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미래의 청사진(1)
탄약그룹 본사 45층 전략실.
빨간색 손수건을 뒤집어쓴 김원철 아저씨가 성냥팔이 소녀 흉내를 내고 있다.
“유태촌 아조씨! <코코아 뱅크> 지분 사세요! 다가올 겨울을 따뜻하게 맞이하세요!”
“하… 그건 또 무슨 코스프레에요. 이혼당하셨던 이유를 이제야 깨닫습니다.”
뭐가 그리 좋은 건지 껄껄거리며 코스프레를 이어나가는 김원철 아저씨.
당장 한 시간 후에 그룹 본부 조간 회의에 들어가야 하는데, 정말이지 긴장도 안 되는 모양이다.
“얌마, 유태촌이 8월까지 600억 원 조달해주기로 했는데 그깟 성냥팔이 소녀 흉내 한 번은 할 법도 하지.”
“그냥 아저씨가 장난치고 싶어서 그러는 거면서 무슨….”
600억 원.
유태촌이 내게 무이자로 빌려주겠다 약속한 금액.
여기에 엄마가 내게 준 돈까지 100억 원을 더하면 700억 원.
2,000억 원의 목표액에 한 발자국 다가왔다.
“뭐, 유태촌 그 사람도 안전장치 하나는 했으니 딱히 고마울 건 없긴 하지만.”
유태촌은 자신이 빌려줄 600억 원의 투자 운용역으로 자신의 딸, 유세나 과장을 지목했다.
사실상 딸을 감시역으로 붙인 셈.
“두건 뒤집어쓰고 먹으니까 꼭 겨울 같다야.”
능청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숟가락으로 푸딩을 먹는 김원철 아저씨.
참 복스럽게 잘도 먹는다. 얄밉기도 하고.
언젠가는 저 앙증맞은 하얀 플라스틱 숟가락으로 드넓은 이마를 딱 한 대만 때려주고 싶을 정도다.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걸까?
다시 입을 여는 김원철 아저씨. 다행히 대화 주제는 그날 늦게 찾아온 서희 누나였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한서희 그쪽도 광 하나는 잘 판 셈이야.”
“뭐, 그렇긴 했죠.”
“미래의 <코코아 뱅크> CEO 자리를 찜했으니까. 한서희 개인 지분이 좀 적어서 그렇지.”
IT와 금융의 결합.
사실 말이야 쉽지, 실제로 행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서희 누나 정도 되는 능력자를 전문경영인으로 영입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거칠게 선을 그은 밑그림 위.
그녀의 손으로 파스텔 빛 덧그림을 한 번, 두 번, 계속해서 그려나갈 수 있을 테니까.
“문제는 양택수 영감님이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마귀할멈… 아니, 사랑하는 서명희 이사장님이시기도 하고.”
당이 부족했는지 그사이 냉장고에서 푸딩 두 개를 더 꺼낸 김원철 아저씨.
마치 캐치볼을 하듯 하늘 위로 푸딩 하나를 던지며 내게 하던 말을 연이어나갔다.
“와꾸는 잘 짰어. 오늘 노인네들 앞에서 퍼포먼스만 잘하면 될 거야.”
“양 부회장님과 할머니, 두 분 마음을 제 쪽으로 돌릴 수 있을까요?”
1,000억 원이 담긴 스위스 은행 계좌 ID를 가지고 있는 양택수 부회장.
그가 원하는, 상속자로서 갖추어야 할 자격은 구미 화약 공장 폭발사고 보상 건의 해결이었다.
그리고 일전 그룹 본부 조간 회의에서 전략실장으로서 할머니에게 했던 약속.
탄약그룹의 지반을 다질 초안을 내놓겠다는 호언장담
양택수 부회장과 할머니, 두 사람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고 미래의 청사진을 그려야 한다.
“흐흐흐… 말해봐야 입 아프지. 안 그래?”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푸딩을 먹어 치운 김원철 아저씨. 그리고 그가 내 쪽으로 내민 서류 뭉치 한 다발.
순간 피식하고 잔웃음이 일었다.
그리고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감각.
“이거 봐. 웃는 거 보니까 자기도 이미 아는구만. 이대로 가면 무조건 된다는 거.”
“자꾸 바람 넣지 마세요. 긴장하고 있는 사람한테.”
서류뭉치를 집어 든 나.
손가락 끝에 닿는 종이의 질감과 코에 닿는 잉크 냄새가 오늘따라 유달리 새롭다.
밤새 작성한 문서.
살아 숨 쉬는 활자 하나하나가 지금 이 순간의 나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 주려는 것 같이 느껴졌다.
현재의 위기를 씨실로, 그리고 미래의 청사진을 날실로 엮어낸.
햇볕 한 점 들지 않는 그늘진 창살 아래. 죄수복을 입은 10여 년 후의 내가 묵묵히 써 내려갔던 이야기가.
“전략실장님. 이동하실 시간입니다.”
어딘가에서 걸려온 통화를 마치자마자 나를 부르는 유세나 과장.
벌써 그룹 본부 조간 회의 시간이 다 된 모양이었다.
“좋습니다. 그러면… 후우.”
가볍게 심호흡을 한 나.
혈관 속을 타고 흐르는 약간의 긴장감이 외려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기분이다.
그리고 그 긴장감이 고양됨으로 바뀌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출발합시다. 오늘 칼춤 한번 신나게 추고 오도록 하지요.”
* * * *
-톡톡!
탄약그룹 꼭대기 층. 대회의실.
거친 생각이라도 있는 건지, 나덕술 탄약 건설 사장이 불안한 눈빛으로 중공업의 박한이 사장에게 말을 꺼냈다.
“박 선배. 그거 들었어요?”
“응? 듣긴 뭘 들어? 우리 마누라 이번 달 카드값 2,000만 원 나온 거?”
박한이 탄약 중공업 사장의 대답을 한심하다는 듯 지켜보던 조선 해양의 성원식 사장.
불과 2주일 전의 전쟁 같던 상황. 그 끔찍한 기억을 되살린 그가 핀잔을 주었다.
“아이… 지금 카드값 타령할 때야? 오늘 조간 회의, 한서준인지 응우옌인지 그 전략실장도 온다잖아.”
“옘병할… 저번처럼 또 죄 막대기로 벌통 쑤셔놓는 거 아닌가 몰라. 나중에 한화기가 독침 쏘면 내가 다 맞는 건데… 이크!”
오락실 두더지처럼 순식간에 움츠러든 박한이 사장의 목.
넉살 하나로 이 자리까지 올라온 그였다. 그런 그가 기를 펴지 못하는 유일한 사람.
서슬 퍼런 모습의 한화기 재무 본부장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오… 오셨습니까. 본부장님.”
“앉지.”
다행히도 박한이 탄약 중공업 사장이 독침 어쩌고 하는 말을 듣지 못한 한화기.
그의 머릿속에는 얼마 전, 둘째 아들이 맏이 몰래 찾아와 전하고 간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그날은 형이 자꾸 술을 권해서 실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초라하고 어설펐던 자신이 형과 비교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비교가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와닿았던 것 같았다.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려는 둘째 한서후.
늦은 밤, 한화기의 집에 온 그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USB 하나를 건넸다.
‘이건 뭐지?’
‘저도 나름… 생각이란 게 있는 놈입니다. 이번 구미 화약공장 보상 건, 조금 머리를 굴려 보았습니다.’
보나 마나 한서후 본인이 생각해 낸 것은 아닐 것이었다.
아래 직원들을 쥐 잡듯 잡아서 어떻게든 결과물을 만들어내었을 것이 눈에 선한 한화기.
그럼에도, 그는 이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려는 둘째가 기꺼웠다.
큰 기대 없이 열어본 USB 파일.
그러나 생각 외로, 한서후가 가지고 온 그 보고서의 내용은 생각보다 매력적이었다.
‘어떻습니까? 제법… 쓸만한 아이디어 아닐까요?’
이번 사고에서 외부 보험사를 통해 보상할 금액은 3조 8,000억 원.
한서후의 계획은 이를 보험증권의 형태로 바꾸어 탄약 증권과 탄약 손해보험이 인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시작되는, 하자 섞인 금융상품으로의 판매.
‘일단 그 보험증권 기반의 금융상품을 시중에 팔아버리는 겁니다.’
탄약 증권과 탄약 손해보험의 영업망이라면, 금융 문맹인 사람들에게 이 상품을 파는 일이야 식은 죽 먹기다.
이미 반쯤 사기와 다름없는 폭탄 돌리기. 그러나 한서후의 계획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안 팔리고 남은 보험증권은 일반채권하고 섞어서… 캐피탈로 밀어버리면 됩니다.’
‘탄약 캐피탈로?’
‘서희에게 책임을 물으면 됩니다. 계열사 하나 터지는 것으로 마무리되게끔 말입니다.’
아둔하고 어리석은 줄로만 알았던 그의 둘째 아들.
그런 그가 간만에 자신의 존재가치를 입증했다.
평시라면 몹시 위험한 계획. 하지만 지금은 탄약그룹의 왕좌를 둘러싼 전시 상황.
비록 부작용이 있을지언정, 이 정도 리스크는 감당할 수 있으리라 여긴 한화기.
마침 생각을 끝마친 그의 귀에 서명희 이사장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꽂혔다.
“재무 본부장은 구미 공장 보상 건 관련해서 할 말 없나?”
* * * *
서태후.
한화기 자신의 어머니지만 냉랭하기 짝이 없는, 얼음 여왕 같은 자.
탄약그룹이라는 요새를 지켜낼 자에게 왕관을 씌워 줄 여제 역할을 맡은 그녀.
얼어붙은 눈가리개를 한 서명희 이사장은 아들에게도, 손자에게도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자 했다.
그 말은 곧 철저히 자신이 정한 원칙대로만 판단한다는 것.
“고려해둔 바가 있습니다. 이사장님.”
자신의 둘째 아들이 만들어 바친 칼.
시퍼렇게 날이 선 그 칼로 어머니 앞에서 검무(劍舞)를 선보이는 한화기.
주위를 둥그렇게 둘러싼 수십 개의 눈동자는 무대 위에 올라선 그를 보며 소리 없이 외치고 있었다.
보여라.
내 주인이 될 자의 자질을.
“당장 무리하게 보상할 필요는 없습니다. 증권화 작업을 통해 먼저 시중에 푸는 방향으로 가면….”
회의에 참석한 임원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호평. 한화기가 그리는 검무(劍舞)에 몰입하기라도 한 듯, 숨죽여 바라보는 눈동자들.
‘잘 되어가는 건가…?’
춤사위에 의문을 담아 스스로에게 불안정한 질문을 던지는 한화기.
그 불안감을 해소하기라도 하듯, 서태후의 안광이 달빛처럼 빛났다.
오직 가능성이 보이는 자에게만 내비치는, 그 눈이.
‘성공, 성공적이다!’
빛을 받아 휘영청 비치는 칼날이 어딘가를 가리킨다.
당장이라도 팔을 뻗어 가슴 깊이 찌르고만 싶은 붉은 표식.
반쪽짜리 핏줄임에도 자신보다 더더욱 진한 것 같은, 그의 조카 한서준의 심장이었다.
“잔여 물량은 캐피탈로 보낸 후, 경우에 따라 계열 분리를 통해 도산 절차를 밟는 쪽으로….”
“잠깐만요. 잠시만 끊고 가도 괜찮겠습니까?”
묵직한 쇠 냄새.
빈 공간을 찢는 것 같은 금속의 파열음.
자신이 추던 검무(劍舞)에 투박한 칼날이 밀어 넣어진 듯, 손끝에 아려오는 감각의 떨림.
언제 자리에서 일어난 것일까? 마구잡이로 뛰어다니는 한서준의 심장박동 소리가 그의 귀에 닿을 듯이 가까워졌다.
“탄약그룹, 독이 든 사과를 허겁지겁 먹어 치워야 할 정도로 나사 빠진 집단은 아니지 않습니까?”
“…전략실장은 해당 건에 대해 숙지를 하고 입을 열었으면 좋겠군.”
차가운 눈동자로 검무(劍舞)를 망친 이를 노려보는 한화기.
그리고 겁도 없이 그의 춤사위에 끼어든 한서준.
바로 지금, 갑옷 사이로 드러난 맨살의 목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니면, 전략실장은 이를 대신할 책략이라도 가지고 있나? 대책 없이 입만 놀리는 자는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어!”
유령이 추는 무희에 이끌리듯 다가가는 손.
조금만 더. 한 뼘만 더 닿으면, 그의 둘째 아들이 만들어 바친 칼이 저 하얀 목을 꿰뚫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책략, 마땅히 가지고 있습니다. 각혈을 토하면서까지 독이 든 사과를 먹을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조각나 버린 칼.
마치 기다란 흉터처럼, 매끈하게 빛나던 것이 우그러진 쇳조각이 되어버린 양, 아무런 빛을 받아내지 못하고 있다.
황급히 돌린 시선. 그 끝에는 자신을 향해 혀를 차는 서태후가 있었다.
“쯧쯧쯧… 못난 놈.”
감았던 눈을 뜨니 거울에 비친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조각난 칼에 찔려, 목 한가운데가 꿰뚫린 자신의 모습이.
어느새 바뀌어버린 무대 중앙의 위치.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흰 바탕. 언제 틀었는지 모를 빔프로젝터 위에 한서준이 엮어낸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허어, 경탄을 금치 못하겠군. 이런 기획은 도대체 어떻게 생각한 것이지?”
“정말 창의적이야. 한서준 전략실장이 공을 많이 들인 티가 나는구먼.”
넋이라도 나간 걸까?
가로등 불빛에 홀린 부나방처럼, 한화기 자신만을 바라보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빔프로젝터를 향했다.
탄약그룹이 처한 현재의 위기가.
탄약그룹이 맞이할 미래의 청사진이.
탄약그룹을 이끌 왕관의 주인이 누구인지 천명하는 내용이 적힌 그곳으로.
“지금부터 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모두의 시선을 독점한 그의 조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담담한 목소리. 곧게 편 등.
방 안의 모든 집중력을 끌어드린 그가 자신만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주제는 구미 화약공장 폭발사고 피해보상 대책 방안. 그리고… 그를 이용한 그룹 전체의 재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