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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의 핵몽둥이-16화 (16/300)

16화미래의 청사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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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흰 바탕 위에 못이 박힌 듯 내려앉은 검은색의 숫자는 태산처럼 거대한 위압감을 내뿜었다.

물경 3조 8천억 원. 숨이 턱턱 막힐 것만 같은 보상금 액수.

가슴팍에 임원 배지를 단, 나름 탄약그룹의 거인이라는 자들이 숨을 참고 쪼그라드는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크흠, 저 큰돈을 어찌….”

“다시 봐도 저 액수는 과하구먼. 허어, 어쩌다 그룹에 저런 위기가….”

책임지지 않는, 책임질 생각이 없는 자들의 반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이들의 신음이 내 귓가에 들려왔다.

저런 이들의 목소리가 이 회의실에 잡음의 형태일지언정 계속 울려 퍼지도록 둘 수는 없기에, 나는 곧바로 입을 열어 내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요점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손실을 최소화한다. 둘째, 위기를 기회로 삼는다.”

마우스 휠이 내려가는 드르륵 소리와 함께 화면 오른쪽의 스크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이는 피해 보상금의 세부 내역.

엉킨 털실처럼 복잡하기 짝이 없는 그 숫자들의 조합은 마치 연주하기 난해한 악보를 보는 것만 같았다.

셈여림과 조표, 임시표로 칠해져 감히 손도 댈 수 없을 것만 같은 오선지가.

“손실을 최소화하는 것과 위기를 기회로 삼는 것. 두 가지는 별도의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하나입니다.”

하지만… 숫자의 어지러움에 속지 않는다면, 차분히 멜로디만을 따져본다면 모든 것은 아주 간결해진다.

회계장부라는 하얀색 건반 위, 내 손가락에 닿는 촉감.

피아노 현의 떨림이 시작됨과 동시에 오로지 악보의 주(主)선율만이 회의실 내부를 메웠다.

“구미공장 폭발사고로 인한 총 피해액은 10조 3천억 원. 그 가운데 보험사 측에서 커버되는 비용은 6조 5천억 원입니다. 다음.”

내 신호에 맞추어 유세나 과장이 PPT 페이지를 넘겼다.

화면 가득 들어찬 국내외의 보험사 로고.

키보드를 딸각거리는 소리가 한 번 더 나자, 각기 도드라진 보험사 로고 위로 숫자가 나타났다.

탄약그룹 대신 보험사가 지급해야 할 보험 금액이.

“그렇다면 남은 탄약그룹이 부담해야 할 3조 8천억 원. 과연 이 거액의 보상금을 저희가 다 부담해야만 할까요?”

“안 나가도 될 돈이 지갑에서 빠져나갈 판국인 겐가?”

내 말에 질문을 던짐과 동시에 눈썹 한쪽을 추켜올린 채 무표정 속 재미있다는 표정을 감춘 서태후.

고개를 끄덕인 나는 이 자리의 결정권자인 할머니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머저리들 하는 일이 그렇지 않습니까? 바가지 쓴 거나 좀 알아차릴 것이지, 괜히 가시밭길을 꽃길로 착각하기나 하고 말이죠.”

시선은 할머니에게, 그러나 내뱉은 말의 겨냥은 숙부에게.

멍청한 둘째 아들 한서후의 말을 듣고 금융 사기나 치려고 하다니. 머저리라는 말이면 후하게 쳐준 것이다.

분명 내 등 뒤에서 죽일 듯이 노려볼 것이 뻔한 숙부의 눈빛 따위 신경 쓸 것도 없다.

그저 내가 해야 할 말만 하면 될 뿐.

나는 잠시 하던 말을 멈추고 좌중을 둘러보았다.

살풍경한 회의실 내부가 한눈에 들어왔다.

숙적이 될 수도, 조력자가 될 수도, 거래 상대방이 될 수도 있는 사람들.

지금부터 나는 이들에게 현재의 위기를 파헤칠 방안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미래에 나아갈 길 또한 가리킬 것이다.

“구미 화약공장 사고의 주체인 탄약 중공업. 일단 팔다리부터 갈기갈기 찢어내고 시작해야 합니다.”

* * * *

리더십보다는 충성심이 더 어울리는 사람.

일평생 탄약그룹이라는 성채에 몸담아 두 명의 회장을 모셔왔고, 이제 세 번째 회장을 모셔야 할 자.

양택수 부회장은 유리잔에 담긴 물로 목을 축이며 재킷 안주머니에 담긴 수첩을 만지작거렸다.

‘과감하군…. 그리고 신선하다. 도대체 이런 생각을 어떻게 한 것이지? 단순히 젊기 때문만은 아닐 텐데?’

전손 처리.

보험사가 피해액의 전액을 보상하는 대신, 모든 자산을 가져가는 것.

무대처럼 빛나는 연단 중앙에는 탄약 중공업 산하의 구미 화약 공장 법인을 별도로 떼어내자는 계책이 적혀 있었다.

보험 계약서 상으로는 그 법인에 대한 모든 권리만 넘기게 된다면, 거액의 보상금은 전부 보험사가 맡아야 하는 상황.

복잡하게 얽혀 있던 권리 관계. 그 모든 것을 단 한칼에 베어낼 방안이었다.

‘마치 미래에서 정답을 보고 돌아온 것만 같지 않은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럴 리는 없다고 작게 중얼거리는 양택수 부회장.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저 젊은이의 역량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느려져 가는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기라도 한 걸까?

백발의 노인의 얼굴에 오래간만에 붉은 핏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구석 자리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호들갑스러운 목소리.

“그… 그렇군! 그런 방법이 있었어! 이사장님! 이제 탄약그룹은 살았습니다!”

그 들뜬 듯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구석수 탄약 증권 사장이었다.

실무진 출신으로 금융 쪽에 잔뼈가 굵은 사람이어서일까?

아니면 한화기의 손을 뿌리치고 새로운 왕위계승자 쪽에 붙으려는 생각일까?

구석수 사장은 방금 발표된 내용을 알기 쉽게 정리하여 설명했다.

“…그렇게 한서준 전략실장 말대로 된다면, 보험사 측에서 보상금을 100% 지급할 수도 있습니다.”

“이보게, 구 사장. 그러면 3조 8천억 전부를 고놈들이 옴팡 덮어쓴다는 게야?”

이채 어린 서태후의 안광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 채, 손수건으로 흐르는 식은땀을 닦는 구석수 사장.

양택수 부회장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말없이 빙그레 웃음 지었다.

‘책임질 수 있는 발언은 오로지 주인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네. 구 사장.’

어깨를 움츠린 채 작아지는 구석수 탄약 증권 사장.

양택수 부회장은 시선을 돌려 서태후의 물음에 대답할 자격이 있는 유일한 자를 바라보았다.

그 누구도 풀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얽힌 매듭.

누구나 알 수 있지만, 누구나 알지는 못할 그 해답은 그저 칼 한 자루에 있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푼 알렉산더 대왕은 소아시아의 왕이 되었다지? 그렇다면 한서준 저 친구는….’

빔프로젝터 위에 쏘아진 화면이 바뀌었다.

날카로운 칼끝에 잘린 매듭처럼 여러 개로 쪼개진 탄약 중공업의 사업부.

그것을 보자마자 무언가를 결심한 듯 양택수 부회장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안주머니 깊숙한 곳, 탄약그룹의 새로운 계승자에게 건네기로 마음먹은 선대 회장의 금고 열쇠를 움켜쥔 그.

‘내년 기일에는 웃는 낯으로 선대 회장님을 찾아뵐 수 있겠군. 당신 아들이… 어쩌면 아버지를 뛰어넘는 재목이라고 말하면서.’

주위의 임원들이 감탄하는 소리 따위는 양택수 부회장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앞으로 남은 날이 많지 않은 노장에게 또렷이 들린 유일한 것.

그것은 그가 마지막으로 모실 세 번째 회장의 자신감에 찬 목소리였다.

“3조 8천억 원. 전액 모두 보험사 측이 부담하게 할 수 있습니다. 확신합니다.”

* * * *

양평 낚시터.

김원철 부실장과 양택수 부회장.

참모 출신 낚시꾼 두 사람은 간이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움직이지 않는 찌를 그저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던 두 사람.

“후우, 날이 꽤 덥구먼.”

한낮의 햇살이 퍽 뜨거워서일까?

손 부채질을 한 양택수 부회장이 아이스박스에서 얼음물 두 개를 꺼내 하나를 김원철 부실장에게 내밀며 말했다.

“자네가 본 것이 옳았군. 김원철이라는 이름값이 아직 부도난 것은 아닌 모양인가 봄세.”

“부회장님도 참… 괜히 기분 좋으시면서 또, 또 그런 소리 하신다.”

차가운 물이 목구멍 너머로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 후, 양택수 부회장이 입을 열었다.

“허허, 이제까지 김원철이 자네 허풍이 워낙 셌어야지. 여하튼… 이제 비밀번호만 남은 겐가?”

“뭐, 그렇지요. 이제 제 불쌍한 머리털 빠질 일만 남았습니다. 그 양반은 여간 까다로운 분이 아니셔서 말이죠.”

“되었네. 내가 알아서는 안 될 사람일듯하니 궁금해하지도 말아야겠군. 그나저나….”

일부러 선을 긋는 노익장.

그가 시험할 수 있는 것, 검증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끝난 상황에 구태여 불필요한 잡음을 내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움직일 생각조차 없는 낚싯줄을 거둬 올린 양택수 부회장.

그는 새로운 미끼를 갈아끼고는 자신이 뻗을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호숫가 한가운데로 낚싯대를 던졌다.

“중공업 박한이 사장이 목에 핏대를 세우고 악을 쓰더군. 자네도 봤어야 했어.”

“자기가 오야지로 있는 회사가 토막 난다는데 밥그릇 지키고 싶어서 발악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날, 발표 이후 그룹 조간 회의에서는 탄약 중공업을 쪼개어 보험사의 제물로 삼기를 결정했다.

사업부 단위로 조각나게 된 탄약 중공업.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이 된 박한이 사장의 거센 저항이 있었음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런데 박한이 사장 간이 그렇게 큰 줄 몰랐네요. 마귀할멈… 아니, 이사장님 앞에서 땡깡이라니.”

“머슴이 자기 주인 마음에서 벗어나면 남은 건 멍석말이뿐이니 말일세. 한화기 본부장 줄을 놓기에는 너무 깊게 들어갔어.”

* * * *

탄약 중공업의 박한이 사장.

한화기 본부장의 라인을 탄 그는 그렇지 않아도 KS 산업 건으로 입지가 위태위태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그는 기를 쓰고 궁지에 몰린 자신의 주인을 변호해야만 했다. 그 어떤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동원해서라도.

‘아…안 됩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불가합니다! 중공업을 쪼개다니요! 어찌 그런 망발을!’

입에 게거품을 물기 직전의 박한이 사장.

중공업을 찢는다는 내 말에 그는 사색이 된 얼굴로 반박을 쏟아내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한 그는 이 자리의 결정권자인 할머니에게 가까이 다가가 읍소하기 시작했다.

‘탄약그룹의 근본은 방산회사입니다. 중공업은 그 방산 부문을 총괄하는 뿌리이고요! 당장 급하다고 주춧돌을 뽑아 쓸 수는 없습니다!’

안경 너머 냉기가 가득 서린 서태후의 눈빛.

금속으로 만들어진 조각상처럼, 할머니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자신 앞에 무릎 꿇은 이 뚱뚱한 남자의 애원 따위에 마음이 약해져서가 아니었다.

방산 기업.

탄약그룹의 근본인 이 업종에 탄약 중공업이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이 걸린 모양이었다.

‘이봐, 박한이 사장.’

‘예, 예! 이사장님. 말씀해주십시오!’

‘자네 말은 잘 들었다. 헌데, 그러면 보험사에 중공업 중 무어를 떼 주어야 하는 게야?’

구미 화약 공장 부지를 소유하고 있는 것은 탄약 중공업 산하의 자회사.

단순 구미의 땅만 넘긴다면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 이 자회사의 손에는 단 한 가지 치명적인 사업권이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박한이 사장을 대신해 숙부가 굳게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마치 궁지에 몰린 지금 이 상황을 한 번에 뒤집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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