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개선장군(2)
탄약그룹 본사 맨 꼭대기 층.
의자에 앉은 서명희 이사장이 몸을 돌려 창가를 바라보았다.
어두운 새벽, 김이 살짝 서린 창문.
주름진 손바닥으로 하얀 김을 닦아내니, 그 사이로 보이는 것은 어둠 속 도심의 모습이었다.
환히 켜진 불이 채 꺼지지 않은, 새벽녘 어스름한 도심의 풍경.
“시간이 눈 깜짝할 새 지나가 버렸군. 늙으면 꼭 이런 게 안 좋아.”
언뜻 느끼기에는 한없이 밝아 보이는 야경. 그러나 서태후는 알고 있었다.
이까짓 전깃불 따위야 곧 떠오를 태양 앞에서 한낱 반딧불이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금 창가에 스멀스멀 올라오는 한기. 방금 지웠던 하얀 김이 금세 올라와 유리창을 가렸다.
‘이제… 정말 마음을 정해야 할 때가 된 겐가?’
차디찬 유리창에 손바닥을 올린 서명희 이사장.
빌딩 숲 사이를 밝히던 불이 하나둘씩 꺼지고, 곧이어 인왕산과 안산 사이로 환한 빛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 순간, 끓는 물 속에 녹는 눈처럼 순식간에 사라진 창가의 하얀 김.
산 위로 솟아오른 태양은 서태후 그녀에게 소리 없이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당신의 세상을 밝히는 일은 이제 다른 이에게 넘길 때가 되었다고.
‘대왕대비 노릇도 그만할 때가 되었지.’
다시 의자를 돌린 서태후. 뒤쪽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햇살이 그녀 앞에 놓인 책상을 향해 환한 빛을 내리쬈다.
잘 손질된 마호가니 목재로 짜 맞춘 책상 위. 햇빛이 내려앉은 그곳에는 오늘 자 조간신문 한 부가 놓여 있었다.
-[1면 단독] 탄약그룹, 90조 원 규모의 역대 최고 방산 수출액 달성! 사우디와의 군사 협력을 통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해….
“…….”
까끌까끌한 손바닥으로 신문지를 쓸어 올리듯 매만지는 서태후.
대견스러움과 놀라움이 섞인 그녀의 시선은 아래쪽을 향하다가 다시 위쪽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그 눈길 끝에 다다른 사진 한 장.
이미 세상을 떠난 큰아들과 아직 품 안에 있는 작은아들이 함께 찍은 사진.
차갑게 얼어붙은 여제의 눈이 씁쓸한 우수에 잠겼다.
“그래도 꼴에 어미라고 손주보다 아들인 겐가 보군. 후우….”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탄식을 내뱉은 후, 서명희 이사장이 거세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탄약그룹의 안주인. 그 엄중한 책무의 무게를 알기에, 가슴 아픈 모성애가 끓어오르는 것도 억눌러야 했다.
액자 위에 손을 올린 서태후.
다시금 냉엄한 여제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녀가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사사로운 감정에 일을 그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느덧 완연히 떠올라 창가에 빛을 내리쬐는 새로운 태양.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의 세상을 한시라도 빨리 밝히려는 것만 같았다.
눈이 부셨는지 이마 자락을 쓸어 올린 서명희 이사장.
그녀가 애처로운 헛웃음을 지으며 비서를 부르기 위해 호출 벨을 눌렀다. 들릴 듯 말 듯한 혼잣말과 함께.
“알았다. 서준이 네놈 뜻대로 될 게다. 그만 보채거라. 하지만….”
금세 다가와 문을 두드린 비서.
서태후는 비서에게 그룹 조간 회의에 참석할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허리를 숙인 비서가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다소 누그러진, 차갑고도 근엄한 표정.
한 늙은 어머니의 시선 끝에 닿은 사진이 부옇게 번져갔다.
“전에 약속한 석 달의 시간. 네놈 숙부에게도… 동등하게 적용하마. 그것까지는 이해할 것이라 믿는다.”
* * * *
잔뜩 굳은 표정의 유지원 감찰팀장.
한화기 앞에 차렷 자세로 선 그는 마치 석고대죄를 하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정보가… 끊겼습니다. 이사장님 수행 비서 쪽 라인 전부가 연락 두절 상황입니다.”
머리통을 양쪽 어깨 사이에 넣어 피탄 면적을 최대한 줄여보려는 유지원 감찰팀장.
안 그래도 최근 사우디에서 들어온 정적의 소식 때문에 신경이 잔뜩 날카로워져 있던 제 주인이었다.
당장 들고 있는 만년필 같은 것이 날아오더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
다가올 고통에 대비해 유지원 감찰팀장이 눈을 감은 채 이를 앙다물었다.
“끄흡!”
“…언제부터 그리된 거지?”
평소 보여준 사나운 성정과는 달리 오늘따라 유독 차분한 한화기의 모습.
마치 이럴 일이 일어날 것을 앞서 예상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예? 그게 그….”
“이봐, 유지원이. 정신 차리고 구체적인 날짜를 말해라.”
“예, 예! 2주 전쯤, 그러니까 사우디에서 왕자의 난이 일어나기 사흘 전에 운전기사 하나가 경질된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그 사건 전부터 신경을 썼다는 것인가….”
서걱거리는 만년필 소리를 내며 종이 위에 지나간 시간대를 퇴고하는 한화기.
타임라인을 그려보니 아직은 수용 범위 내의 일이었다.
그 운전기사의 경우에는 포섭한 지 제법 오래된 자였던 만큼, 그저 꼬리가 너무 길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운전기사 이름 옆에 엑스(X) 표시를 한 한화기가 유지원 감찰팀장에게 물음을 던졌다.
“그리고? 다른 놈들은?”
“나머지 비서들의 경우… 최근 하루 이틀 내로 전부 급히 물갈이된 상황입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본부장님!”
“…아예 혹시 모를 싹까지 전부 잘라버렸다는 건가? 하, 그래. 수십 년 동안 봐온, 어머니다운 방법이군.”
더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 손짓으로 유지원 감찰팀장에 축객령을 내린 한화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그는 탄약그룹의 조직도가 걸린 벽 앞으로 향했다.
그림 맨 꼭대기, 이제는 비어버린 회장 자리.
손가락으로 왕관의 보석과도 같은 그 자리를 꾹꾹 누른 한화기가 다시 조직도 아래쪽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중공업, 건설, 조선 해양….”
직함 옆에 함께 부착된 세 계열사 사장의 사진.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결코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신용은 할 수 있을지언정, 신뢰만큼은 할 수 없는 이들.
철저히 자신들의 득실에 따라 움직이는 자들이기에, 한화기는 머릿속으로 그들의 이해관계를 다시금 되짚어 보아야만 했다.
“이라크 해수 담수화 플랜트. 서둘러 추가 공사 자금을 도입해야겠군.”
아직 이라크 현장의 부실 공사와 횡령, 분식 회계에 대해서 알지 못한 한화기.
컴퓨터 전원을 누른 그가 그룹 전체를 연결한 장부를 화면 위에 띄웠다.
당장 융통할 기미가 보이지 않을 만큼 빡빡하게 짜여 있는 현금 상황. 그룹 전체적인 부실을 뱃속에 담고 있는 탄약그룹의 민낯이 거기 있었다.
결국, 장부 그 어디에서도 끌어올 여유 자금을 마련하기에 여의치 않은 상황.
의자에 몸을 누인 한화기가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1,000억 원. 그 정도 마중물만 있다면, 은행 PF 대출을 끌어올 수 있을 터.”
다시 벽 쪽으로 옮겨진 한화기의 시선.
조직도 맨 위 칸, 이제는 아무 말 없는 고인(故人)이 된 그의 친형의 혼이 그 안에 들어있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하필 부족한 액수도 딱 선대의 비자금만큼이로군….”
선대의 비자금.
자신의 친형이었지만, 젊은 나이에 회장직에 올랐던 선대 회장은 말할 수 없이 철두철미한 자였다.
당시에는 감히 한화기 자신이 회장 자리에 욕심을 내지도 못해본 정도로.
그런 선대가 유사시를 대비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필시 비자금 운용에 대해 이중 삼중으로 금고지기 노릇을 할 놈을 심어두었을 터.
“그 자금 추적만 된다면, 이라크 해수 담수화 플랜트 확장 공사 건을 업적으로 삼을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한서준 그놈도….”
조직도 아래 방향.
이제는 이미 그룹 내에서 유명해진 전략실 칸에 눈이 간 한화기.
전략실장 자리. 반드시 넘겨야 할 조카의 사진 옆에, 부실장 직함을 달고 있는 웬 중년 대머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세상 편해 보이는 웃음을 짓고 있는 대머리의 사진.
선대 회장의 최측근이자 지금은 그의 아들을 모시는 중인 김원철인 만큼, 분명 비자금의 행방에 대해 알고 있을 터.
“김원철…. 쉽지 않은 놈이다. 한 번에 숨통을 끊어야 한다.”
생각을 마친 후 곧장 전화기를 집어 든 한화기.
이른 아침이지만, 분명 그룹 조간 회의 준비를 위해 책임자 직급의 누군가는 나와 있을 터.
얼마 지나지 않아, 재무 본부 소속 임원 중 하나가 다급히 전화를 받았다.
“아이고, 본부장님요. 전화 받았십니더. 정철식 전무입니다.”
“지금부터 지난 15년 치 회계자료 준비해서 데이터 파일로 보내라. 특히 해외 계좌 쪽으로 송금한 기록은 따로 첨부하도록.”
갑자기 재무 본부에 쏟아진 업무 폭탄.
곤혹스러움을 미처 감추지 못한 정철식 전무가 추가 질문을 던졌다.
“아… 그, 혹시 외부 감사 대비용입니꺼? 우째, 형식을 회계법인 쪽에 제공하는 식으로 맞춰야 합니꺼?”
“내부 감사용이다. 형식은 자유롭게 해도 좋으나, 최대한 빨리 제출하도록.”
“마, 알겠심더. 함 해보겠습니다.”
외부와 연결되지 않은 자체 서식.
마치 무인이라도 된 것처럼 한화기의 눈에 불이 들어왔다.
그간 휘둘렀던 무딘 칼날이 그에게 굴욕과 패배를 안겨주었기에, 지금부터 새로이 날을 세운 도검을 만들려는 한화기.
불법으로 형성한 선대의 비자금인 만큼, 이번에 그의 조카를 향해 찌를 칼에는 숨통을 끊어놓을 만한 독이 발릴 것이었다.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만큼, 악독한 독약이.
“회장 간택까지 남은 시간은 한 달 하고도 반. 그 안에… 반드시 끝을 보겠다.”
* * * *
“아이고! 아이고, 전략실장님 오셨습니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요.”
오늘의 조간 회의의 모습은 기존과는 정반대의 분위기였다.
견제와 멸시, 회의와 의구심으로 가득 찼던 지난 회의 때와는 달리, 대놓고 내 쪽에 줄을 서려는 임원들.
회의가 시작되기도 전, 끝없이 쏟아지는 아첨 섞인 덕담에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 정도였으니까.
“참으로 감축드립니다, 단군 이래 최대 방산 매출액! 역시 선대 회장님의 혈통이십니다! 장차 그룹을 이끌어 주실 재목임을 이제야 알아뵙습니다.”
가장 먼저 내게 붙은 그룹 본부의 인사담당 전무.
역시 회사 내부에 소식이 가장 일찍 도는 인사팀 출신답게, 힘의 균형추가 어디로 기우는지 금세 알아챈 모양이었다.
“믿고 있었습니다요, 실장님. 사우디에 날아가시던 그 당찬 모습!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암요! 그 험한 곳에 몸소 가셔서 정말 큰일을 하셨어요. 이제 이 늙은이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늙어서도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은 욕심이 그득한 각 계열사 임원들.
그들 역시 하나같이 사우디에서 내가 벌인 일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나 중공업, 건설, 조선 해양 3사의 사장들과 나와의 관계가 영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 자리를 두고 충성경쟁을 벌이는 모습이었다.
‘거기, 싹 다 통폐합하고 부실한 부분은 핵몽둥이로 싹 때려 부술 건데….’
속으로는 거센 개혁의 깃발을 올렸으나, 겉으로는 사람 좋은 웃음과 함께 화답을 주는 나.
슬슬 이 의미 없는 찬사도 지루해질 찰나, 때마침 진행을 맡은 직원이 마이크에 대고 입을 열었다.
“재무 본부장님 들어오십니다!”
열린 문 사이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굳은 표정의 숙부.
그는 내 맞은편 자리에 서, 나를 내려보듯 응시했다.
그리고 그 숙부를 호종하듯 뒤따라 들어오는 중공업, 건설, 조선 해양 3사의 사장들.
“크흠….”
그저 마른 헛기침만 내뱉을 뿐,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세 명의 사장.
분명 국방부 차관이 내 쪽으로 붙은 것을 알아챈 것일 터. 나를 담그려고 했던 이들인 만큼, 꼴에 마음속 어딘가 켕기는 부분이 있기라도 한 모양이다.
“…….”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양쪽으로 나뉜 임원들.
순식간에 회의실 안은 침묵으로 가득 메워졌다. 마치 살얼음 낀 빙판 위의 모습처럼.
“다들 앉지도 않고 뭣들 허는 겐가? 슬슬 시작들 해.”
그리고 그 위태로운 얼음장 위에 조약돌을 던진 사람은, 가운데 자리에 앉아 이 모습을 모두 지켜보고 있는 서태후였다.
“전략실장. 자네가 마련한 자리이니, 먼저 말해 보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