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장님의 핵몽둥이-17화 (17/300)

17화킬방원(1)

비행기 안.

창밖으로 보이는 사막 풍경을 눈에 담고 있는데, 옆에서 위스키 따르는 소리와 함께 김원철 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설마하니 구미 화약 공장 부지를 가진 자회사가 이라크군 군수품 조달권도 가지고 있었을 줄은 몰랐네.”

귀여운 병아리 캐릭터가 그려진 양말 안쪽에서 앙증맞게 꼼지락거리는 발가락.

입고 있는 양복 차림과는 하나도 안 어울리는 모습의 김원철 아저씨.

그나마 퍼스트 클래스 좌석 구간에 사람이 많지 않아 다행이다.

조금… 창피하거든. 이 모습.

“그러게 말입니다. 보험사에 이라크 사업권까지 넘겨줘야 할 줄은 저도 생각 못 했네요. 그런데 위스키는 좀 그만 드시죠.”

“어차피 대머리 되어가는 거 공짜 술 좀 좋아하면 뭐 어때. 낄낄낄.”

“하… 그냥 많이 드십시오. 그래도 신발은 좀 신으시고요. 실내화라도요.”

구시렁거리며 슬리퍼를 신는 미운 5살, 아니 미운 50대에게서 시선을 돌린 나는 비행기 의자를 뒤로 젖혔다.

시트에 머리를 대니 은은하게 들려오는 비행기 엔진 소리에 절로 눈이 감겼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또렷하게 보여오는, 그룹 조간 회의에서 중공업 박한이 사장을 대신해 숙부가 입을 여는 모습.

‘이라크군 재건 사업. 특히나 군수품 조달권이 그 법인에 걸려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끝이 보이지 않는 나락으로 떨어지던 숙부. 그는 자신의 부하직원이 얼떨결에 내려 준 동아줄을 붙잡고 올라왔다.

무수히 많은 잔가시가 박혀 피 칠갑이 된 숙부의 손바닥. 무저갱에서 간신히 살아온 그의 시선이 나를 향한 채로 입을 열었다.

‘전략실장의 근시안적인 계획은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고자 그룹의 미래를 팔아먹는 짓 아니겠습니까, 이사장님?’

하이에나 같은 숙부의 얼굴을 생각하며 미간에 주름을 잔뜩 잡고 있자니, 피곤이 중첩되는 것만 같았다.

이라크.

회귀 전 탄약그룹에 대한 모든 것을 조사한다고는 했지만, 하필 구미 화약공장 법인에 그 사업권이 딸려 있다는 것은 몰랐었다.

“그렇다고 문제 될 것 따위야 아무것도 없지만….”

그러나 나는 미래를 알고 있기에 상관없었다.

이라크군 군수품 조달 사업권. 어차피 그거 오래 못 간다.

그룹 내부 문제 때문이 아니다. 제아무리 회귀한 사람도 어떻게 바꿀 수 없는 세상의 거대한 흐름 탓이다.

“그나저나 우리 실장님. 잠 안 잘 거면 이것 좀 봐봐.”

잉크 냄새가 진하게 나는 신문지를 펄럭거리며 내게 기사 한 꼭지를 내미는 김원철 아저씨.

때마침 보이는 사진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모양인지, 터번을 둘러쓴 사내들이 총기를 들고 트럭 앞에 선 모습이었다.

“세상에 무슨 이슬람 테러단체 애들은 그렇게 미국이 두들겨 팼는데 아직도 살아있는지 모르겄어.”

“걔들 앞으로도 안 죽습니다. 계속 중동에서 살면서 난리 칠 거예요.”

그냥 살아서 난리만 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마치 진화를 거듭하는 생물처럼 변화해, 지금 2008년의 알카에다는 그저 순한 맛으로 느낄 정도가 된다.

ISIL(이슬람 국가)이라는 핵불닭볶음 수준의 미치광이들로.

“흐음, 정말 그렇게 될라나?”

“네. 그래서 제가 이라크 사업권 포기하자는 거였고요. 그리고 지금 그 대안을 뚫으러 가지 않습니까.”

분명 회귀 전에도 ISIL은 그렇지 않아도 힘들던 탄약 중공업의 재무 상태를 악화시키는 데에 일조했다.

군수품 조달 계약을 맺었던 이라크군 정부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할 정도로 사고를 쳤으니까.

그렇기에 더더욱 찾아야만 했던 대안.

탄약그룹의 근본인 방산 산업의 기반을 유지하며, 동시에 이라크 사업권을 대체할 무언가를 가져가야 했다.

-승객 여러분, 저희 피넛항공 1014호 비행기는 이제 곧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의 킹 칼리드 공항에 착륙합니다. 안전벨트를 착용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때마침 내 귓가에 들려오는 착륙을 알리는 안내 방송.

이 여정의 목적지인 사우디아라비아.

ISIL이 창궐하던 2010년대에도 정부 시스템을 유지했던 기름 부자 왕정국가.

바로 이곳이 외부에 내 능력을 입증할 시금석이 될 것이다.

“잉? 벌써 다 왔다냐. 아무튼… 무슨 생각이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가장 먼저 만나야 할 사람이 빈 살만인가 하는 왕자 맞지?”

일 이야기가 나오자 언제 술을 마셨다는 양 취기를 얼굴에서 지워버린 김원철 아저씨.

고개를 끄덕인 나는 빈 살만 왕세자, 아니 지금 상황에서는 아직 수많은 왕자들 중 하나에 불과한 이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회귀 전, 사우디판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잡았을 때도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었으니, 지금은 20대 중반의 나이일 빈 살만.

분명 아직 새파란 애송이에 불과하겠지만… 나는 그의 숨겨진 발톱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알고 있다.

“맞습니다. 이븐 빈 살만 알사우드. 그 사람이 이번 일정의 알파이자 오메가거든요.”

“사실 나는 이해가 잘 안 돼서. 암만 그 양반이 왕자라 해도, 계승 순위도 떨어지는 데다가 나이도 어린데….”

영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의 김원철 아저씨.

이라크에 집중할 역량을 사우디에 쏟겠다는 내 생각을 지지하기는 하지만, 방법론에 문제가 있지 않냐는 물음이었다.

그리고 이 일견 타당해 보이는 질문에 내가 건넬 수 있는 답은 단 하나뿐이었다.

“어찌, 내 얼굴이 왕이 될 상인가?”

“참, 나. 그건 또 무슨 싸구려 연극 대사여?”

하, 이 아저씨 정말 예술 감각도 없다.

걸걸한 목소리로 읊은 생동감 있는 영화 대사에 몰입하지 못한 모양이다.

-쿵!

온몸으로 전달되는 비행기의 착륙 진동. 땅에 바퀴가 내려앉는 묵직함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나는 가방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멋들어지게 얼굴에 걸치며 미소를 지었다.

마치 실력 좋기로 소문난, 영화 속 모 관상꾼처럼.

“제가 왕이 될 상은 못 봅니다만, 왕세자가 될 상은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거든요. 일단 가서 보시면 압니다.”

* * * *

탄약그룹 본사 45층.

잠시 부재중인 한화기 재무 본부장의 집무실이 있는 이곳.

별도로 마련된 응접실에서는 세 사람이 간신히 바깥으로 목소리가 세어나가지 않을 만큼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빈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목에 핏대를 올리는 뚱뚱한 남자.

가장 먼저 열변을 토한 이는 탄약 중공업의 박한이 사장이었다.

“당신들은 진짜 내 덕분에 산 거라니까? 지금 상황 판단 좀 제대로 하자고, 쫌!”

“아, 내가 뭘 선배 덕에 살긴…. 그냥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 친 게 잭팟 비슷하게 터진 거면서.”

심드렁한 표정의 나덕술 탄약 건설 사장.

비록 박한이 사장이 한서준 전략실장의 칼춤을 추다가 멈추게 한 것은 인정하는 바였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박한이 사장 자신의 보신을 위함이었기에, 나덕술 사장은 삐쭉 내민 입을 좀처럼 거둬들일 생각이 없었다.

“얼레? 얌마, 나 사장아.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아닌 말로, KS 산업 건으로 죽을 뻔한 거 넘겼지, 중공업 공중분해도 잠시 유예됐지. 아, 내가 이득 본 게 뭡니까?”

“으이구, 이 답답아. 생각 좀 해라.”

주먹 쥔 손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팡팡 치는 중공업의 박한이 사장.

홍당무처럼 시뻘게진 얼굴의 그가 애써 목소리를 최소한으로 낮추어 입을 열었다.

“너 이라크에 뭐 걸려 있는지 생각 안 해? 이라크군 조달 사업 파토나면, 거기 해수 담수화 플랜트 사업은? 멀쩡하겠냐!”

“아….”

이라크 해수 담수화 플랜트 사업.

워낙 규모가 큰 사업이니만큼, 탄약그룹에서 중공업, 건설, 조선 해양 3사가 달라붙은 프로젝트였다.

몇 년 후에 있을 ISIL의 창궐 이후. 막대한 손실만을 남긴 채, 전부 허공으로 날아갈 것이었지만.

“크흠… 아, 선배. 그러니까 그때 해수 담수화 그거 하지 말자니까. 꼭 지금 와서 이렇게 문제 생기고 말이야.”

인상을 찌푸린 채 몸을 뒤로 빼는 나덕술 사장.

비록 탄약 건설은 이 사업의 주인공이 아니었지만, 그 또한 계열사 사장 자리에 있는 만큼 들은 것이 많았다.

공사 과정에서의 막대한 손실, 그리고 그를 감추기 위한 회계 부정.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껴안기라도 한 듯한 그의 얼굴에, 박한이 사장이 답답하다는 말투로 말을 이었다.

“옘병떨고 있네. 자슥아, 거 옆에 성 사장 봐라. 저 양반 벌써 머릿속에서 계산기 타다다닥 뚜들기는 거 안 보이냐?”

응접실에 들어온 내내 아무런 말이 없던 탄약 조선 해양의 성원식 사장.

이라크 해수 담수화 사업의 총책임을 맡은 그의 얼굴에는 칠흑보다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후우, 이라크 해수 담수화 플랜트. 그거 털리면 우린 다 죽습니다. 무조건 완공까지 가야 해요.”

“돌겠네. 대충 알고는 있었지만…. 셋 다 모가지 잘릴 판입디까?”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는 성원식 사장.

평소 늘 냉정함을 유지하던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다른 모양이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간신히 내뱉은 힘 빠진 목소리.

“사장 자리 보전이 문제가 아니고…. 부실 공사 터지고 분식회계로 손실 숨긴 거 까발려지면, 셋 다 양복 대신 죄수복 입는 겁니다.”

“하… 씨. 진짜. 한서준인가 뭔가 그 첩 새끼 하나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야, 증말.”

머리가 아픈지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문 나덕술 사장.

그가 가진 근심, 걱정만큼이나 진한 회색빛 연기가 허공에 내뿜어졌다.

그리고 그 매캐하고 절망적인 담배 연기 사이로 박한이 사장이 비장한 말을 내뱉었다.

“두 사람 다 이제 상황은 알 테고. 결국, 우리가 잡을 줄은 딱 하나라는 거 피부에 와 닿으쇼? 응?”

같은 배를 타게 된 세 사람.

비록 고개를 끄덕이거나 하지는 않았으나, 선택지는 단 하나로 정해져 있었다.

“한서준 전략실장. 그놈아가 이라크 대신 사우디로 물꼬를 트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그러려면….”

잠시 하던 말을 끊은 박한이 사장.

깍지 낀 손을 튀어나온 배 위에 올리고 한숨을 쉰 그가 눈에 불을 켰다.

두려움과 분노가 한데 뒤섞인, 오로지 살아남기 위한 불꽃을.

“한화기 재무 본부장. 그 양반한테 착 달라붙어야 합니다. 좋든 싫든 살고 싶거든 후계 구도에 개입해야 한다고.”

“하아, 인생 진짜… 말년이라도 좀 편하게 가나 싶더니만. 팔자에도 없는 피바람 맞게 생겼네.”

조선 해양 성원식 사장의 푸념에 어두컴컴한 늪처럼 착 가라앉은 분위기.

그렇게 세 명의 사장이 각기 살아남기 위해 이런저런 해결책을 궁리하고 있는데,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한화기 재무 본부장의 여비서였다.

“방금 재무 본부장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바로 안쪽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아이고, 우리 김 비서 땡큐야, 땡큐. 진짜 얼굴만큼이나 마음씨도 곱다니까.”

평소 같았으면 일개 여비서 따위야 고압적인 태도로 대했을 중공업의 박한이 사장.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친절하고 스윗한 남자가 되어야만 했다.

“어여들 가자고! 그런데 김 비서. 지금 본부장님 심기는 좀 어떠신가 모르겠네. 허허허.”

“음, 사실은… 그닥 좋지 않으십니다.”

“응? 왜? 아니, 어째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