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장님의 핵몽둥이-12화 (12/300)

12화스위스 은행(2)

시야가 살짝 뿌연 것이,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엄마가 그 무서운 할머니에게 처음 종잣돈을 받기까지, 그리고 이 돈을 꼭 쥐고 불리기까지의 그 세월 때문에.

그리고… 회귀 전, 교도소에 갇힌 나를 이 돈으로 옥바라지했다는 생각에 더욱더.

“엄마… 이거 내가 받을 수가 없는 돈인 것 같은데.”

엄마는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첩이, 그것도 사생아까지 딸린 여자가 이 탄약그룹 한씨 가문에서 얼마나 무시를 당했던가.

모멸적인 시선, 그리고 매년 조금씩 불어나는 돈. 그걸 가지고 어디론가 훌쩍 떠날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엄마는 그러지 않았다.

“얘는, 그런 소리 말어.”

한 발자국 다가와 나를 꼭 안아주는 엄마.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던 내 표정이 그제야 감정에 솔직해졌다.

“오늘 이때를 위해서 준비한 건데. 엄마는 서준이 네가 어떻게 쓰던지 상관 안 할 거야.”

“정말로… 감사해요, 엄마.”

그렇게 한바탕 찍은 모자간의 감동 씬.

이래저래 서로 감정을 추스르고 나니, 그제야 비로소 투자액의 세부 내역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주식잔고 비중] 탄약 중공업 11.5%, 탄약 건설 14%, 탄약 증권 9%….

엄마의 주식 포트폴리오에는 주로 탄약그룹 내의 계열사들이 담겨 있었다.

“엄마, 이거 탄약그룹 주식들이 대부분이네?”

“그냥 제일 익숙한 것들 담은 거지. 엄마 PB(프라이빗 뱅커)로 있던 사람이 추천해주기도 한 거고.”

탄약그룹 계열사들.

비록 그 끝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사실 지금까지의 경기 순환으로 봐서는 최고의 선택이긴 하다.

2000년대 중반의 경기호황 붐을 타고 주가가 천정부지로 뛰어올랐으니까.

빨간색 화살표로 나타난 투자 수익들. 엄마는 결과로 능력을 입증한 그 PB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 PB가 일단은 이대로 가지고 있고 올해 안에 정리하라고 했거든. 마침 타이밍도 괜찮지 않니?”

“올해 안에…?”

이거 봐라?

들어가야 할 시기뿐만 아니라 빠져나갈 시기까지. 제법 정확하게 타이밍을 짚어냈다.

그 PB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이 정도면 투자 감각은 상당히 탁월한 편.

순간적으로 뇌리에 꽂힌 감각. 그 사람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아야 한다.

나는 살짝 짜릿한 그 느낌을 그대로 가져간 채로, 엄마에게 물음을 던졌다.

“엄마, 혹시 그 PB… 누군지 알 수 있을까?”

“어머! 내가 그것도 같이 얘기한다는 걸 까먹었지 뭐야. 그러니까, 그 아이 이름이….”

갑자기 기억이 안 나는 건지, 책상 서랍에서 명함 수첩을 꺼내는 엄마.

그런데 ‘그 아이’라니?

시장을 보는 눈이 탁월하기에 나이가 제법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린 PB였던 건가?

“찾았다! 맨날 까먹어서 어떻게 해. 호호호.”

보물섬을 찾은 후크선장처럼 머리 위로 명함을 치켜든 엄마.

그리고 내 손에 들어온 그 자그마한 종잇조각.

거기에는 어디선가 한 번쯤은 본 것 같은 이름과 직책이 적혀 있었다.

-[탄약 캐피탈 종합금융팀] 유세나 과장

“유세나… 과장?”

“원래 탄약 증권에서 엄마 담당하던 친구였는데, 올해 이리로 이직했다네? 얼마나 아쉬웠는지 몰라.”

기억이 났다.

유세나 과장. 이 여자 분명히… 할머니가 내게 건네주었던 그 인사 파일에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찾아온 위화감.

엄마가 덧붙이듯 이야기한 그 말에 묘한 촉이 왔다.

반드시 잡아야 한다는 촉이.

“유세나 과장이라… 100억 원대까지는 잘 굴려봤으니, 나중에는 1,000억 원대도 잘 할 수 있겠지?”

* * * *

탄약그룹 한씨 집안.

워낙 유교적 전통이 강한 가문이기에, 최소한 직계만큼은 선산에 모시게 된다.

늦여름에서 가을의 입구로 꺾이는 계절. 회백색의 머리를 한 노인장이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무덤 앞에 서 있었다.

망연자실한 듯한 표정의 그 노인은 탄약그룹의 양택수 부회장이었다.

“허어, 회장님, 이 늙은이더러 뭘 어찌하라고 이리 황망하게 가셨는지요….”

유리잔에 가득 담긴 씁쓸한 눈물을 무덤 위에 흩뿌리는 양택수 부회장.

내리는 비와 섞여 풀밭 위에 흐르는 소주가 유독 독한 모양이었다.

구미 화약공장 폭발 보상 건부터 차기 회장 후계 구도까지. 앙상한 노인의 어깨 위에 올라간 짐은 당장이라도 그를 무너트릴 것만 같았다.

특히, 이곳에 오기 전 구미에 들러 현장을 보고 온 양택수 부회장.

그 처참한 광경은 그에게 사후 처리를 어찌해야 할지 더욱 막막하게 만들었다.

“부회장님, 이만 움직이심이 어떠신지요. 비 때문에 몸이 상하십니다.”

“…그러지. 이만 가세나.”

차가워진 몸.

마음 같아서는 자신 역시 차가워진 몸 그대로 먼저 떠난 회장 곁으로 가고만 싶었다.

“이것만 아니었어도….”

자켓 안주머니에 담긴 수첩을 꺼내 손에 쥔 양택수 부회장.

노장이 편히 눈을 감지 못하는 이유. 그것은 수첩에 적힌 선대 회장의 흔적 때문이었다.

손때묻은 가죽 커버 너머 첫 페이지. 거기에 쓰여 있는 열두 자리 영문과 숫자의 조합.

비자금 1,000억 원이 담긴, 스위스 은행의 ID였다.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차라리 구미 공장 건 보상금으로 쓸 수 있기라도 했으면 좋았건만.”

이내 고개를 가로젓는 양택수 부회장.

보상금의 규모가 이미 3조 8천억 원에 이른 만큼, 이것만으로는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굳이 이 비자금이 쓰인다면, 쓰여야만 한다면.

경영권. 즉, 왕좌의 전쟁을 위한 군자금으로의 용도가 어울릴 터였다.

“음?”

어느새 자동차 유리창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멈추고 햇빛이 구름 사이로 얼굴을 드러냈다.

언제 그랬냐는 듯, 환히 비추어진 어두웠던 앞길. 양택수 부회장에게 필요한 것은 이 햇빛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그 순간,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핸드폰에 불빛이 들어왔다.

햇살처럼 환한 빛이.

-[김원철]

“…오래 살고 볼 일이군. 자네 같은 한량이 내게 전화도 다 하고.”

“에이,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섭섭해서 울지도 모릅니다.”

“쓸데없는 소리는…. 다시 돌아왔다고는 들었다. 왔으면 바로 얼굴이나 좀 비추지 않고?”

선대 회장을 뵈러 갔다가 오는 길이라 그런지, 조금은 서운한 감정이 올라온 양택수 부회장.

그런 그에게 김원철은 서운함 따위는 하늘로 날아가 버릴 만큼, 생각지도 못한 대답을 건넸다.

가죽 수첩 속, 고이 간직한 페이지를 들추어 보기라도 한 듯이.

“준비가 필요해서요. 스위스 은행 계좌의 상속인을 데려올 준비가.”

“자네가 그걸 어찌!”

화들짝 놀라 고함치듯 소리를 내지른 양택수 부회장.

평소 온화한 성품의 그가 이런 행동을 한 것이 의아한 모양인지, 운전기사가 룸미러로 뒤쪽을 흘깃 쳐다볼 정도였다.

“크흠… 덕선이 자네는 신경 쓰지 말고 운전만 하게.”

다시금 목소리를 작게 줄인 양택수 부회장이 김원철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이보게, 김원철이. 자네도 알고 있던 겐가? 회장님이 남기신 그것에 대해서?”

“저도 키맨 중 하나입니다. 제가 위임받은 것은 ID와 비밀번호를 누가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목울대 너머로 꿀꺽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

고작 김원철이 잠시 뜸을 들인 것에 불과한데, 양택수 부회장은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흐흐… 성질도 급하셔라. 그리고 그 계좌를 누구에게 상속할 것인지까지 말이죠.”

“으음….”

때마침 눈앞에 보이는 고속도로 휴게소.

양택수 부회장은 운전 기사에게 손짓으로 잠시 들렀다 갈 것을 지시했다.

* * * *

“덕선이 자네는 잠시 나가 있게. 부를 때까지 쉬었다가 오면 돼.”

“예, 부회장님.”

고요해진 차 안.

자신 혼자만이 남자 그제야 양택수 부회장은 편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내 솔직히 말함세. 자네도 키맨이라는 것은 부정하지 않겠네. 일단 스위스 은행 건에 대해 알고 있으니 말이지.”

시끌벅적한 바깥 소음과 동떨어져서일까?

양택수 부회장은 조금 평정심을 되찾은 듯했다.

어느새 날아가 버린 울적한 감정.

이제 그는 다시 수십 년간 전장에 섰던 노익장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비밀번호를 가진 사람이 누구인지도 묻지 않겠네. 보안에 관한 것이니 말이야.”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회장님.”

“그러나.”

김원철을, 그리고 그에게 상속자 지명권을 맡긴 선대 회장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시기.

구미 공장 폭발사고와 경영권 분쟁은 그룹을 혼란에 빠트릴 터.

그저 지금만큼은, 후계자가 왕관의 무게를 견뎌야 할 사람임이 확실해야 하는 상황이다.

단호한 목소리의 양택수 부회장.

어느 때보다 더욱 냉정한 모습으로, 그는 김원철에게 하나하나 따져가듯 말을 계속해나갔다.

“상속자와 관련한 결정은 받아들일 수 없어. 이건 숫제 자네 독단적으로 결정한 것이잖은가?”

“한서준 전략실장이 성에 차지 않으십니까?”

“검증이 안 되었다는 걸세. 차기 회장 재목이 확실하면 모를까. 지금은… 순 풋내기 아니던가?”

노익장은 불안했다.

1,000억 원. 자신이 생각하기에 당장 이 자금이 쓰일 곳은 단 하나, 경영권 확보 수단뿐이었으니까.

자신이 스위스 은행의 ID를 상속자에게 넘긴다는 것.

그 의미는 곧 차기 회장에 대한 지지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나이 스물다섯의, 능력도 검증되지 않은 차기 회장.

“아직은 부족한 아이일세. 다만… 만약에, 만약에 말일세.”

말끝을 흐리는 양택수 부회장.

불현듯 떠오른, 며칠 전 그룹 조간 회의에서의 그 모습.

선대 회장의 옛 모습과 겹쳐서일까?

혈기 넘치는 핏덩이의 객기라고 하기에는 딱 한 번만큼은 믿어 보고 싶었다.

그저 헛된 희망일지언정, 혹시 모를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 친구가 탄약그룹의 미래를 이끌어갈 자격이 있다면. 가령, 이번 구미 공장 폭발사고 건을 해결한다면.”

분명 그 회의에서 핏덩이는 이렇게 말했었다.

‘모래밭 위에 세워진 탄약그룹이라는 성채, 지반을 어떻게 다질 것인지 전략실이 초안을 잡겠습니다. 예산과 인력을 주십시오.’

초안, 탄약그룹이 나아갈 방향이 적힌 지도.

자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음을 직감한 노인은 그 초안을 봐야만 했다.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고 앞으로의 미래를 그려나갈, 시간이 많이 남은 자의 맑고 투명한 수채화를.

“그리하면 내 믿고 맡길 수 있을 걸세. 여전히 불안하지만… 회장 자리는 비울 수 없으니 말일세.”

* * * *

“그래서, 양택수 부회장님은 동그라미 표시를 하면 됩니까?”

“동그라미는 좀 그렇고, 세모 정도면 적당하지 않겠냐? 턱관절도 세모처럼 생기신 분이니까.”

김원철 아저씨의 아재 개그 감각은 당최 종잡을 수가 없다.

뭔가 안 웃긴데, 가만 생각해보면 또 그럴듯해서 웃음이 피식피식 새어난다.

그렇다고 대놓고 웃자니 자존심이 상하고.

어쨌거나 나는 화이트보드에 적힌 양택수 부회장의 이름 옆에 세모 표시를 했다.

“됐고요. 결국, 구미 공장 건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달린 거네요. 그럼 남은 분은….”

한율산 전 문중회 간사.

스위스 은행 계좌의 비밀번호를 가진 할아버지로 반드시 포섭해야 하는 인물이다.

김원철 아저씨는 뭔가 생각이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한참을 끙끙대며 앓는 소리를 내더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게 말을 꺼냈다.

“한율산 영감님은 일단 양씨 할아버지 일 끝난 다음에 처리하자.”

내 머리 위에 올라간 물음표 표식을 보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김원철 아저씨는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팡팡 치며 호언장담을 시작했다.

“걱정하지 말어. 나 김원철이야. 아이큐 144의 빛나는 머리를 자랑하는.”

“빛나긴 하네요, 확실히. 머리만.”

형광등이 좀 밝다 했더니만, 휑한 이마에 빛이 반사되어 그런 모양이었다.

굳이 여린 마음에 상처를 줄 필요는 없다. 나는 아저씨가 눈치채기 전에 재빨리 화제를 업무 이야기로 돌렸다.

“아무튼, 그럼 남은 건 전략실 인력 보강뿐이니, 이제 슬슬 들어들 오라고 해야겠네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