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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의 핵몽둥이-13화 (13/300)

13화명동 악바리(1)

탄약그룹 본사 45층의 전략실.

긴장한 모습의 남자가 내 앞에 선 채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친절한 상사의 모습을 롤모델로 하는 나였기에, 나는 이 쥐새끼에게 따뜻하고 구수한 욕 한마디를 건네주었다.

“네, 수고하셨고요. 이제 그만 꺼져주시면 될 것 같네요.”

“저기, 전략실장님? 그게 무슨….”

“나가라고. 이 간첩 새끼야. 앞으로 45층에 그림자라도 비치면 넌 내 손에 죽습니다. 알겠습니까?”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부서이동 지원자.

찰진 욕을 들은 말쑥한 양복쟁이가 사색이 된 표정으로 도망치듯 전략실에서 빠져나갔다.

“후우… 또 스파이야. 벌써 연달아 세 명 째네. 안 그래요? 부실장님.”

탄약그룹의 신생조직인 전략실은, 그리고 전략실의 수장인 나는, 유능하고 빛이 나는 인재가 필요하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아무거나 주워 먹을 수는 없는 노릇.

철저히 검증된, 내 사람으로 쓸 수 있는 노예. 아니, 인재가 필요했다.

“흐흐흐. 그러게 말이다. 어떻게 된 게 찾아오는 놈들이 죄 폐급 아니면 한화기 본부장 쪽 간첩이냐?”

1호 노예이자 이제는 숫제 상전 노릇을 하는 김원철 부실장.

그의 첫 업무는 다름 아닌 2호 노예를 뽑는 것이었다.

인사와 관련된 서류 뭉치를 책상 위에 거칠게 내려놓은 김원철. 그는 진한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나 역시 책상 위에 손가락을 톡톡 두들기며 이 상황에 대해 불쾌함을 표했다.

“둘 중 하나인 거죠. 일단 위에 놈들이 전략실을 짬 처리용으로 생각해서 폐급을 보낸 것이고.”

차출된 인력.

제아무리 내가 그룹 조간 회의에서 원맨쇼를 했다고 한들, 전략실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뒤집힐 정도는 아니었다.

-전략실? 아아, 그 가건물 조직? 저성과자용 유배지로 쓰면 딱이네.

관리자급의 인식은 아직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상황.

의자 목 받침에 머리를 기댄 나는 심드렁한 어투로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아니면 방금 온 쥐새끼처럼 숙부가 악성코드를 심으려 하거나. 얼추 예상했던 바가 아닙니까?”

“결국, 처음 생각했던 대로 남은 사람은 한 명인 거지.”

이면지 통에 이제까지 쌓인 인사 서류를 모조리 집어넣은 김원철.

이제 면접용 책상 위에는 단 하나의 인사 파일만이 남아 있었다.

빨간펜으로 여기저기 표시된 서류. 첫 페이지에는 인상이 선해 보이는 여자가 함박웃음을 지은 사진이 붙여져 있었다.

“야, 실장님아. 얘가 걔라고? 그 증권에서 캐피탈로 옮겼다는 PB?”

“옮김당한 거겠죠. 여기 빨간 줄 친 거 보시면 아시겠지만, 사정이 원체 복잡해 보이지 않습니까?”

원래 PB라는 직책은 탄약 증권에만 있는 것이었다.

금융자산 50억 원 이상의 VIP 고객들을 위해 따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목적이고.

그러나 유세나 과장은 모종의 이유로 탄약 증권에서 쫓겨나듯 자리를 옮겼다.

“그래도 보니까 실력은 있어요. 나이도 꼴랑 서른밖에 안 먹었는데, 무슨 자산운용 쪽 베테랑 포스가 납디다.”

“히야… 인제 스물다섯 먹은 녀석이, 뭐? 서른이 꼴랑 어쩌고?”

아차, 이런 실수를.

회귀 이후에는 한동안 말조심하느라 이런 일이 없었는데, 어느새 긴장이 풀어진 모양이었다.

나는 일부러 능글맞은 표정을 연기하고는 김원철에게 대답했다.

“사람은 껍데기가 아니라 알맹이를 봐야 하지 않습니까. 이제 보게 될 유세나 씨처럼요.”

“쓰흡… 대답이 좀 시원찮은 감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이 아저씨. 참 쓸데없이 감만 좋다. 그러니 내 곁에 붙어있는 거겠지만.

“뭘 또 그렇게 따지고 그러십니까. 시간 없으니 바로 면접 봐야죠. 유세나 씨, 들어오세요!”

* * * *

“후우….”

깔끔한 여성용 정장을 입은 흑갈색 머리의 유세나.

양 손바닥에 난 땀을 치맛자락에 문지르는 그녀.

검은색 치마라 망정이지 회색이었다면 벌써 젖은 티가 났을 터다.

“도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길래, 앞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욕이란 욕은 다 먹고 나오는 거람….”

떨려오는 감정이 슬슬 다가오자 그녀는 파우치에서 작은 손거울을 꺼냈다.

거울에 비친 그녀의 얼굴.

아랫입술을 깨물자마자 붉은색 립스틱으로 칠한 윤기 나는 입술에 주름이 잡혔다.

입안에 맴도는, 비린 피의 맛.

이윽고 정신을 다잡은 유세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반드시 전략실에 들어가야 해. 한서준 전략실장만이 희망이야.”

탄약 증권은 그녀를 버렸다.

정확히는 탄약 증권의 수뇌부가 대주주인 자신의 아버지를 버렸다.

명동의 사채업자, 유태촌.

그녀의 아버지는 탄약 증권이 들어설 당시 자본금을 대어 준 창립 멤버 가운데 하나였다.

-[대한일보] 탄약그룹, 증권업 진출의 신호탄을 쏘나? 종금사와 대부업체 등과 연합하여 덩치를 키울 것으로….

시간이 지나 안정적으로 제도권에 안착한 탄약 증권.

그것은 유세나에게 축복이 아닌 비극의 시작이었다.

한화기를 필두로 한 수뇌부는 사채업자 연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성경제] 탄약 증권, 벌써 5차례 유상증자 단행. 전환사채의 주식전환에 이어 또다시 기존 주주의 지분 비중이 축소되나?

유세나의 소속이 탄약 증권에서 탄약 캐피탈로 바뀐 이유 또한 거기에 있었다.

공신의 자손 역시 빼내야 할 돌이었으니까.

-유세나 씨, 들어오세요!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던 유세나.

그녀의 귓가에 면접관으로 추정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서준 전략실장… 과연 어떤 사람일까?”

풍문으로 듣기에는 매우 무섭고 차가운 사람이라는 소문이 있다.

특히 그 유명한 그룹 본부 조간 회의 이야기만 들어서는, 아예 대놓고 서명희 이사장의 손자인 티가 날 정도라고 했으니까.

베테랑 임원진들마저도 꼼짝 못 하게 만든, 사나운 남자.

“에라 모르겠다. 일단 들어가 보자.”

문을 열고 들어서자 보이는 두 사람. 왼쪽의 대머리 중년, 그리고 오른편에 앉은 젊은 남성.

“대박….”

커져 버린 눈동자. 그리고 남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내뱉은, 진심 어린 감탄사 한 마디.

옆의 대머리와 비교되어 더 멋지게 생긴 것 같다.

아니, 오히려 탈모 아저씨의 이마에 반사되는 형광등 때문에, 후광 비슷한 게 생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녀 머릿속에 담긴, 차마 연이어 말하지 못한 그 말.

‘그냥 심술쟁이 금수저 낙하산인 줄 알았는데… 엄청 훈남이잖아?’

* * * *

“흠….”

내 앞에 선 이 여자의 인적사항을 읊어보자.

-탄약 캐피탈 종합금융팀 최연소 과장

-시카고 대학교 경제학과 조기 졸업, 차석 졸업

-탄약 증권 개인 금융팀 PB 실적 1위

-조기승진 2회

책상 위 서류. 거기에 적힌 유세나 과장이라는 사람에 대한 정보.

겉으로 보기에 그녀의 스펙은 화려했다. 이런 사람이 주류에서 밀려났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그렇기에… 나는 이 사람의 속사정을 보아야만 했다.

엄마로부터 유세나 과장에 대해 전해 들은 나는 따로 조사를 시작했다.

‘탄약 증권에서 탄약 캐피탈로 옮긴 이유가 숙부 때문이었구나.’

회귀 전, 숙부는 탄약그룹이 공중분해 되는 것을 그대로 방기했다.

그러나, 마치 썩은 사과에서 먹을 수 있는 부위를 도려내는 것처럼 끝까지 가지고 갔던 회사들.

-탄약 증권

-탄약 손해보험

증권과 손해보험. 이 두 회사를 중심으로 한 금융 쪽 계열사들.

복잡하게 얽힌 다른 계열사들과는 달리, 금융 쪽만큼은 숙부가 상당 부분의 지분을 갖고 있었다.

처음 자본금을 출자한, 외부 창립 멤버들을 내쳤기 때문에.

“안녕하십니까. 유세나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거기 편하게 앉으시죠.”

겉으로 보이는 능력은 좋다. 함께 하면 한화기라는 공공의 적을 상대하기에 배신 염려도 적다.

“헤이, 헤이.”

옆구리에 뭔가 쿡쿡 닿는 느낌이 난다고 했더니만.

내 쪽을 향해 오른쪽 눈을 깜빡이는 김원철 아저씨.

사전에 자기 혼자서 결정한 동의의 사인이었다.

‘어디 보자… 유세나 이 친구는 우리랑 같이 가도 될 거 같은데?’

‘외모만 보고 뽑으면 안 됩니다.’

‘아이, 무슨 그런 소리를. 이쪽 아버지가 명동 악바리 유태촌이잖아. 한화기랑 상극이라고.’

‘지분 빼앗기고 딸까지 탄약 증권에서 쫓겨났으니 복수의 칼을 갈긴 하겠네요.’

‘유세나 통해서 유태촌 자금도 땡겨 쓸 수 있는 거지. 내가 윙크하면 그건 오케이 사인인 거야. 알았지?’

고장난 전등처럼 쉴 새 없이 눈을 깜박이는 김원철 아저씨.

내가 다 창피하다.

일단 이 부담스러운 중년 분과 시선을 마주치는 것은 잠시 미뤄두어야겠다.

시선을 유세나 쪽으로 옮긴 나는 간단한 질문 몇 가지를 던졌다.

가장 먼저 보고 싶은 것은 그녀의 인사이트.

“올해 3/4분기부터 4/4분기까지.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 최선입니까?”

올해 말.

미국발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강타할 시기.

사실 내가 그런 주장을 했다는 사실은 그녀도 그룹 본부 회의록을 통해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질문의 핵심은…

‘내가 무엇을 해야 최선입니까?’

유세나 씨. 당신은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있나?

단순 부하직원이 아닌, 비지니스 파트너 후보자로서 돌아가는 판에 대한 인식을 보여 봐.

“기술적인 부분은 제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고개를 들어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유세나.

그녀의 눈동자, 그 깊고 검은 호수가 자신감으로 빛나고 있었다.

애써 흥미로움을 억누른 나는, 차분함을 연기하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대답을 원한다는 신호로.

“금융위기에 베팅할 파생상품들을 매매하는 것입니다. 탄약그룹 핵심 지분 매입을 위해서.”

탄약그룹 핵심 지분 매입.

핵심을 그대로 짚어낸 유세나는 상황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다.

한 배를 탈 사람이 기본적인 통찰력은 갖췄다는 게 확인된 상황.

“일단 알겠습니다.”

옆으로 시선을 주자 입가에 미소를 건 채 고개를 끄덕이는 김원철 아저씨.

자신은 지금도 충분하다 생각하지만, 마지막으로 확인할 것은 확인해 보라는 신호였다.

다시 힘이 들어간 깍지 낀 양손.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나는 유세나에게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아버님 되시는 분께서도 유세나 씨와 같은 의지가 있으십니까?”

안 그래도 동그랗던 눈이 꽃사슴처럼 변한 유세나. 당황한 모습을 감추지 못해 아차 싶었던 모양이다.

아주 짧은 침묵. 그녀의 선택은 질문을 질문으로 받는 것이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보시다시피 입지가 탄탄하지 못해서요. 외부의 도움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명동 악바리 유태촌.

숙부 때문에 탄약 증권 지분에 들어갔던 자금이 날아갔다고 한들 아직 여유 자금이 있을 터.

탄약그룹 경영권 다툼. 당신도 알고 있잖아?

베팅 금액을 말해.

그게 힘들다면 최소한 적극적인 의사를 표시하고.

“금액과 관련된 부분은 제가 확언할 수는 없지만….”

말끝을 흐리는 유세나.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굳이 면접의 형식을 빌려서까지 여기까지 찾아온 이상, 당신이 내게 건넬 대답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내 시선이 고정된 유세나의 붉은 입술. 그리고 약간의 기다림.

마침내 그녀의 두 입술 사이 거리에서 듣고 싶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날을 세우고는 계십니다. 언제라도 기회가 오면 칼을 찌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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