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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의 핵몽둥이-26화 (26/300)

26화개선장군(3)

“이제 바람 앞의 등불 같았던 그룹의 명운에 다시금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룹 조간 회의.

오늘의 주제는 사우디군 국방개혁 총괄 업무 수주에 관한 공식 보고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발표를 해나갔다.

곧이어 흰 바탕 위에 등장한 한화 90조 원이라는 검은 글씨.

멍한 눈으로 빛나는 무대 위를 지켜보는 관객들을 향해, 내가 마지막 발언을 내뱉었다.

“사우디에서의 실적. 그리고 구미 화약 공장 사태 해결까지. 우리 탄약그룹은 이번 일을 계기로 두 마리 토끼를 잡아냈습니다.”

흔들리는 임원들의 눈동자.

이미 아까부터 패가 갈린 상황이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자기들끼리 귀엣말로 무어라 속삭이고 있었다.

어디에 줄을 서야 할지 다시금 고민하는 듯한 그들.

이런 상황에서는 방황하는 어린 양들에게 명백한 신호를 주어야 한다. 새로운 주인을 섬기더라도, 잔혹하게 도축되지 않을 것이라는 의사 표현을.

“위기를 기회로! 앞으로 ‘제가’ 주도할 탄약그룹에는 기업가 정신을 가진 ‘인재들’이 전면에 나서야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데구르르, 눈알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잠시 내리깔린 침묵 속 미묘한 눈치싸움.

기존에 내 편에 섰던 사람들이 손뼉을 치고 환호의 찬사를 부르려던 그때.

맞은편에서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던 이들로부터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마지못해 결단을 내린듯한, 어색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짝짝짝짝!

“그룹 역사에 다시없을 성과입니다! 이토록 훌륭하신 전략실장님께서 이끄실 미래. 정말 기대됩니다!”

“암요. 저희 임원들부터 실장님께서 말씀하신 기업가 정신. 거기에 걸맞은 인재로서 자기 계발에 힘을 쏟아야지요.”

미묘한 반응.

웃고 있는 입과 대비되는, 경직된 채 움직이지 않는 눈. 어색하다.

반대파였던 자들의 충성서약을 얻어냈지만, 그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은 내가 궁예가 아니더라도 알 수 있다.

겉으로나마 손바닥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리는 상황에서도, 이들의 시선은 숙부를 향하고 있었으니까.

‘90조 원이라는 막대한 규모에 잠시 힘의 균형추가 기운 것에 불과하다는 건가….’

확실히 나만의 충성 세력을 만들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던 것 같다.

아니, 따지고 보면 회귀 후 불과 한 달 반 만에 이 정도까지 온 것이 기적이라고 봐야겠지.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성원에 힘입어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허리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표한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좌중을 둘러보았다.

쓸만한 구석이라고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무능한 임원들. 그저 자리보전에만 급급한 보신주의자들이다.

그러나… 이 쓰레기 더미 사이에도 분명 보석은 있었다.

손수건으로 연신 흐르는 땀을 훔치는 그 남자는, 다른 이들처럼 내게 박수갈채를 보내는 대신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이고, 이거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탄약 증권 구석수 사장.

감당할 수 없는 불안함이 얼굴에 서린 그는, 마치 죄라도 지은 것처럼 나와 숙부 두 쪽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 * * *

잠시 시간을 거꾸로 돌려, 그룹 조간 회의가 시작되기 전 이른 아침.

구석수 탄약 증권 사장. 본래 그룹 재무 본부에 있던 그는, 불과 1년 전 탄약 증권 사장 자리로 영전했다.

그렇기에, 그의 후임으로 들어온 그룹 재무 본부의 정철식 전무는 종종 곤란한 일이 생길 때마다 구석수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자문을 구했다.

마치, 이번 일에서 그랬던 것처럼.

“하… 석수 행님. 그 한화기 본부장 말인교. 대체 나한테 와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더. 갑자기 업무 폭탄을 떨구고 갔다 아입니꺼?”

그룹 조간 회의 준비 때문에, 아침부터 한창 바쁜 시간을 보내던 구석수 사장.

관련 서류를 모두 검토하고 잠시 의자 목받이에 기대 숨을 돌리려는 찰나, 후배로부터 걸려온 전화에 그가 반색하며 대답했다.

“하이고, 철식이 너나 나나 한씨 집안 주인댁 양반들 때문에 나이 50 넘어서도 고생이다.”

“임원을 달아도 행랑아범 꼴인가 보네예. 팔자도 참 박복합니더.”

“아무튼, 이번엔 또 무슨 일인데?”

“그 한화기가 새벽부터 대뜸 전화 하드만, 15년 치 회계자료를 쌩으로 정리해서 올리라 카데예? 한 달 내로.”

“15년 치를… 한 달 내로? 무슨 세무조사나 공정위 조사 같은 비상이라도 걸린 것도 아닌데?”

평소에는 있을 수도 없는 지시.

붉은색 경보음이 구석수 사장의 직감을 강타했다.

머릿속에 펼쳐진 이 난해한 퍼즐 조각을 바라보고 있는 구석수 사장.

사내정치에 영 젬병인 정철식 전무는 그 속도 모른 채, 제 할 말만을 이어나갔다.

“하모예! 지금 인력 보강도 안 되았는데, 이거 가지고 뭘 우짜라는 긴지 모르겠심더. 아무리 내부 감사용이라지만….”

“내부 감사용? 한화기 재무 본부장이 직접 그런 말을 하던가?”

“마, 그랬지예. 누가 고마 외국서 사고를 쳐뿌렀는지, 해외 계좌 쪽으로 송금한 기록은 따로 첨부하라 합니더.”

무려 15년 치 자료. 거기에 해외 계좌 송금 기록에 맞추어진 가늠쇠.

느낌이… 좋지 않았다.

잠시 할 말을 잃은 구석수 사장은 잊고 있었던, 아니 잊어야만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선대 회장의… 비자금?”

구석수 사장이 탄약 증권으로 옮기기 전. 재무 본부에서 임원으로 일하던 시절, 그가 유독 눈여겨보던 부분이 있었다.

마치 배관 어딘가에서 한 방울씩 누수된 기름처럼, 그룹의 해외사업부 여기저기서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던 외화.

‘이건 도대체….’

분명 의심은 있었다.

돈이 움직인 흔적은 발자국을 남기는 법.

흘러나온 달러 뭉치는 태평양의 작은 섬나라를 거쳐 마카오로, 다시 유럽의 조세피난처로 향했으니까.

남들은 보지 못한 자금의 흐름 때문에 머리를 싸매던 구석수 사장.

결국, 고민하던 그는 선대 회장의 최측근인 김원철을 찾아갔었다.

명쾌한 해답을 듣고 싶었던 구석수.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예상 범위 밖의 것이었다.

‘흐흐흐… 이거 어쩝니까?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되었나 보네요. 다음에 또 만나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구석수 전무님은 영민한 사람이지만, 배포가 작기에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시죠?’

‘…….’

‘곧 인사이동이 있을 겁니다. 탄약 증권 사장으로 영전하실 터이니, 이 일에 대해 더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아 주세요.’

권유 반 협박 반으로 이루어진 승진.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규모의 정보를 접했다는 사실은, 그에게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날 이후 구석수 사장은 머릿속에서 선대 회장의 비자금이라는 존재를 지우려 애썼다. 아니, 애써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 그토록 잊으려 했던 그 비자금의 존재가 세상 밖으로 튀어나오려 하고 있었다.

“행님? 행님? 거, 크게 좀 말해주이소. 전화가 이상한가, 지금 잘 안 들리는데예?”

“어? 어어… 아니야. 혼잣말이야. 그… 철식아.”

“예, 행님. 말씀하이소.”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구석수 사장.

자기도 모르는 사이, 왕좌를 둘러싼 태풍의 핵에 앉아 있는 꼴이었다.

그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시계를 보니 그룹 조간 회의까지 남은 시간은 한 시간여. 그 짧은 시간 내에 구석수 사장은 결정해야만 했다.

자신이 살기 위해 잡아야 할 동아줄은 한서준인가 한화기인가를.

“철식아… 너 나 믿을 수 있냐?”

“마, 햄! 내 의리 빼면 시체 아입니꺼. 내 대학 하숙집 때부터 시작해가, 행님 아니었음 예까지 때리 쥑여도 못 올라왔을 낍니더.”

선대 회장의 비자금.

김원철이 관여되어 있으니, 십중팔구 한서준 손에 들려 있을 가능성이 큰 상황.

그리고 한화기 측에서는 이를 이용해 무언가 큰 기술을 걸려고 하고 있다.

벌벌 떨리는 손. 애써 주먹을 꽉 말아 쥔 구석수 사장이 심호흡을 내뱉으며 말했다.

“후우…. 한화기 본부장이 내린 지시. 그거 하지 마라.”

“행님? 그기 무신 말인지 내는 이해가 잘 안 갑니더.”

“15년 치 정리하다 보면 무슨 말인지 알 거야. 다른 건 몰라도… 해외 계좌 쪽으로 송금한 기록. 그건 누락하는 쪽으로 가자.”

선대 회장의 비자금으로 의심되는 정황에 대해 간략히 설명을 이어나간 구석수 사장.

고민을 마친 재무 본부의 정철식 전무가 그에게 대답을 주었다.

“뭐가 건들면 안 되는 게 있긴 있나 보네. 마, 알았심더. 일단 행님 하자는 쪽으로 갈 터이니 걱정 마이소.”

“믿어줘서 고맙다. 철식아.”

“고맙긴예. 딱 보니 잘못 건들다가 피박살 나게 생겼는데, 차라리 행님 판단이 맞지 않나 싶네예. 인자 들어가이소.”

통화를 마무리한 구석수 사장.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니 그룹 조간 회의까지 남은 시간은 불과 40여 분.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귀에 맞닿아 체온이 남은, 따뜻한 전화기를 다시 집어 든 그는 다시 어디론가 통화를 시도했다.

-따르르르릉

속절없이 길게 울리는 통화 연결음 소리. 평생 권력 투쟁과는 거리를 둔 샌님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었다.

“받아라…. 제발 받아라….”

한서준.

구석수 사장이 인생 처음으로 베팅한 경주마.

그가 검증되지 않은 신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건 까닭은, 단순히 사우디에서의 일 때문만은 아니었다.

“<코코아 뱅크>. 그 명동 악바리 유태촌을 어떻게 설득했나 싶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한화기에게 탄약 증권 지분을 빼앗기다시피 한 유태촌. 그의 비정상적인 행보는 구석수 사장의 경계망에 늘 들어가 있었다.

거기에 구석수 사장 자신의 눈이 닿는 곳에는 한씨 가문의 핏줄, 한서희의 움직임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적어도 같은 금융 계열사로 묶인 만큼, 그녀의 행동은 구석수 사장에게 조금 늦을지언정 보고가 올라오기는 했으니까.

“요새 탄약 캐피탈에서 웬일로 한서희가 조용하다 했었지. 정말이지 이런 식의 판이 짜여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 했는데….”

한화기와 그의 어리석은 두 아들은 상상도 못 할 혁신성, 스마트폰을 이용한 인터넷 전문은행.

은산분리를 피해 간다는, 자신이 상상도 못 했던 기획을 해낸 한서준으로부터 그는 미래가 생생하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미래는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다.

딸깍, 소리와 함께 구석수 사장의 귓가에 들리는 젊은 사내의 목소리.

“한서준입니다. 전화 주신 분이 구 사장님 맞으십니까?”

“예. 구석수 사장입니다. 전략실장님, 혹시… 지금 옆에 김원철 부실장도 같이 계십니까?”

수화기 너머로 곧바로 들려오는 특유의 얇은 목소리.

스피커폰으로 통화하자는 요청을 한 구석수 사장이 한서준과 김원철, 두 사람에게 즉각 본론을 꺼냈다.

“한서준 실장님, 김원철 부실장님.”

“말씀하십시오. 무슨… 일이십니까?”

“후…. 선대 회장의 비자금. 한화기 재무 본부장이 그 존재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걸 무기로 실장님을 공격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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