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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의 핵몽둥이-14화 (14/300)

14화명동 악바리(2)

탄약 캐피탈에서 팀장 직위를 달고 있는 한서희.

겉으로 드러난 직책은 팀장급에 불과하지만, 회사 내의 그 누구도 그녀를 일개 팀장 따위로 취급하는 일은 없다.

독립적인 사무실, 별도로 딸린 개인 비서까지. 여느 임원 못지않은 대우를 받는 그녀.

“주간보고 올리겠습니다. 팀장님.”

매주 금요일 밤.

그녀는 자신의 심복이라 할 수 있는 비서로부터 그룹 내의 동향을 전해 받는다.

비공식적인 행위이기에 사내 인트라넷 망이 아닌, 종이 문서로 상신되는 내용.

한 장 한 장 넘어가는, 바스락거리는 종이 소리가 끝나자 복잡한 표정을 짓는 한서희.

“유세나 과장 인사이동? 이건… 예상 못 했던 건데.”

뒤통수라도 얻어맞은 듯, 멍한 얼굴의 한서희.

몇 달 전, 탄약 증권에서 찍어낸 유세나를 못 이기는 척 탄약 캐피탈로 받아낸 그녀였다.

유세나의 아버지 유태촌의 자금력까지 염두에 둔 선택.

그렇기에 최대한 아버지나 오빠들에게 티가 나지 않게끔, 연말 정기 인사까지 묵혀 둔 인재였거늘.

“한서준, 그리고 김원철까지. 이 두 사람 유세나에 대해 어디까지 아는 거지? 아니, 잠깐만….”

회장 자리를 노리는 한서준.

물론 언젠가 그와 힘을 합칠 생각은 있다. 아버지인 한화기보다 그녀에게 득이 되는 선택이기에.

그러나 어디까지나 주도권만큼은 한서희 그녀가 가져야 했다.

압도적인 무언가에 끌려가는 존재는 협상력이 전무하니까.

“설마….”

순간적으로 뇌리에 스친 불안감.

그리고 그녀의 머릿속 유성처럼 스쳐 지나가는 한 줄기 상상.

‘행여나… 한서준이 나처럼 유세나와 유태촌, 두 사람과의 동맹을 염두에 둔 것이라면?’

다급히 보고서를 집어 든 한서희.

날짜. 서둘러 유세나의 인사이동 날짜를 확인해야 한다.

이미 하루가 지났다면, 그것은 늦은 것이다. 오늘이어야만 그녀가 손을 쓸 시도라도 할 수 있는 상황.

“제발, 제발. 금요일이면 오늘. 시간은… 오후 4시!”

숫자 7을 가리키는 벽걸이 시계.

의자 바퀴가 거칠게 밀리는 소리와 함께,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한서희.

그녀가 다급한 목소리로 비서에게 지시를 내렸다.

“전략실에 배속된 운전기사. 오늘 이동 경로 추적해서 가지고 와. 당장!”

“알겠습니다. 팀장님.”

자리에 선 채로 손톱을 물어뜯는 한서희. 통제를 벗어난 심장이 제멋대로 달리고 있다.

긴장되는 시간의 연속. 마침내 총무팀에 전화를 건 비서가 그녀에게 다급히 보고를 올렸다.

“오후 5시경에 차량 출발하여 아직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탑승자는 한서준, 김원철, 그리고… 유세나까지 넷입니다.”

“당장 차량 준비시켜. 아니, 내 차로 이동할 테니까 김 비서가 운전해.”

평소대로 회사 차량을 이용하려다가 순간적으로 멈칫한 한서희.

그럴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하겠지만…. 만에 하나, 방금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나 오빠들이 차량 이동 경로를 추적한다면.

그리고 운전기사들 사이에서 모종의 소문이라도 돈다면,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내기는커녕 차선책마저도 쓸 수 없게 된다.

“어디로 모시면 되겠습니까, 팀장님?”

회사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가며 비서가 질문했다.

당장 급히 가야 할 곳.

깊이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

모든 정황을 종합했을 때 남는 건 단 한 곳뿐이니까.

“명동! 명동 악바리 유태촌 집으로. 시간 없으니까 교통 신호 다 무시하고!”

탄약그룹 본사가 있는 청계천 인근부터 명동 유태촌의 집까지는 차로 15분 거리.

손목시계를 한 번, 차창 바깥 풍경을 한 번. 수시로 시선을 옮겨대는 한서희.

어스름하게 깔려가는 저녁 어둠 탓에, 그녀의 조급한 표정이 점점 창가에 비치기 시작했다.

길가에 내려앉은 어둠을 환한 가로등이 밝혀주기 시작할 때쯤, 그제야 비로소 달리던 차량이 멈추었다.

그리고 엔진 소리와 함께 멈추어버린 한서희의 심장 소리.

“이미 늦은 건가….”

커다란 한옥 앞. 이미 익숙한 얼굴의 네 사람이 인사를 나누는 듯 고개를 숙이는 모습.

주먹을 꽉 쥔 그녀.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 들어간 듯, 뜨거운 통증이 일었다.

그리고 운전석 룸미러 너머, 무언가 결심한 듯 이를 앙다문 한서희의 모습이 비쳤다.

“한발 늦었다면… 차선책이라도 쓰는 게 맞겠지.”

“팀장님?”

“잠깐 대기하고 있어. 시간 좀 걸릴 거야.”

또각또각 울리는 하이힐 소리에 담소를 나누던 네 사람의 시선이 옮겨졌다.

가로등 불빛 아래. 내려앉은 어둠 사이로 서서히 드러나는 그녀의 모습.

그리고 짙게 그림자 진, 흑색 단발머리 아래 애써 미소지은 한서희의 얼굴.

그녀의 시선 끝에 닿은 것은, 한발 빨리 움직인 탄약그룹 상속자의 모습이었다.

“오랜만이네요. 네 사람 모두.”

“서희 누나? 누나가 여긴 어떻게…?”

* * * *

처마 끝에 걸린 노을빛이 격자무늬 창호를 타고 들어와 가훈이 적힌 현판에 닿았다.

흑단 나무에 멋들어지게 쓰인 붓글씨.

[복수의 이자는 복리로 붙는다]

사랑채 마룻바닥에 가부좌를 튼 유태촌.

그는 까끌까끌한 손으로 주름진 얼굴에 깊게 팬 흉터 자국을 매만졌다.

다시 칼밥을 먹는 한이 있더라도 탄약그룹 한씨 집안 사람과 다시는 손잡지 않으려 했었다.

하지만 뜻하지 않는 일은 순식간에 밤손님처럼 찾아오는 법.

“망할 딸년 같으니. 제멋대로 일을 저질러 놓고. 거기다가 집안에 한씨 놈까지 들일 생각을 해?”

집안 사용인들에게 저녁상을 받기 전, 그의 딸 유세나로부터 걸려온 전화 한 통.

딸아이의 목소리는 조금 상기된 듯, 평소보다 한 톤 높게 들렸다.

‘지금 바로 본가로 갈게요. 손님 두 분하고 같이.’

뜬금없는 통보였다.

워낙 바쁜 딸이었기에 평소 본가에 잘 찾아오지도, 손님을 데리고 오지도 않았던 유세나.

나무라듯 이유를 캐묻는 유태촌에게 그녀는 주눅 따위 일절 들지 않은 듯 짧은 대답만을 건넸다.

‘한화기 본부장의 대항마를 찾았어요. 사안이 급하니, 일단 가서 말씀드릴게요.’

무어라 더 말할 새도 없이 곧바로 끊긴 전화.

통화 종료음과 함께 잠시 생각에 잠긴 유태촌은 기억 속에서 곧장 그 대항마를 떠올렸다.

아주 어설프기 짝이 없는, 그러나 계승권만은 누구보다 높은, 멍청한 후계자를.

“스물다섯짜리 풋내기라. 한화기 놈 옆에 세워두면 마치 수양대군과 단종 꼴이겠군.”

머릿속 세상에서 나온 그가 처음 느낀 감각은, 손가락 끝에 닿는 까끌까끌한 턱수염의 감촉이었다.

마치 회백색 늑대를 연상케 하는 그 모습은 단지 외모뿐만은 아닐 것이었다.

사냥감.

피 냄새를 맡은 유태촌의 눈이 마치 맹수처럼 안광을 내뿜었다.

“꼭두각시 인형에 실만 잘 묶는다 치면… 탄약 증권 그 이상을 넘볼 수도 있을 터.”

조카의 칼로 삼촌을 쳐 집안을 삼킨다.

그 정도면 차고도 넘친다. 저 현판에 적힌 가훈대로, 복수에 두둑한 복리 이자가 붙으리라.

어느새 땅거미가 내리깔린 저녁.

노을빛을 받아 선명하게 보이던 가훈이 그림자에 숨은 듯 어둠 속에 감추어졌다.

“나쁘지 않다. 딸년이 다 컸군. 제법 먹이도 물어올 줄도 알고.”

발톱을 감춘 늙은 늑대.

때마침 그의 집 사용인이 사랑채 문을 두드렸다.

사냥의 시작을 알리는 호각 소리를 내며.

“주인 어르신. 세나 아가씨 오셨습니다. 손님분들도 같이 오셨는데 어떻게 할까요?”

“들어오라 해. 아아, 그리고.”

늑대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귀한 놈이니 예를 다해서 맞이하도록 허고.”

* * * *

이 사람.

웃고 있지만, 그 미소에 피 냄새가 난다.

“어서 오시게. 다들 식사는 하셨나?”

나를 노리는 송곳니 맨 끝. 당장이라도 날카롭게 다듬어진 이빨이 내 목을 물 것만 같다.

저 인위적인 너털웃음에 호의만이 담겨 있지는 않을 터.

“식사하면서 나눌 이야기는 아닌 듯합니다. 나누는 주제가 묵직하면 나중에 꼭 체를 하더군요.”

“저런, 앞으로 큰일을 하실 분인데 이리 심력이 약해서 쓰나. 혹여 내 딸아이가 사람을 잘못 본 것이오?”

팽팽히 오가는 기 싸움.

저 늙은 늑대의 얼굴에 난 칼자국이 내게 고개를 숙이라 말하는 것 같다.

마치 회귀 전, 교도소에 있을 때 보았던 조직폭력단 우두머리의 모습.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좌중을 압도했던 그들.

그러나… 돌이켜보면 별것 아니다. 무섭게 색을 칠한 허깨비 그림에 불과할 뿐이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저 담담하게, 나를 노리는 맹수의 눈을 피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큰일을 할 것도, 따님분께서 사람을 잘못 본 것도 모두 맞습니다.”

재미있다는 듯 한쪽 눈썹을 추켜 올린 유태촌.

나는 그에게 손가락 두 개를 내보이며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오늘 이 자리에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두 가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뭐부터 들으시겠습니까?”

선택지는 내가 준다.

흐름은 내가 만든다.

제자리에 앉아 나를 노려보는 늙은 늑대. 몸은 방석 위에 있지만, 마음만은 내 주위를 원형으로 빙글빙글 돌고 있을 터.

탐색이 끝난 그가 내게 대답했다.

“그럼, 어디 나쁜 소식부터 들어보겠소이다.”

“제 혈통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내 옆자리에 앉은 유세나와 김원철. 두 사람 모두는 각기 다른 이유로 놀란 모양이었다.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어서, 그리고 숨겨야 할 사실을 드러내어서.

탁상 위의 녹차를 마신 내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서자거든요. 첩의 자식.”

내 말을 듣자마자 표정이 일그러지는 유태촌.

분노한 늙은 늑대가 악귀나찰의 얼굴을 하고서 내게 사나운 이빨을 드러냈다.

“네놈이… 지금 나를 우롱하러 온 게냐! 고작 반쪽짜리 핏줄로 왕관 장사를 하려 들어!”

늑대가 이를 앙다문 채 포효한다. 당장이라도 내게 달려들어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발길 수 있다는 듯이.

괜찮다. 상관없다.

나에게는 단 한발, 그가 절대로 거절하지 못할 제안이 있으니까.

십자 가늠쇠 정중앙에 유태촌의 얼굴이 들어왔다.

호흡을 가다듬고 방아쇠 위에 손가락을 올리는 나.

아직 아니다.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왕관 장사라. 표현이 마음에 듭니다. 그럼 이제 좋은 소식으로 장사를 해 볼까요?”

바로 지금.

차가운 쇳덩이에 걸친 검지가 움직였다.

“은행. 제1금융권의 대주주가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한씨 집안 놈들은 내 고혈을 빼먹지 못해 안달이 난 게야! 어딜 감히 허튼소리로 나를 속이려 들어!”

내 목젖 바로 앞까지 들어온 칼끝. 그저 방 안 장식품인 줄만 알았던 왜검(倭劍)이 달빛을 받아 빛나고 있다.

눈 덮인 벌판, 등 뒤로 발자국을 남긴 늑대가 내게 다가온다.

소복이 쌓인 눈 위로 피를 흩뿌려가며.

“금산분리가 무의미한 시대가 옵니다.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은행. 바로… 이 안에서요.”

내 손에 든 최초의 스마트폰.

수십 년의 세월에 걸쳐 명동에서 살아남은 유태촌답게, 그는 내가 말한 바를 단번에 깨달았다.

IT와 은행의 결합. 경계선이 허물어진 금산분리.

날 선 발톱 끝을 내 목에 겨눈 늑대가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가 들고 있던 칼끝 또한 반원을 그리며 바닥을 향해 내려갔다.

“대한민국 최초 전자금융거래 기반의 인터넷전문은행. 이제 대주주님께서 치르실 값을 계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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