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킬방원(2)
응접실 밖으로 나온 중공업, 건설, 조선 해양 3사의 사장들.
여비서의 안내를 받아 집무실 안쪽에 다다르자 보이는 것.
그것은 제 아버지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울부짖는 둘째 아들 한서후의 모습이었다.
“본… 본부장님! 아니, 아버지! 제 말 좀 들어 주세요! 한 번만, 제발 한 번만….”
손금이 없어질 만큼 손바닥을 싹싹 빌고 있는 한서후.
그의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 한화기의 냉혹한 성정을 알기에, 그에게서 버림받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직감적으로 알아서였으리라.
“구미 화약공장 건에 대해서는 한서준 그 천한 것이 잠시 할머니의 눈을 흐리게 한 것입니다! 다시 검토해주신다면….”
“이봐, 이놈 당장 가져다 치워.”
혈육의 정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서릿발처럼 차가운 말 한마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들이닥친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 그들은 한서후의 팔을 잡고 바닥에서 일으키기 시작했다.
“가셔야 합니다. 도련님.”
“아버지! 제발 기회를 주십시오! 딱 한 번만이라도….”
목줄 묶인 개처럼 바닥에 질질 끌려 나가지는 한서후.
육중한 금속제 경첩 소리가 그의 절규에 찬 목소리를 감춤과 동시에 문이 닫혔다.
자신의 아들의 비참한 퇴장을 지켜보는 한화기. 그의 낯빛에는 일말의 망설임 따위 비치지 않았다.
* * * *
“…….”
방금 전 그 모습을 눈앞에서 생생하게 지켜본 중공업, 건설, 조선 해양 3사의 사장들.
목울대에 침방울이 몇 번쯤 넘어갈 법한 시간이 흘렀다.
어색한 침묵의 연속.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중공업의 박한이 사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뵈러 왔습니다. 본부장님.”
“앉지. 자네들이 더러운 꼴을 보았군.”
머릿속을 잠식한 물음표 탓에 박한이 사장은 묘한 두려움을 느꼈다.
과연 자신 앞에 앉은 이 냉혈동물 같은 남자는 제 혈육에 어떤 처분을 내릴까?
그리고… 만에 하나, 이라크 해수 담수화 플랜트 건에 대해 알아차린다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자신에게는 과연 어찌 대할 것인가?
“크흠, 저기… 본부장님? 외람된 질문입니다만.”
때문에, 이 순간 박한이 사장은 확인해야만 했다.
평소 같았으면 감히 꺼내지 못할, 꺼내서는 안 될 물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한서후 팀장을… 어찌하실 생각이신지요?”
“우선 직급과 호칭부터 부적절해졌다. 한서후 그놈은 이제 탄약 손해보험 소속이 아니다. 차라리 중공업 쪽으로 빼는 편이 낫겠군.”
소파에 앉은 채, 옆으로 팔을 뻗는 한화기.
거기에는 어른 허리 높이의 대형 목제 지구본이 놓여 있었다.
무심한 표정으로 지구본을 돌리던 그가 적당한 방안이라도 찾은 듯, 입을 열었다.
“국내에 두면 걸림돌이 될 것이고. 미국이나 유럽은 분명 계집질 때문에 사생아 문제가 생길 터.”
“…….”
턱을 괸 한화기. 그 반대쪽 손가락이 다가감과 함께 빙글빙글 돌아가던 지구본이 멈춰 섰다.
금박으로 도금된 검은 대륙에 닿은 손끝.
그곳은 서아프리카 한가운데 위치한, 나이지리아라는 오지 국가였다.
“작금의 후계 구도가 정리되고 난 후, 장남에게도 힘이 실릴 때까지 대략 10년이면 적당하지 않겠나?”
“…그룹을 위하시는 본부장님의 사려 깊으신 그 마음. 가히 읍참마속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합니다.”
제 주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겉으로나마 내뱉은 아부의 말.
그러나 박한이 사장의 솔직한 속마음은 다음과 같았다.
‘옘병할… 독한 놈 같으니. 그래도 즈그 아들인데 아주 피도 눈물도 없네.’
나이지리아.
탄약 중공업 산하 광물자원개발팀에서는 유배지를 넘어 무저갱으로 불리는 곳.
가혹한 열대 환경에 군벌 세력 때문에 치안까지 맛이 간 나라이다.
‘아프리카 정글 한복판에 쌩으로 10년이나…. 그러면 피붙이도 아닌 내가 팽 당하면 막말로 개값도 못 받을 거 아니여.’
눈을 질끈 감은 박한이 사장.
이라크 해수 담수화 플랜트 건에 대해 생각하자니 머리가 아픈 모양이었다.
그는 곁눈질로 조선 해양의 성원식 사장에게 신호를 주었다.
어쨌거나 해수 담수화 건을 총괄하고 있는 사람이니 알아서 총대를 메라는 신호였다.
* * * *
“…본부장님. 말씀드릴 것이 있어 이렇게 만남을 청했습니다.”
“그래. 세 사람 다 무슨 일이지?”
눈이 붉게 충혈된 성원식 사장.
이라크 해수 담수화 플랜트 부실 공사와 분식회계에 가장 책임이 큰 그였던 만큼, 평소보다 긴장감이 배가된 모습이었다.
핏발 선 눈에 거짓 굴종을 담은 그가 한화기에게 대답했다.
“사우디로 간 한서준 전략실장. 혹여 성과라도 만들어 오는 순간, 구미 화약공장 건은 다시 점화되지 않겠습니까?”
지난 그룹 조간 회의.
첨예한 논쟁의 끝에 서명희 이사장이 내린 결론은 한시적 유보였다.
냉혹한 탄약그룹의 여제가 강단이 없다거나, 우유부단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그녀의 손자가 보인 자신감 넘치는 모습.
마치 앞으로의 일을 모두 알고 있는 듯한 그 확신에 찬 발언을 어떻게 증명할지가 궁금해서였다.
‘이라크 군수품 조달 사업권. 고작 그게 반대의 이유입니까? 이사장님, 탄약그룹의 근간이 고작 사업권 하나에 달렸다는군요.’
‘비꼬는 소리는 그쯤 허구. 전략실장, 자네 생각이나 말해보게. 아무리 그런들 방산 쪽을 버릴 수는 없어.’
‘먼 나라 이라크에는 이웃 나라 사우디가 있습니다. 비행기 티켓만 끊어주십시오. 곧바로 성과를 보이겠습니다.’
미간 사이를 깊게 찌푸린 한화기.
며칠 전 조간 회의 때의 기억하기 싫은 그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지는 모양이었다.
날카로워진 그의 목소리.
단어 하나하나에 신경질적인 격노를 담은 한화기가 조선 해양의 성원식 사장에게 반문했다.
“해서. 마땅한 해결책이라도 가지고 온 것인가?”
“물론입니다. 그건….”
“이봐, 성 사장. 먼저 알아두게. 지금부터 자네가 하는 말에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예?”
“방금 끌려나간 못난 아들놈 역시 스스로 내뱉은 말의 무게, 거기에 따른 책임을 지고 있으니까.”
숨이 턱턱 막힐 만큼 긴장감이 끓어오르는 집무실 안.
자신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한화기의 시선에 성원식 사장은 속으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어차피 이라크 건이 터져도 죽고 한화기 놈 마음에 안 들어도 죽는다. 하지만….’
군데군데 가시가 박힌, 쉽사리 타고 올라갈 법 못할 동아줄.
그러나 초가지붕 아래 부실공사와 분식회계라는 호랑이 떼가 으르렁거리며 자신의 목을 노리고 있는 상황.
성원식 사장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그 불안 불안한 동아줄을 잡는 것이었다.
구름 속에서 줄을 내린, 한화기라는 하늘 위 존재의 눈을 가려가면서까지.
“어차피 보험사 측에는… 한서준 전략실장의 논리를 들먹이며 협상하면 됩니다. 그들도 전액 부담보다는 1조 원 이내에서 합의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할 겁니다.”
말없이 눈썹 한쪽을 추켜올리는 한화기. 심기는 다소 불편할지언정 계속 말을 들어는 보겠다는 신호였다.
“그 1조 원의 가치만큼 이라크에서 벌어들이겠습니다. 저희 중공업, 건설, 조선 해양 3사가 힘을 합치겠습니다.”
“해수 담수화 플랜트 사업 말인가?”
“일단 조기 완공만 한다면… 그쪽 중앙정부를 설득해 2호기, 3호기까지도 지을 수 있을 테니까요.”
기세를 몰아 이번 기회에 아예 이라크에서 한화기의 회장으로 가는 치적 사업을 벌이자는 성원식 사장.
다시 찾아온 침묵.
그러나 이번에는 느낌이 달랐다.
머릿속으로 의심이나 질책 따위가 아닌, 진지한 고려와 계산을 하는 한화기.
벽시계의 째깍거리는 소리보다 심장 소리가 커질 무렵, 마침내 한화기가 입을 열었다.
“…해수 담수화 플랜트 조기 완공에 필요한 금액을 상신하도록. 비공식 라인으로.”
“감, 감사합니다. 본부장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직각으로 허리를 숙이는 세 사장. 한화기는 무심한 손목 놀림으로 그들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소파 깊이 묻은 몸. 이내 추가 예산이라는 현실적인 고민이 그의 머릿속에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후우, 이라크에 최소 5,000억 원 이상은 더 들어가겠군. 어쩌면 조 단위가 될 수도 있고.”
중공업, 건설, 조선 해양 세 사장이 온전히 믿음직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분명 아랫것들 나름의 이해관계가 있을 터, 그러나 어느 정도의 선을 넘지만 않는다면 용인할 수 있었다.
한화기에게 닥친 진짜 문제.
그것은 해수 담수화 플랜트 조기 착공에 필요한 자금 조달이었다.
“은행 PF 대출을 추가로 받는다 하더라도 마중물로 쓸 자금이 일부 있어야 하는데…. 참 이럴 때마다 선대의 비자금이 아쉽군.”
조세 피난처 어딘가에 잠들어 있는 약 1,000억 원에 달하는 비자금.
심지어 외환으로 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기에 범용성 또한 높았다.
지분 싸움에서 유용할 뿐만 아니라, 지금과 같은 급전이 필요한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로.
해결 못 할 문제가 신경을 긁는 모양인지 나무 탁자를 손끝으로 두들기는 한화기.
불쾌한 표정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도대체 그 비자금 관리하는 금고지기 놈이 누구인 거지? 어디 낯짝이나 한번 보고 싶군.”
* * * *
사우디아라비아 왕궁 대기실.
형형색색의 무늬를 한 카펫으로 장식된 이 방에서 갑자기 큰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푸에취! 으하… 갑자기 웬 오한이 등골을 타고 쭉쭉 올라오고 난리여?”
“일단 코부터 닦으시죠. 빈 살만 왕자에게 신뢰가 가는 첫인상을 남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맞지. 어흐, 그나저나 누가 내 욕이라도 하나 보다. 그것도 푸짐하게.”
갑자기 재채기가 거하게 나온 김원철 아저씨. 딱히 실내가 그렇게까지 추운 것 같지는 않은데 코감기라도 걸린 모양이었다.
나는 집사로 보이는 노년 남성에게 에어컨 온도를 높여달라고 요청했다.
그제야 조금 추위가 가라앉은 것인지, 김원철 아저씨는 테이블에 놓인 말린 대추야자 하나를 입에 넣은 채로 내게 말했다.
“하여간 이 나라는 기름 재벌이라 그런가, 에어컨 전기세 아까운 줄 모르고 팡팡 튼다니까. 뭐, 어찌 보면 부럽기도 하고.”
“그만큼 돈이 많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돈이 많으면 이곳저곳 쓸 곳도 많지요. 군사 분야같이 돈 먹는 하마한테까지도.”
“잘 되면 그렇겠지. 일단 빈 살만인가 하는 그 왕자. 지금 국방부 쪽에서 고관대작 노릇을 하고 있기는 하니 그거 하나는 다행이여.”
빈 살만.
회귀 전, 마치 태종 이방원처럼 사우디판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왕세자가 된 야심가.
지금 나는 나와 동갑인 이 왕자님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첫 커리어의 시작이 국방부니, 벌써부터 야심은 못 속인다는 거죠.”
“그건 또 뭔 뜬구름 잡는 소리여?”
“이제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마침 저기 오는 것 같네요.”
내 시선 끝, 황금빛 대리석으로 칠해진 복도.
한가운데를 비워둔 그곳에 양옆으로 사람들이 도열하듯 선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사내 한 명.
흰색의 아랍 전통의상을 입은 그 남자가 내 앞으로 다가와 거친 손을 내밀었다.
수양대군 수준을 넘어, 킬방원에 가까운 포스를 내뿜으면서.
“서준 한? 나를 찾는다는 사람이 당신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