엄마는 그런 내 뺨을 가볍게 꼬집으며 말했다.

“원래는 이 집에서 쫓겨날까 봐 비상금으로 묵혀두려고 했는데, 그럴 걱정은 안 해도 될 거 같아.”

“엄마….”

“이렇게나 잘난 아들이 든든하게 있는데, 쫓겨날 리가 없거든. 으이구 이뻐라 우리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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